• 마오쩌둥, 시바이포 떠나
    드디어 베이핑에 입성하다
    [국공내전-55] "우리는 제2의 이자성이 되어서는 안된다"···교만 경계
        2020년 09월 30일 11: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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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바이포의 마지막 중앙위원회

    1949년 3월 5일, 공산당은 허베이성 핑산현 시바이포에서 7차 2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3월 13일까지 계속되었는데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등 34명의 중앙위원이 참석하였다. 마오쩌둥은 이 회의를 주재하며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전국 승리국면에서 당의 사업 중심이 농촌에서 도시로 바뀌어야 한다. 전국을 장악한 뒤 정치, 경제, 외교 방면에서 기본정책을 채택해야 한다.” 마오의 보고에 따라 회의는 다음과 같은 방침을 토론 결정하였다.

    1) 국민당 통치를 철저하게 뒤엎고 전국을 탈취한다.

    2) 중공의 사업중심을 농촌에서 도시로 전환한다. 생산과 건설을 사업의 중점으로 한다.

    3) 승리 후에도 두 가지 기본 모순이 여전히 존재함을 분명히 하였다. 하나는 무산계급과 자산계급 간의 모순이며 다른 하나는 중국 인민과 제국주의 사이의 모순이다.

    4) 당의 기강 강화를 위해 지도자의 생일 잔치를 금지하고, 지도자의 이름으로 거리나 기업 등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한다. 개인의 공이나 덕을 찬양하는 것을 방지한다.

    5) 군대에 대한 영향을 인정하고 군기(軍旗)에 관하여 결의하였다.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국민당 잔여부대 처리방식을 세 가지로 나누어 언급하였다. 텐진 방식, 베이핑 방식, 쑤이위안 방식으로 명명하였는데 전투로 해결하는 것을 텐진 방식이라고 하였다. 평화적인 빙법으로 압박하는 것이 베이핑 방식이며 국군을 인민해방군 편제로 신속하게 개편하는 것을 쑤이위안 방식이라고 하였다. 국군이 인민해방군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갈수록 커질 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마오쩌둥, 승리 후 교만을 경계하다

    3월의 시바이포 정치국 회의는 임시 주둔지에서 열린 마지막 회의였다. 이 회의 후 마오쩌둥과 중공 지도부는 베이핑에 입성하여 전쟁 지도와 해방구 통치를 계속하였다. 7차 2중전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승리 후의 교만”을 각별하게 경계하였다. 마오쩌둥은 일찌감치 이런 생각을 회의에서 제기하였다.

    1949년 1월에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이렇게 발언했다. “승리한다고 해서 머리가 혼미해지면 안된다. 지금이 그런 시기이다. 어려울 때는 단결하기 쉽다. 승리한 뒤가 오히려 문제다. 승리가 클수록 부담도 커진다. 간부들에게 이것을 교육해야 하고 고급간부일수록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전쟁이 끝나고 진짜 일이 시작되면 싸우는 것이 오히려 쉽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7차 2중전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다시 전 당에 경고했다. “승리로 당 내에 교만한 정서가 있다. 자신이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며 진보하려는 것을 멈추려는 것, 향락을 추구하며 힘겨운 생활을 하지 않으려 하는 풍조가 자랄 수 있다. 승리하면 인민들이 우리에게 감사하고 자산계급까지 나와 우리를 성원할 것이다. 적이 무력으로 우리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하지만 자산계급의 갈채는 우리 대오 중 의지가 약한 사람을 정복할 수 있다. 그들은 적들에게 영웅 칭호를 듣더라도 겸연쩍어 하지 않는 것이며, 당의정과 같은 달콤한 공격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예방해야 한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결론지었다.“중국 혁명은 위대하지만 혁명 이후의 노정은 더욱 길다. 그후의 사업은 위대하지만 더 힘겨울 것이다. 이 점을 당내에 분명히 해야 한다. 동지들은 계속 좋은 작풍을 지켜 나가야 한다. 겸허, 근신, 오만하지 않은 것, 조급하지 않은 작풍을 유지해야 하며 어려움을 참고 분투하는 작풍을 지켜야 한다.”

