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현재와 과거, 그 아래에 묻힌 이야기들
    [동아시아 근현대 도시] 이젠 사라진 동대문운동장
        2019년 09월 05일 11: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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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여의도, 도시개발의 시범이자 반면교사

    어릴 적, 엄마와 함께 동대문 밀리오레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다. 테이블 옆 창문 밖으로 동대문운동장이 내려다보였다. 그곳에서는 한창 고교 야구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동대문’ 하면 ‘옷을 사는 곳’ 이라고만 생각했던 초등학생은 그때 처음 동대문운동장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약 15년 뒤인 2008년, 동대문운동장은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그곳엔 커다란 은색 구조물이 들어서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ongdaemun Design Plaza), DDP이다.

    현재의 DDP(위)와 과거의 동대문운동장 모습

    DDP는 어떻게 생겨났나?

    1995년, 동대문운동장 용도변경 논의가 처음 제기되었다. 1990년 아트프라자가 들어선 이후 동대문 상권에 초대형 패션몰이 대거 들어서면서 동대문 지역은 현대식 의류도매상가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이후 1세대 한류열풍과 더불어 외국인 관광객의 수가 증가하면서 동대문 시장을 찾는 방문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동대문 시장 상인들과 전문가들 등으로 구성된 ‘동대문포럼’에서는 동대문 지역에 방문객을 위한 쾌적한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며 동대문운동장을 공원으로 만들자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2000년대 들어서서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논의가 진행되었다.

    2002년 동대문운동장 부지 활용 방안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2005년 동대문운동장 기본계획 수립 후 2006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의 결재를 얻어 공원화 사업은 현실화되었다. 2007년 서울시에서 발간한 『도심재창조종합계획』에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의 기본구상이 제시됨으로써 사업은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이후 2008년에는 2006년에 이루어진 지표조사를 토대로 동대문운동장을 철거, DDP 조성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동대문운동장에 DDP를 건설하게 된 이유는 5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 ‘2020 서울 도시기본계획’에 의해서이다. 2004년 서울시는 서울에 나타난 도시 문제를 치유하고, 서울의 역사 및 자연 환경을 회복할 것이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서울시 발전의 큰 틀을 제시하였다. 이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는 서울의 공간적 미래상을 정립하고 도시 발전의 기본방향 및 의사결정 지침 수립이었다.

    두 번째 이유로는 ‘도심재창조 4대 중심축’을 들 수 있다. 역시 2004년, 강남에 비해 낙후된 강북 지역 상권을 살리기 위해 서울시가 ‘도심부 발전 계획안’을 제시하였는데 도심재창조 4대 중심축이 그것이다. 경복궁에서 숭례문과 서울역을 잇는 역사문화의 1축, 북촌 인사동에서부터 을지로, 명동까지 관광문화의 2축, 창경궁에서 세운상가, 남산에 이르는 녹지문화의 3축, 대학로에서 동대문과 장충동 일대를 복합문화의 4축으로 나누어 각각의 개성에 맞게 기능을 부활시켜 상권과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내용이다. 2007년 서울시는 『도심재창조종합계획』에서 복합문화의 4축에 해당하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에 대한 기본구상을 제시하였다. 서울의 디자인사업 역량 강화를 선도할 핵심 인프라로 육성, 세계적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역할 할 수 있는 수준의 문화랜드마크 조성, 서울의 주요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가능한 세계 최고 수준의 심미적 건축물 지향이 그것이다. 이와 더불어 해당 지역에 공원 조성, 디자인플라자 건립, 지하공원 활성화를 위한 액션플랜을 담았다.

    세 번째, 역사문화 복원을 실현한다는 이유를 갖는다. 동대문운동장은 1926년 일제시기에 건설된 경성운동장에서 출발했다. 운동장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여러 가옥들과 서울 성곽의 일부, 화약을 만드는 관청인 염초청과 훈련원의 분영인 하도감이 있던 곳이다. 일제는 이곳을 무계획적으로 헐고 운동장을 세웠다. 시간이 흐른 뒤, 1975년부터 서울시는 헐린 서울성곽을 복원하는 성곽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영향으로 일제강점기 운동장이 들어서며 헐린 서울성곽을 복원해 공원으로 조성하고자 했다.

