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DP에 가려진 뒷이야기들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역사를 남긴다는 의미
        2020년 04월 02일 10: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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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선 글(1)에서는 DDP 건축물 아래에 묻힌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현재 DDP는 일부 물리적 형태로 남아있는 것들을 보존과 복원을 통해 DDP와 동일 공간에서 만들어진 역사를 남겨두고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DDP 건설을 계획한 근본적인 이유였던 동대문 주변 패션산업의 역사성은 DDP에서 어떻게 담고 있을까? DDP를 얻기 위해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 혹은 잊혀진 역사는 없을까? DDP를 보면서 떠올려야 할 옛 이야기들은 무엇이 있을까?

    동대문시장의 역사

    DDP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동대문시장 상권은 정확히 밝혀진 바 없이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조선시대 이현시장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현시장은 18세기 중엽에 현재의 혜화경찰서 부근에 형성된 시장으로, 당시 종로 육의전,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함께 한양 3대 시장으로 존재했다.

    육의전의 경우, 한양이 도읍으로 생겨난 때부터 상류층을 대상으로 형성된 시장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낮 시간에 사치품을 판매하는 반면, 칠패시장과 배오개시장은 농수산물을 거래하며 주로 새벽에 장사를 이루었다. 이곳은 동대문을 통해 종로로 들어오는 상인들뿐 아니라, 당시 북쪽 방향의 대문 역할을 하던 혜화문을 통해 들어오는 상인들까지 모여드는 장소로 시장 형성에 적합한 지리적 위치였다.(2)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시전상인들이 독점할 수 있었던 금난전권(禁亂廛權)이 폐지되면서 다양한 상인들이 종로와 동대문 지역 등지에서 상권을 형성해갈 수 있었다. 특히, 동대문 주변에 있었던 훈련원과 하도감은 동대문 일대 시장이 포목 거래로 부상하는데 일조했다. 이곳 소속인 군관들과 하급 병사들은 종종 옷감으로 급여를 대신 지급받기도 했는데, 인근에 거주하면서 옷감 거래를 촉진시켰다고 한다.(3) 종로 주변의 포목상들은 일본과 영국으로부터 면직물을 수입해 교역을 이루었고, 전국 각지를 상대로 한 포목 도매업이 성행했다. 1899년에는 서대문에서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로 운행하는 전차 노선까지 개통되면서 종로와 동대문을 연결해 상권을 더욱 키워나갈 수 있었다.

    점차 조선 내에서 일제의 영향이 커지자 일본인들은 현재의 을지로/충무로 일대에 터를 잡고 인근 남대문 칠패시장으로 그들의 자본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현시장은 전차 노선변에 있어 말끔해야 한다며 도로 정비를 이유로 들며 철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1905년 이현시장의 거상 박승직을 포함한 종로와 동대문 일대의 상인들은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현재의 광장시장 위치인 종로 4-5가 청계천변에 새롭게 자리잡아 ‘광장회사 시장’을 건설했다. 이 시기에 설립된 광장회사 시장을 동대문시장의 출발점으로 보는데, 이것이 모두 같은 시장의 의미로 광장시장, 동대문시장, 이현시장으로 불려졌기 때문이다.(4) 이후 1920-30년대 광장시장은 종로 일대의 발전과 더불어 근대적인 상가 모습을 갖춰나갔고 동대문 포목상들이 도소매를 겸하면서 일본 면직물 수출거점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해방 후 일본인 자본에 의해 발전했기 때문에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었던 남대문시장과 달리, 조선인들의 순수 자본으로 발전해온 광장시장은 더욱 호황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광장시장 주변으로 무허가 시장들이 들어서면서 점차 동대문 쪽으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이렇게 청계천 변을 따라 이어진 허가받은 시장과 무허가 시장을 통틀어 동대문시장이라 부르게 되었고, 광장시장이 동대문시장으로서의 의미가 퇴색되면서 광장주식회사는 동대문시장 이름을 내주고 광장시장을 대표이름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5) 또한 전쟁으로 구호의류가 시장에 들어오게 되면서 포목, 옷감 등 취급하는 의류도매시장으로 바뀌게 된다. 1961년에는 복개한 청계천 자리에 평화시장이 들어서고, 1969년 통일시장과 동화시장, 성동상가가 생겼다. 1968년 전차의 운행이 중단됨에 따라 기존에 전차 노선이 있었던 자리에 1970년 현대식 건물인 동대문 종합시장이 들어섰다. 이로 인해 동대문 일대 상권을 장악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의류와 직물이라는 특정 품목이 동대문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다.(6)