    회의 폐막 전 마오쩌둥의 제안에 따라 참석자들은 6개조의 규정을 신설했다. “생일잔치를 하지 않고, 선물을 주지 않으며, 술은 조금만 권하고, 박수는 적게 치고, 사람 이름으로 지명을 만들지 않고, 중국 동지를 마르크스 레닌과 같은 반열에 두지 않는다.”

    마오쩌둥은 베이핑에 입성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베이핑에 시험을 보러 가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제2의 리쯔청(李自成)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리쯔청은 명나라 말기 농민반란 지도자였다. 명나라 수도 베이징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42일만에 패하여 물러났다. 리쯔청은 명나라 황제가 누린 향락을 흉내내었다고 한다.

    6조 규정의 기원

    본래 마오쩌둥은 검소할 뿐만 아니라 소탈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1947년 12월 25일에서 28일까지 중공 중앙은 섬북 미즈현(米脂縣) 양자거우(楊家沟)에서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때 마오쩌둥의 54세 생일이 되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생일축하 국수를 먹자고 제의하였다. 마오쩌둥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옌안을 잃고 무슨 생일인가? 전쟁 기간에 수많은 동지들이 혁명을 위해 피를 흘리며 희생하고 있다. 기념하려면 그들을 기념해야지 나 개인의 생일을 쇠는 것은 인심을 거스르는 것이다. 부대와 군중들이 식량부족으로 고생하는데 생일을 쇠라니 나보고 군중과 멀어지라는 것인가? 1948년 연말 마오쩌둥은 55세 생일을 맞았다. 중앙 기관 요원들이 마오에게 생일을 쇠자고 하였다. 마오쩌둥은 “좋지 않은 영향이 있다.”며 거절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당의 지도 인사들은 생일 잔치를 하지 핞도록 하자. 이것을 아예 규정으로 만들어 위반하지 않도록 하자.”고 제의하였다.

    선물을 주지 않는 규정은 공금으로 선물이 오고가는 기풍을 걱정한 것이었다. 선물이 사치와 낭비를 조장하고 간부들이 군중들로부터 멀어지거나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마오쩌둥은 당내 간부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펑더화이는 더 심해서 한턱 내거나 선물 주는 것을 더욱 싫어하였다. 펑더화이는 곧잘 “당신이 무슨 한턱을 낸다는 건가? 인민이 내는 것이고 국가가 내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 하고 일갈하였다.

    술과 관련해서는 이런 일화가 있다. 1949년 초 스탈린의 조수 미코얀이 시바이포에 왔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주량을 겨루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이 반대로 제안했다. 술 한잔 마실 때마다 붉은 고추 한 개씩 먹자고 한 것이다. 배갈 두 잔을 마시고 미코얀은 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마오쩌둥은 술 적게 권하기를 제의하였다.

    마오쩌둥이 박수를 적게 치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인민들은 전쟁에 동원되어 희생되고 재산에 손해를 보았으며 그 수고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도 인사를 위해 허장성세로 박수 치는 것을 꺼렸던 것이다. 1949년 3월 23일, 당중앙이 시바이포를 떠나 베이핑으로 입성할 때의 일이다. 바오딩시 인민들이 환영의식을 거행하자고 하자 마오쩌둥은 견결히 반대하였다. 저우언라이는 화북국에 전화를 걸었다. “경축대회를 한다고 들었다. 주석이 못마땅해 한다. 베이핑도 경축대회를 하지 않도록 하라. 당 중앙이 이동한다는 명의로 인민에게 경축하라고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베이핑이나 각지의 경축활동을 중지하도록 하라.” 저우언라이는 특히 강조하였다. “축포는 더 안된다. 군악대로 대체하라.”