    네 번째, 수도 서울의 경쟁력이 곧 한국의 경쟁력이라 보는 도시 마케팅 전략에 따른 배경이다. 도시 마케팅은 특정 지역을 경제·관광 중심지로 만드는 것으로 1995년 지방자치제 출범 이후 이 전략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화로 인해 국경의 의미가 약화되어 국가 보다는 도시의 경쟁력이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현 시대에 필요한 전략이다.

    다섯째, 산업 클러스터 관점으로 보면 동대문 지역은 굉장한 가능성을 지닌 공간이다. DDP가 들어선 주변 상권은 동대문 의류시장이라는 거대한 패션 산업의 메카로 이와 연관된 산업과 기업 및 기관들이 한 곳에 모임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위와 같은 이유와 시대적 배경에 따라 여러 해에 걸쳐 DDP 사업이 논의되어왔다. 민선 3기(2002-2006) 이명박 전(前) 서울시장이 동대문운동장 활용방안에 대해 논의해왔다면 민선 4기(2006-2010) 서울시장이었던 오세훈 전(前) 시장은 서울시 발전전략으로써 DDP를 건설하기로 계획하고 구체적인 방향성 제시와 함께 공사를 시작했다. 그의 구상은 DDP를 통해 강북 상권을 살리고, 도심 창의산업으로써 패션업계의 산업경쟁력을 강화하며, 디자인 산업 육성을 이루는 것이었다. 또한 DDP는 그가 슬로건으로 삼은 ‘디자인 서울’의 상징물과 같았다.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새로운 건축물과 공원을 조성하기에 앞서 문화재 조사가 이루어졌다. 문화재 조사는 그곳에 대한 문헌자료를 수집한 후 현장 예비조사와 함께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한 후 발굴 작업에 들어가는 순서로 진행된다. 2006년 진행된 문화재 조사작업을 통해 <그림 3>과 같이 하도감터와 이간수문, 성곽, 치성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를 토대로 2007년 12월, 가장 먼저 야구장 구조물을 철거하여 시굴조사를 진행했다. 이후 2008년 5월에는 축구장 부지에 대한 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진행된 시굴조사에서는 생각지 못한 수많은 조선시대 유물과 운동장 건설로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라 예상되었던 이간수문 및 치성 등 유적들이 대거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추가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고, 그만큼 사업추진은 지연되었다.

    이 과정에서 본래 주변 상권의 특성을 나타내는 ‘종합 디자인 산업 지원 시설’에 ‘다목적 시민공원’을 유치하고자 했던 목표를 ‘역사문화공원’으로 변경하였다. 그 결과, 야외에 서울성곽과 이간수문을 복원하고, 조선시대 유구 전시장과 동대문운동장 스탠드를 두며, 동대문역사관과 동대문운동장 기념관, 이벤트홀·갤러리로 구성된 전시시설을 두었다. 그리고 2014년, DDP는 개관했다.

    그림1. 동대문 지역 유적 분포도 (출처 : 서울특별시 도시기반시설본부[편], 『Dongdaemun Design Plaza & Park. 1, 사업편』, 서울 : 서울특별시, 2013, p.95)

    DDP 아래에 묻힌 역사

    ① 1925년 이전까지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기 전, 문헌 상 조사된 조선시대 유적은 하도감, 염초청, 이간수문, 치성, 체성벽, 훈련원 공원이었다. [그림 1]에서 보듯 동대문축구장 부지를 가로지르는 서울 성곽이 있었고, 동대문야구장 부지에는 하도감이 있었다.

    먼저 서울성곽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한양을 에워싸고 있던 도성으로 현재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성곽 축성과 관련한 기록은 태조, 세종, 숙종, 그리고 영조와 고종 대(代) 찾아볼 수 있다. 태조 代 도성을 1차적으로 축조하고, 세종 代 서울성곽의 수축공사를 거쳤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높아진 국방의식으로 숙종 代 도성 수축과 산성을 축성하였다. 영조와 고종 代에도 도성 수비 문제로 일부 무너진 구간을 수축하며 수비를 확고히 했다. 그만큼 서울성곽은 오랜 기간 동안 쌓아 올리고 보수하기를 반복하며 구축한 성곽이었다. 그러나 도성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파괴되어 현재 그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다.