    1970년대, 동대문시장은 원단을 판매하는 역할에서 기성복 시장으로 변화해갔다. 정부 차원에서의 섬유산업 촉진으로 섬유를 자급자족하는 능력이 생겨나 저가의 섬유공급이 활발해지면서 시장에서 만드는 생산품목의 폭도 넓어지게 되었다. 1980년대가 되어서 동평화·제일평화·흥인·남평화·광희시장 등 여러 상가들이 생겨나 최대 규모의 의류도매시장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때부터 의류 수출기지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1990년 신설 도매상가인 아트프라자가 생기면서 의류도매업계 최강자로 꼽히던 남대문시장을 뛰어넘었다.(7)

    1998년 ‘밀리오레’, 1999년 ‘두타’의 오픈은 동대문시장의 규모와 시설 측면에서 크고 현대화된 모습을 촉진시켰다. 1997년 IMF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더욱 호황기를 이루었던 동대문시장은 디자인-생산-판매가 이루어지는 패션산업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시장’의 이미지를 탈피한 패션산업의 중심으로 떠올랐다.(8) 2000년대에도 대형 쇼핑몰이 대거 들어서고 온라인 쇼핑시장이 생겨나면서 동대문 시장의 도매 상권이 성황을 이루었다.

    동대문운동장의 또 다른 이름, 풍물시장

    2000년대에 들어서서 주목해야 할 상권이 또 있다. 바로 풍물시장이다.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을 결정한 서울시는 복개천변에서 생업을 이어나가던 노점 상인들을 동대문운동장으로 옮겨가도록 하여 풍물시장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내 운동장 용도 변경 논의가 시작되면서 서울시의 철거하겠다는 의견과 상인들의 유지하라는 의견 충돌로 갈등이 깊어졌다.

    [그림 ] 동대문 풍물시장 개장 준비 (「동대문 풍물시장 개장」, 뉴시스, 2004.01.16.)

    동대문 풍물시장 상인들과의 갈등을 보기에 앞서 청계천 복원사업을 잠깐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풍물시장 상인들은 대부분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쫓겨난 노점 상인들이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시는 세계적인 풍물시장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이들을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주시켰다. 동대문으로 넘어온 일부 상인들 약 900여 명은 2004년 1월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트랙에 좌판을 깔고 장사를 시작했다. 역사성을 지닌 운동장을 꾸준히 이용해가면서 이곳에 시장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를 덧입힌, 요즘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문화유산 활용 방식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생각은 달랐다. 임시거처였을 뿐,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새로운 공원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풍물시장 개장 후 2개월 가량은 ‘제2의 황학동 도깨비시장’을 꿈꿀 수 있었지만, 점차 손님들은 줄어들었고 상인들의 생활고도 더욱 심해졌다.

    2006년 민선 4기 서울시장으로 오세훈 후보가 당선되고 그가 내걸었던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방안은 취임하기 전부터 반발을 샀다. 그러나 사업은 결정되었고, 2007년 12월, 동대문야구장이 먼저 철거되었다. 2008년 2월 말까지 축구장도 철거를 완료하기로 하였으나, 풍물시장 상인들이 자리한 축구장 부지는 상인들과의 첨예한 갈등으로 철거가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이주해올 때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동대문 풍물시장을 관광명소로 만들어주겠다 약속했지만 또 다른 곳으로 이전해가라는 것은 약속을 불이행하는 것이며, 생존권을 빼앗는 것이라 말한다. 오세훈 전 시장이 취임하고부터 전국노점상총연합과 함께 상인들은 끊임없이 시위하며 축구장 철거 때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2008년 4월 신설동 풍물시장으로 890여 점포 상인들이 이주해가기로 했고 5월 축구장 철거가 시작됐다.

    역사를 남기는 것에 미숙했던 우리

    운동장이 철거되고 DDP를 건설하는 와중에도 갈등은 존재했다. 2007년 DDP 설계공모를 받은 후 심사를 거쳐 이라크 출신의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 설계안이 최종 선정되었다. 사실 DDP 디자인 설계 공모에서부터 문제는 시작되었다.