    장녀 리민과 함께한 마오쩌둥

    세계 여러 나라에 국가 지도자의 인명을 지명으로 쓰는 일이 적지 않다. 당시 공산당에 벌써 마오쩌둥 등 지도인사들 이름으로 도시 이름을 짓자는 이가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를 견결히 반대하였다. 마오는 1946년 6월 18일 ‘신화일보’에 “혁명 영수와 열사의 이름을 남용해서는 안된다.”는 글을 쓴 일이 있었다. “최근 어느 지방의 행정기관에서 혁명 영수의 이름을 마음대로 써서 지역이나 시가의 이름을 짓는 일이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만 기념하는 것이다. 이렇게 혁명 열사나 영수의 이름을 남용하면 군중들이 헷갈릴 수 있다.”

    1948년 가을, 화북대학교 교장이던 우위장(吳玉章)이 마오쩌둥 사상을 “마오쩌둥주의”로 하자는 건의를 한 적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역시 반대하였다. 1949년 봄, 마오쩌둥은 다시 강조하였다. “같은 반열에 두면 우리가 마치 모든 것을 갖춘 것으로 알게 되고, 주인이 나라고 여기게 된다.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은 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는 그들을 손님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선생으로 부른 것이다. 우리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 과학은 그렇게 장난할 수 있는게 아니다. 중국 혁명의 사상, 노선, 정책등이 어느 하나의 주의에 의한 것이라면 세계에는 몇 개의 주의가 있게 된다. 이것은 혁명에 불리하게 된다. 우리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지점이 되는 게 좋다.”

    당시 중공 중앙 부비서장이던 양상쿤의 기억에 따르면 7차 2중전회의때 처음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마오쩌둥과 주더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1949년 3월 5일, 마오쩌둥은 회의장에 들어와 자신의 초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대회 준비 요원들에게 “개회할 때 우리 초상을 걸지 말라.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만 걸어라.”하고 지적하였다. 다음날에는 네 사람의 초상만 걸리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론이 분분하여 대회 준비요원들이 다시 마오와 주더의 초상을 양쪽에 걸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엄중하게 비판을 하였다.

    결국 이런 내용들이 회의 결의로 규정이 되었으며 공산당원의 일상적 행동준칙이 되었다. 1953년 8월, 마오쩌둥은 전국 재정경제 관련 공작회의에서 다시 이 6조 규정을 강조하였다.

    세월은 흐르고 이 규정들은 퇴색하였다. 2013년 중국 공산당 시진핑 총서기는 시바이포에서 ‘6조 규정’ 게시판 앞에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시진핑은 “당의 규정, 제도의 건립과 집행에서 당의 작풍과 기율을 세워야 한다.” 시진핑은 시종 ‘두 개의 우비(務必)’를 강조하였다. 우비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마오쩌둥이 1948년 시바이포의 7차 2중전회에서 강조했던 내용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시진핑은 “우리는 군중들과 혈육의 관계가 되어야 하며 인민들을 이끌고 전진하는 길에 놓인 각종 위험과 도전을 이겨야 한다. 부단히 승리의 길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마오쩌둥, 시바이포를 떠나다