    이간수문은 지형적으로 동대문과 광희문 사이가 서울도성 내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기 때문에 1396년(태조 5년) 처음 서울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건설되었다.(1) 수문은 성곽을 축조하게 되면 치수(治水)가 요구되기 때문에 필요한 수구시설이었다.(2) 이것은 서울성곽 중 단 하나의 수문이었다.

    치성 또한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의 낮은 지형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 중 하나로, 수비를 위해 성곽에 더 높이 치성을 쌓아야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제조 박문수가 말하기를, “어제 어영 대장이 치성(雉城)의 일에 대해 우러러 말씀드렸는데, 신 역시 생각해 본 바가 있습니다.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광희문(光熙門)까지는 지세가 낮아서 갑자기 도적이 밀어닥칠 경우 필시 수비하지 못할 것이니, 치성을 더 높이 쌓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어영 대장에게 그 일을 위임하여 더 쌓은 다음 나무를 많이 심도록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영 대장과 영상이 상의하지 않고도 의견이 같으니, 내 단연코 그 일을 하겠다.” 하였다.(3)

    하도감은 1593년(선조 26년) 수도를 방위하고 왕의 시위와 지방군의 훈련 및 치안을 담당하는 기관인 훈련도감의 분영으로 조총고, 궁전고, 화약고 등 창고와 무기 및 화약을 제조하는 곳이었다. 1881년(고종 18년) 별기군 창설로 인해 구식군대가 해산된 후, 1882년 일본군에 의해 별기군 훈련장소로 쓰여졌고,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가 주둔해있던 장소이기도 했다.

    1907년 ‘최신경성전도’에서는 하도감이 표기되어 있으나, 1911년 제작된 ‘용산합병경성시가전도’를 보면 하도감 표기가 사라졌다. 일제는 하도감을 폐지하고 이곳에 훈련원공원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1920년에 제작된 ‘경성부공원계획지도’를 보면 이미 공원으로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부터 그림1 최신경성전도(1907) 일부 (동그라미는 필자 표기), 그림3 용산합병경성시가전도(1911) 일부 (동그라미는 필자 표기), 그림4 경성부공원계획지도(1920) 일부

    ② 경성운동장(1925-1945)

    1925년 일제는 히로히토(裕仁) 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경성운동장을 설립했다. 육상경기장과 야구장, 정구장, 수영장, 마장, 녹지를 갖춘 이 운동장은 수용인원 25,800여명, 규모 75,000㎡로 동경에 있는 고시엔(甲子園)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 큰 종합경기장이 되었다.(4) 일제는 구릉지로 된 지형 덕분에 관람석을 자연스럽게 놓을 수 있고, 이러한 대규모의 건축물을 세우기 알맞다는 판단 하에 하도감 터에 체육시설을 건설함으로써 우민화정책을 시행하였다.(5) 조선인을 스포츠에 관심 갖게 하여 항일의 기운을 꺾고자 한 것이다.

    경성 내에는 시설을 갖춘 운동장이 부재하였다. 경성운동장 설립 후 조선인들은 스포츠 경기에 대한 갈증을 해결할 수 있었고 조선인들의 각종 체육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주로 일제에 의해 일본과 공동으로 참여하는 체육행사였으나, 점차 1920년 출범한 조선체육회를 중심으로 한 전조선 야구대회, ‘연보전’(연희전문·보성전문), 그리고 1929년 조선일보 주최로 시작된 경평축구가 조선의 규모 있는 체육행사로 발전해나갔다.

