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득 직불금 대폭 인상과 협동조합적 토지 소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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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8월 30일 01: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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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농촌이 삶의 기반이라는 사실…농업시장 개방의 실천적 대안, 농촌 관광, 농산물 시장 개방이 확대된다고 걱정이지만 신론리 마을 주민들에겐 남의 일…자연 속 휴식 봉사의 기쁨, 웰빙 피서…우리 농촌의 경쟁력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하지만, 민들레 쌀처럼 확실한 농산품을 갖고 있다면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관 주도의 새마을운동과는 다른 순수 민간 주도 운동”

    “아름다운 농촌 공동체…농산물만 갖고는 안 된다는 신념, 변화만이 살 길, 흙집은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향수를 자아내 도시민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구조적인 문제라고 판단해 농민운동, 그러다 90년대 후반 들어 그는 유기농 생산공동체 운동으로 종목을 바꾼다…오리농법으로 재배한 쌀 한 가마니를 100만원에 팔기도…관 주도가 아닌 마을 사람 자신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

    위 두 글의 문제의식과 대안은 감성적 호소, 도시민에의 의존, 농촌 관광, 유기농 경쟁력이라는 식으로 대동소이하다. 앞에 것은 전경련과 문화일보의 ‘농업개방 1사1촌이 희망이다’이고, 뒤에 것은 희망제작소와 중앙일보의 ‘박원순 변호사의 내 고장 희망찾기’이다.

       
    ▲ 문화일보와 전경련이 벌이는 ‘1사1촌이 희망이다’
     

    두 글의 진짜 공통점은 산업으로서의 농업보다는 자연으로서의 농촌을 더 자주 거론하고, 전근대 농촌공동체의 두레 정신이자 새마을운동의 구호였던 자조(自助)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농업은 산업이고, 한국 농업 뿐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농업이 안고 있는 난점은 자구 노력의 부족보다는 구조와 제도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유기농은 한국 농업의 장기 비전이다. 1인당 채소 소비량이 세계 최대라거나 쓰레기 수분 함유율이 세계 1위라는 사실은 한국의 식생활 문화가 변질 우려가 있는 장거리 수입이나 장기 유통에는 적합하지 않고, 따라서 근접지 유기농이 바람직한 대안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유기농으로의 전환에는 수 십 년이 걸리고, 평균 연령 59세의 농업 노동력은 유기농은커녕 기계농에도 견뎌낼 수 없다.

    그래서 초록정치연대 우석훈을 비롯한 생태농업론자들은 공공 노동력의 농업 투입을 제안한다. 사실 현 시점에서 이런 방안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하지만 대체복무·자활근로·자원봉사 같은 단기 이식 노동력은 농업을 ‘예비군 훈련’으로 만들 소지가 크다. 한국의 농업 종사자 급감은, 농가소득이 지난 10년새 도시근로소득의 99%에서 77%로 축소되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고, 대안 역시 여기서 찾아야 한다.

    미국과 유럽 농업이 ‘경쟁력’이나 ‘특성화’에 기초해 잘 나가고 있다는 말들은 무식의 소산이거나 새빨간 거짓말이다. 미국 농가소득의 20%, EU 농가소득의 70%는 농가소득보전 직접지불금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 농업에 가장 필요한 것은 2% 조금 넘는 직접지불금을 엄청나게 늘리는 것이지, 유기농으로 스스로 경쟁력을 갖춘다거나 남는 쌀을 북한에 보낸다거나 하는 따위가 아니다.

    물론 직접지불제가 산업으로서의 농업 회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유기농 역시 현재와 같이 소생산 양식 – 고가격 정책이 계속된다면 일본의 쇠고기 소비처럼 시장 양극화와 유기농 기반 자체의 제한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 영세농(분할지농)의 존속은 단위 토지당 생산성이 높은 다른 산업과의 경쟁에 토지를 잠식당하는 농지 축소를 피하기 어렵다.

    늙은 농민에게는 아사를, 젊은 농민에게는 날품팔이 노동을, 도시노동자에게는 고용전쟁을 강요하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자본주의적 기업농 정책에 대항할 수 있는 우리의 대안은 협동조합적 토지 소유와 작농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협동조합이, 선견지명 있는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반공 협동조합’이나 작금의 ‘농촌 사채업’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소소유자 의식에 영합하고 조장하는 농민운동이나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만드는 소농연합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 총취업자의 5%를 차지하는 유럽의 사회적 경제섹터는 소생산자 자조 조직의 산개가 아니라, 소생산자운동과의 투쟁, 단절을 통해 확립된 것이다. 몬드라곤이나 키부츠는 ‘다양한 국부적 실천’이 아니라, 격렬한 계급투쟁과 내전(civil war)의 구조적 산물이다.

    이 글은 시민의 신문(ngotimes.net)에도 함께 실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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