    “1949년 3월 23일, 이날은 시바이포 마을 사람들은 마오쩌둥이 떠난 날짜를 기억하고 있다. 북방이지만 봄이 오고 있어 날씨가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다. 전날에는 봄비가 내렸지만 떠나는 날의 시바이포는 화창하였다. 마오쩌둥이 시바이포를 떠나는 것은 기밀사항이었다. 하지만 시바이포 마을의 당 간부와 당원등은 소식을 알고 있었다. 이들과 많은 마을 사람들이 길가에 늘어서 마오쩌둥 일행을 환송하였다.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때 시바이포 아동단장이던 옌겅샹(閻更祥)은 마오가 떠나던 장면을 이렇게 기억하였다. “사람들이 길가에 서서 주석이 떠나는 것을 기다렸다. 주석은 차 안에서 손을 뻗어 계속 흔들었다.” 차량의 대열이 점점 멀어지자 사람들 가슴에 알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왔다. 가지 말라고 말리고 싶으나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시바이포에서 4리(중국의 1리는 500미터이다.) 쯤 가면 인구가 천명쯤 되는 커다란 마을 하나가 나온다. 그 마을의 주민인 옌얼반(閻二板)은 시장거리에서 마오쩌둥의 차량 일행을 보았다. “길다란 차량의 대열이 지나갔다. 경호원들의 차가 앞에 서고 그 다음이 주석의 차, 뒤에도 경호원들의 차가 따라갔다.” 그때 마오쩌둥은 지프에 우의를 입고 앉아 있었다. 지프에 유리가 없어 앞차에서 이는 먼지가 그대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마오는 우의뿐 아니라 안경과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다. 역시 먼지 때문이었다. 당시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공 지도부의 소탈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필자인 나는 마오쩌둥이 처음 게릴라 투쟁을 시작한 징강산과 장시성의 루이진, 옌안의 양자링과 자오위안에 있는 마오쩌둥의 두 군데 거처를 모두 보았다. 마오의 집은 소박하다 못해 누추하였다. 침상은 나무였으며 홑깃을 씌우지 않은 무명 이불이 퇴색된 채 놓여 있었다. 집기는 몇가지 되지도 않았지만 80년대 한국에 있는 여관의 것만도 못하였다. 그러나 신중국이 건설되고 시간이 흐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959년 마오쩌둥이 묵었던 장시성 루산의 임시 거처를 보니 벌써 가구와 침실이 비교할 수 없게 달라져 있었다. 조건과 환경이 바뀌면 사람의 생활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씁쓸할 기분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을의 샹산

    1949년 3월 25일 마오쩌둥과 당 중앙 인사들이 베이핑에 도착하였다. 열차가 칭화위안(清華園) 역에 도착한 뒤 그들은 자동차로 바꿔탔다. 오후에 시위안 비행장에서 해방군을 사열한 마오쩌둥은 베이핑 교외 샹산(香山)으로 가서 솽칭(雙清)별장에 묵었다.

    샹산은 베이핑에서 20킬로쯤 떨어져 있다. 단풍이 유명하여 베이징 시민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솽칭 별장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있고 맑은 물이 솟는 샘도 있었다. 별장에 두 개의 커다란 방공호가 있었는데 마오가 도착하기 전 동북 해방군 병사들이 굴착한 것이었다. 방공호 입구에는 병사들이 “마오 주석 만세, 저우 총사령 만세”라고 써 놓았다. 마오쩌둥은 그걸 보더니 당장 지우라고 지시하였다. 도착한 날, 마오쩌둥은 자다 말고 경호원을 불렀다. “이 침대는 못쓰겠네. 내일 목판으로 바꿔 주게.” 마오쩌둥은 그때까지 나무 침상을 썼다. 푹신한 서양식 침대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더,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 중앙 지도부 인사들은 솽칭별장 북쪽의 라이칭쉬안(来青軒)에 묵었다. 마오가 묵은 별장하고 인접하여 두 집이 포석으로 이어져 있었다. 솽칭별장은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마오쩌둥은 샹산의 이 별장에 6개월간 머무르며 도강전투를 지휘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신중국 설립을 준비하며 개국할 준비를 한 것이다.

    샹산의 마오쩌둥

    1949년 4월 9일 마오쩌둥은 샹산의 솽칭별장에서 장즈중을 접견했다. 저우언라이도 배석하여 함께 환담했다. 장즈중은 국민정부 장군 출신이지만 공산당 지도인사들과 친밀했다. 1937년 국공합작 당시 장즈중은 합작을 적극 옹호하여 ‘화평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솽칭별장 입구

    솽칭별장 안내도

    마오쩌둥은 샹산에 있는 동안 낮에는 회의를 하거나 일을 하고 저녁에는 자료를 읽거나 책을 보았다. 늘 바빠서 한밤중까지 일을 해야 하였다. 마오쩌둥은 가끔 별장 안에서 산보를 하고 체조하며 긴장을 풀었다. 마오쩌둥은 며칠이나 잠을 자지 않다가 자료를 보는 도중에 졸기 일쑤였다. 하루는 경호원들이 마오를 보고 쉬는 게 어떠냐고 권하였다. 마오는 “그건 안되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도 어차피 내가 해야 해. 전보는 일분만 늦어도 전선의 희생이 늘어나게 된다. 우리가 늦으면 백구(국민정부 통치구역을 일컫는 말)에 있는 백성들에게 죄를 짓는 거야.” 하고 대답하였다.