    심사위원으로 외국인 4명과 한국인 3명이 구성되었는데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심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과연 한국의 역사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당시 공모한 한국인 건축가들은 DDP 건축이 서울성곽과 근대문화의 산물인 운동장 부지에 새로 만드는 것이기에 그 역사성을 표현한 설계를 우선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설계디자인에 담긴 역사적 요소들을 영어로 설명하는 것은 필수였다. 한 편, 자하 하디드의 디자인은 운동장과 어울리는 공원을 그려냈다. (그림 2, 3, 4, 5 참조) 더욱이 심사위원들의 질문 대부분이 그 부지의 의미와는 무관한 것들이었기에, 국내 건축가들은 심사를 받을 때부터 이미 탈락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9)

    몇몇 문제점이 있었음에도 자하 하디드의 설계안을 토대로 사업은 진행되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공사비보다 두 배 가량을 더 소진하게 된 문제가 발생했다. 구체적인 디자인을 생성해낼 때마다 더 많은 공사비를 요구하는 자하 하디드의 설계, 그리고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양의 조선시대 유물과 유적 및 건축물이 그 이유였다. 건축가가 처음 설계했던 디자인대로 건축을 건설할 경우 약 2300억 원이 투입되는 공사였다. 그러나 현상설계 경기 이후 건축물에 대한 구체적인 디자인을 구상하면서 필요한 공사비는 3400억 원을 넘겼다. 건축주가 가진 예산보다 초과되는 비용의 건축 설계를 건축가가 제시하면 본 계약을 성립하기에 앞서 이를 취소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서울시의 입장에서는 이미 최고의 건물을 짓고자 계획한 것이니 그만큼 투자해도 괜찮다는 이유에서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였다.

    공사 도중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양의 조선시대 유물이 발견되고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이간수문 그리고 조선시대 건물의 터가 드러나면서, 디자인 설계는 또 변경되어 최종적으로 5000억 원이 투입되는 공사가 되었다. 그러나 변경된 설계는 발굴된 유물과 유적들의 역사성을 제대로 담지 못하는 오류가 있었다. 하도감터와 일반 집터, 가마터 등이 성곽 밖에서 발굴되었는데 변경된 설계에서는 이것들을 성곽 안쪽으로 유구 전시장을 두어 이전하는 것으로 했다. 이를 두고 문화연대와의 갈등이 발생했다. 유구는 옛 건축물이 남아있던 구조나 흔적을 말하는데, 이것은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장소적 의미를 가진다.(10) 더욱이 한양도성을 기준으로 성 안과 밖은 그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뿐만 아니라 성곽 복원도 원래대로 한다면 이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지대가 낮아 성벽이 더욱 높게 치솟아야 했다. 그러나 복원된 성곽을 보면 DDP 건물과의 조화를 위해 성벽을 낮추어 복원하였다. 다리 한 뼘의 얕은 턱으로 이루어진 성벽이 과연 서울성곽의 복원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서울시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임기 안에 완공할 목적이었으므로 설계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설계안대로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역사문화자원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고민 없이 사업을 끝마치기 급급했던 개발 주체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경제개발이 우선이라 문화재 보존은 개의치 않았던 지난 과거와 비교하면, 어떻게든 발견된 역사의 흔적을 무시하지 않고 보존하고자 한 것은 분명 역사문화자원에 대한 진일보한 태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문제들이 남아있었다.

    기억해야 할 비물리적 역사문화자원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역사문화자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동대문운동장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DDP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개발과 보존이라는 이슈와 더불어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문화유산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인정해야한다는 인식, 그리고 어떻게 보존/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학습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대, 역사도시 서울을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묻고 싶다. 패션산업과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계획으로 만들어진 DDP는 어떤 면에서 동대문시장의 역사성을 담고 있는가? 물리적 공간에 대한 역사 뿐 아니라, 공간의 장소성에 대한 역사 말이다. 역사도시 서울이기에 하나의 건축물을 보면서도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가 생각할 이야기가 이렇게나 많다.

    <주석>

    1. www.redian.org/archive/136378

    2. 유슬기·김경민,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 동부 지역의 상업도시화 과정」, 『서울학연구』 67권, 서울학연구소, 2017, p.257

    3. 조옥연, 「사라지는 도성의 역사 위에 선, 동대문 일대의 장소성Ⅱ」, 『건설감리』, 서울 : 한국건설감리협회, 2013.09·10, p.87

    4. 김양희·신용남, 『재래시장에서 패션 네트워크로』, 서울 : 삼성경제연구소, 2000, p.21

    5. 조옥연, 위의 글, p.88

    6. 조옥연, 위의 글, p.89

    7. 김양희·신용남, 위의 책, p.123

    8. 한구영, 『클러스터의 진화 : 동대문시장 패션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pp.43-44

    9. 「‘디자인 서울’의 그늘」, 『기자가 만나는 세상 현장 21』 80회, SBS, 2012.11.13.

    10. 「집터·가마터 등 옮겨 보존 ‘역사훼손’ 논란」, 한겨레, 2009.06.18

    필자소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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