    조선인들은 일찍이 종합운동장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현대운동경기는 금전을 요합니다. 돈이 없으면 기구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고로 될 수만 있으면 각종 운동을 물론하고 한 가지를 주장삼아 한 단체를 조직하면 상당한 기금을 두고 각 단원에게 큰 곤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만히 보면 운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지불능력에 무관심한 것같이 보입니다. 우리는 운동장을 경성 안에 가져야하겠습니다. 이것은 각 단체가 일치협동해서 노력해야 될 줄 압니다. 조선민족아, 국제적으로 교통이 극히 빈번한 오늘날 이 민족적치욕의 기록의 하나를 어서 하루바삐 말살합시다. 이번 미군의 내방으로 더욱 통절히 느꼈습니다. 금년에야말로 하나 꼭 실현합시다.(6)

    그러나 결국 조선인이 아닌 일제에 의해 운동장 건설이 완전히 이루어졌고, 조선인은 필요했던 운동장을 갖게 된 것으로 운동계 양성에 힘썼다.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건설한 운동장이 민족정신의 분출구로 진전되어가는 모습을 보자, 일제는 1932년 학생 야구를 제한했다. 조선인들이 가진 경성운동장에 대한 의미는 스포츠를 통해 민족의 우월성을 나타내 일본인을 제압하고자 하는 항일민족투쟁이었다.(7)

    ③ 서울운동장(1945-1983)

    1945년 해방 이후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1984년 잠실종합경기장이 건설되기 전까지 서울운동장은 체육행사는 물론,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 국가 차원의 기념식과 정치적 대중동원 행사를 치르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서울운동장은 항일과 친일이 지나간 자리에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이 들어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집회장 기능을 하기도 했다.(8) 여운형과 김구 등 민족지도자들의 장례식도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고, 3·1운동 기념행사도 이곳에서 진행하였다.(9)

    1945년 조선체육회의 주도로 개최된 전국종합경기대회는 이전까지 일제에 의해 제한되었던 체육대회의 맥을 서울운동장에서 다시 이어나갔다. 조선체육회는 대한체육회로 명칭을 변경한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대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전국체육대회’로 발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전국체육대회는 무산되었지만 1953년 휴전 후 다시 개최되었다. 당시 스포츠 경기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심적 피해를 달래주는 역할이었다.(10) 이후 박정희 정권 때에는 국가 주도의 스포츠 중흥정책으로 서울운동장에서 중요한 체육행사와 기념행사가 열렸고, 체육시설의 국제화를 위해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진행되어 2007년 철거된 야구장의 모습을 이때 갖추어놓았다.

    서울운동장 당시 대표적인 경기는 박스컵 축구 대회였다. 축구에 대한 지금의 열광적인 응원의 기원을 찾아본다면 이 때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1) 서울운동장은 축구 종목의 메카로써 자리매김 하였다. 고교야구 또한 인기 있는 경기로, 고교야구의 중심지로도 서울운동장의 역할은 상당했다.(12)

    ④ 동대문운동장(1984-2008)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1984년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었다. 이후 서울운동장의 기능이 잠실 경기장으로 이동해감에 따라, 서울운동장은 한국 스포츠시설의 대표성과 종합운동장으로써의 지위를 넘겨주며, 동대문운동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13) 동대문운동장은 부흥의 길로 접어들지 못하고 학생스포츠경기만 열리는 경기장으로 전락하며 쇠퇴하게 되었다. 2003년 동대문운동장 축구장에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밀려난 청계천 노점상인들이 들어와 풍물시장을 형성했고, 일부 부지는 주차장으로 활용됨으로써 운동장의 기능은 완전히 소멸되기 시작했다.

    노후한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의 시설, 고교야구에 대한 관심의 저하로 꾸준히 전국대회와 아무추어 및 고교야구가 개최되었지만 2007년 서울시고교야구 가을철 리그 결승전을 끝으로 더 이상 야구경기는 열리지 않았다. 2005년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기능 변경 계획이 수립된 후에도 야구장 이용을 지속하려 했으나, 선수들에게 무리가 갈 정도로 그리고 이용객에게 불편함을 줄 정도로 경기장의 시설은 열악하였다.