    마오쩌둥은 솽칭별장에서 장란, 리지선, 선쥔로우 등 인사들을 접견하였다. 마오쩌둥은 장란과 리지선등 민주인사들을 존경하여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마치 은사를 모시는 것과 같았다. 한번은 리지선이 마오쩌둥을 크게 칭송하자 마오는 “노선생, 우리는 모두 친구입니다. 서로 잘 아는 처지에 너무 칭찬하지 마세요. 그러면 서로 어색합니다.”하고 말린 일이 있었다.

    샹산에 온 뒤에도 마오쩌둥의 생활은 간소하고 소박하였다. 그는 구두에 구멍이 있어도 새 신발을 신지 않았다. 옷도 좀처럼 새 옷을 입지 않아 비서들이 조르는 형편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예로부터 귀족의 자제들이 성공한 사례가 적었다. 가난에 익숙한 사람들이 대업을 이뤘다. 채소와 나물로 족해야 무언가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 그래도 비서들이 옷을 빌리기라도 하자고 졸랐다. 마오는 “필요없다. 여벌 옷이 급한가? 잘 다리고 깨끗이 하면 충분하지.”

    1949년 6월 19일, 마오쩌둥은 솽칭별장에서 쑹칭링에게 편지를 썼다. “전국 혁명의 승리가 눈앞에 있습니다. 대업을 건설해야 하니 뵙고 상의할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마오쩌둥은 편지에 쑹칭링이 북상하여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편지를 덩잉차오(저우언라의 부인으로 중앙위원 등 역임)가 가지고 상하이로 가서 쑹칭링에게 전하였다. 중공 중앙이 덩잉차오에게 당중앙을 대표하여 쑹칭링을 만나게 한 것이었다.

    덩잉차오는 쑹칭링에게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해 달라고 정식 요청하였다. 1925년 손중산이 베이핑에서 별세하자 쑹칭링은 다시는 베이핑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베이핑 군벌들에게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 쑹칭링은 마오쩌둥의 편지를 본 뒤 크게 감동하였다. 쑹은 흔쾌히 베이핑행에 동의하여 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였다. 8월 28일 마오쩌둥, 주더,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지도인사들이 기차역으로 쑹칭링을 영접하러 갔다. 그날 저녁 마오쩌둥은 연회를 베풀고 쑹을 열렬하게 환영하였다.

    쑹칭링의 입당 발표하는 인민일보. 말련의 쑹칭령. 쑨원 부인으로 인민의 존경을 받았다.

    1949년 9월 7일, 마오쩌둥은 직접 기차역에 나가 청첸(程潜)을 환영하였다. 청첸은 1948년 부총통 경선에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마오쩌둥은 예전에 국민혁명군 사단장이던 청첸의 부하로 있던 적이 있었다. 기차가 도착한 뒤 청첸이 차문에 얼굴이 비치자 마오쩌둥이 큰 걸음으로 다가갔다. 마오는 두 손을 내밀어 청첸을 부축하여 내리는 것을 도왔다.

    1949년 6월 15일부터 마오쩌둥은 베이핑 시내에서 일을 하였다. 중난하이에 있는 쥐샹서옥(國香書屋)이 그의 임시 거처였다. 마오쩌둥은 정치협상회의 준비작업 등 여러 문제에 대하여 일일이 보고를 받거나 승인하였다. 마오쩌둥도 리지선, 선쥔로우, 황옌페이 등 당밖 인사들과 면담하며 그들의 의견을 구하였다. 마오쩌둥은 이곳에서 ‘인민민주독재를 논한다.’ 등의 저작물을 쓰고 정치협상회의를 열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이 샹산과 중난하이 두 곳에서 일을 본 것은 3개월 남짓이었다. 1949년 9월 2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직전까지 두 곳을 오가며 개국을 준비하였다.

    <국공내전>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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