    최근 LG와 두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의 고별경기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잠재된 부상 위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17일 잠실 LG-삼성전에 앞서 LG 덕아웃을 찾은 이종도 KBS N 해설위원은 역사적인 동대문구장이 사라지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동대문 고별경기를 추진할 문제는 아니다고 보다 현실적인 접근을 강조했다. 2006년까지 7년간 고려대 감독으로 동대문구장을 애용했던 이 위원은 인조 잔디가 거의 콘크리트 수준이라 잘못 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덕아웃 사정은 더 심각해 선수들이 모두 경기 내내 서 있어야 할 정도다. 화장실 등 시설도 열악해 관중들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LG와 두산이 고별경기 상대팀으로 지목한 삼성도 마찬가지. 삼성 선동열 감독은 물론 취지는 좋다. 하지만 선수들이 다칠 수도 있고, 몸을 사리느라 제대로 된 경기를 보여주기도 힘들다고 반론을 제기했다.”(14)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경기장 시설은 더 이상 사용이 힘들었다. 새로 지어진 경기장을 두고 굳이 이곳에서 경기를 개최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동대문운동장은 운동장으로써의 기능을 잃고 이름만 남겨두고 있었다.

    2007년 야구장 철거, 2008년 축구장 철거로 경성운동장에서 시작해 서울운동장을 거쳐 온 동대문운동장의 역사는 끝이 났다.

    왼쪽부터 그림5 위에서 본 DDP, 그림6 DDP 공간 내 존재하는 조선시대 유적, 그림7 DDP 아래 쌓여진 시간층

    DDP 완공 이후 이를 둘러싼 상반된 평가로 의견이 분분했다. 동대문의 새로운 미래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랜드마크가 들어섰다는 의견, 그리고 이전의 역사를 무시한 결과물이라는 의견이 주요 핵심이다.

    서울은 오랜 역사를 이어왔기 때문에 도심부 모든 공간에 여러 시대층이 존재한다. DDP 사례처럼 도심부 내에서 철거 혹은 복원사업이 있을 때마다 논쟁이 붙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위해 지금의 것들을 철거하는 것이 옳을지, 또는 복원사업을 한다면 어느 시기에 중점을 둘 것인지 등등 사업에 대한 찬반의견이 갈린다. DDP 역시 이러한 논쟁을 피해가지 못했다.

    현재 DDP는 역사자원 복원과 전시, 그리고 기념관을 통해 공간에 대한 역사를 품으며 패션&디자인 주제로 동대문 지역의 21세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각주>

    1. 서울특별시 도시기반시설본부[편], 『Dongdaemun Design Plaza & Park. 1, 사업편』, 서울 : 서울특별시, 2013, p.89
    2. 서울특별시 도시기반시설본부[편](2013), p.91
    3. 조선왕조실록 영조 28년(1752년) 11월 29일 기사, 한국고전번역원
    4. 김명권, 「근현대 한국체육의 산실 京城·서울·동대문운동장 사라지다(1925~2008)」, 『한국스포츠인류학회 학술대회』 8권, 한국스포츠인류학회, 2009, p.56
    5. 조옥연, 「사라지는 도성의 역사 위에 선, 동대문 일대의 장소성Ⅰ」, 『건설감리』, 서울 : 한국건설감리협회, 2013.07·08, p.96 (http://www.gamri.or.kr/storehouse/bulletin_sch_li.asp)
    6. 「운동계의 회고와 희망」, 동아일보, 1923.01.01.
    7. 조옥연(2013), p.59
    8. 김명권(2009), p.60
    9. 「고 여운형씨의 영결식 8월 3일 아침·서울운동장에서」, 경향신문, 1947.07.24“고 백린 김구 선생 국민장은 7월 5일 오후 1시 경교장에서 발인하여 서울운동장에서 영결식을 하기로 되었다.”(「김구 옹 국민장 오는 5일에 집행. 효창공원에 안장키로」, 경향신문, 1949.6.29 기사)“35회 삼일절, 서울운동장서 기념식”(「35회 삼일절」, 동아일보, 1954.02.18 기사)
    10. 김명권(2009), p.61
    11. 김명권·박기동, 「한국 근현대 스포츠의 산실, 동대문운동장」, 『스포츠인류학연구』 5권, 한국스포츠인류학회, 2010, p.57
    12. 김명권·박기동(2010), p.58
    13. 김명권·박기동(2010), p.59
    14. 「동대문구장 고별 경기 현실적 접근 필요」, 한국일보, 2007.08.17
    필자소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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