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상영 시장 독과점 욕망을 규제하라
    By tathata
        2006년 08월 12일 03: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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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한국영화, 두 가지 풍경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 아주 상반된 두 개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청어람이 제작한 영화 <괴물>의 엄청난 흥행 소식이고, 신작 <시간>의 개봉을 앞둔 김기덕 감독의 기자회견이 다른 하나였다.

    청어람이 제작하고, 쇼박스가 배급하는 영화 <괴물>은 개봉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2006년 깐느영화제 감독주간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는 보도는 관객들의 기대를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괴물>은 이런 기대 속에서 620개라는 한국 영화 최다 개봉 스크린을 확보하였고, 개봉 전 예매율도 거의 100%에 근접할 정도의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엄청난 물량 공세로 모든 한국영화 흥행 기록 갱신이라는 결과를 얻고 있다.

    개봉 첫 주말 토요일에는 역대 당일 최고 관객 동원 기록을 수립하였음은 물론이고, 개봉 첫 주말 최대흥행 기록, 최단기간 100만 흥행 돌파 등 <괴물>은 한국 영화 흥행의 모든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는 중이다. 각종 미디어들은 <괴물>이 아무리 늦어도 8월 18일 이전에는 최단기간 1,000만 관객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괴물>이 과연 <왕의 남자>가 기록한 1,200만여 명의 기록을 깨고 최고 흥행작이 될지에 대해 이런저런 예측 기사들을 내놓으며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고 있다.

     

     

    ▲ 김기덕 감독의 <시간>

     

    반면, 김기덕의 <시간>의 사례는 좀 우울하다. 전작 <활>의 단관 개봉을 통해 총 1,400여명의 관객밖에 동원하지 못한 김기덕 감독의 신작은 아예 국내에서 개봉되지 못할 뻔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영화주간지 [씨네21]에 이례적으로 장문의 프리뷰를 실으며, <시간>이 만들어졌으나 개봉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알렸다. 이에 한 네티즌은 김기덕 감독의 <시간> 개봉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개봉하지 못할 뻔한 <시간>은 다행스럽게 외국영화 전문 수입 배급사인 스폰지가 역수입함으로써 어렵게 한국 상영이 결정되었다. <시간>이 언론으로부터 최근 주목을 받은 것은 영화의 기자 시사에서 김기덕 감독이 한 말이 언론에 보도되고부터였다.

    인터넷 연예 매체들은 김기덕 감독이 더 이상 자신의 영화를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을 것이며, 부산국제영화제 등 국내영화제에도 출품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별 이변이 없는 한 더 이상 한국 사람들은 김기덕 영화를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워 질 것이며, 이런 결정을 내린 김기덕 감독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참으로 오만하며 동의하긴 어렵다는 기사들을 내놓고 있다.

    한쪽에서는 최단기간 1,000만 관객 동원 샴페인을 터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다음 작품으로 한국 관객들을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현재 한국영화의 모습이다. 이 두 사건이 비교가 되면서 매체들은 경쟁적으로 국내 영화상영시장의 스크린 독과점을 우려하는 기사들이 싣고 있다.

    한쪽으로는 흥행기록을 경마식으로 보도 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이 문제의 대안이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는 모순적 태도가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마이너쿼터의 필요성이 다시 한 번 제기되고, 프린트 벌수 제한이나 전용상영관 설립이 구체적인 대안으로 언급되고 있다.

    익숙한 풍경들, 익숙한 호들갑

    사실 이런 모습은 생경한 것이 아니다. 전체 스크린의 40% 가량을 차지한 <괴물>의 모습은 2004년에는 강제규필름 제작, 쇼박스 배급의 <태극기 휘날리며>가, 2005년엔 진인사필름 제작, CJ엔터테인먼트 배급의 <태풍>이, 2006년엔 KnJ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하고 CJ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한 <한반도>가 이미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시네마서비스가 제작 배급한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CJ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한 <말죽거리 잔혹사>가 개봉되었던 2004년 봄에도 지금처럼 스크린 독과점을 강하게 우려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또한 적은 수의 스크린에서 간신히 개봉하거나 아예 개봉을 못하는 영화들은 널려 있어 굳이 이야기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최근 1만명 관객을 동원한 이모션 픽쳐스 배급의 <내 청춘에게 고함>은 그나마 양호한 사례다. 인디스토리가 제작, 배급하는 <팔월의 일요일들>은 제작한지 1년이 지나서도 개봉하지 못하고 있고, 서울독립영화제2005 개막작인 <상어> 역시 개봉은 언감생심이다. <마리이야기>를 만든 이성강 감독이 2005년 실사영화로 연출한 <살결>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마케팅 지원을 받았으나, 개봉은 아직 감감 무소식이다.

    독립영화계의 스타감독 이송희일이 연출하고 청년필름이 제작한 <후회하지 않아>와 <마이 제너레이션>의 노동성 감독이 연출하고 역시 청년필름이 제작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주류영화사가 제작한 (초)저예산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배급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관객들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장편독립영화들은 널리고 널려 있다. 이 중 많은 수의 영화들은 관객들을 만날 기회인 개봉 상영을 아예 포기한다. “전국에 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이 1,600개가 넘는데도 불구하고 내 영화를 상영할 스크린이 정녕 하나도 없단 말이냐!”라는 감독들의 한숨 섞인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스크린 독과점 대안은 없을까?

    거의 매년 스크린 독과점이 문제가 되고, 저예산영화와 독립영화들이 상영할 수 없다는 지적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마이너쿼터’, ‘프린트벌수 제한’, ‘전용상영관 확대’ 등의 대안들이 이렇게 저렇게 제안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행되지 않거나 혹은 못하거나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프린트 벌수 제한’, 문화관광부가 주최한 토론회에서도 어느 평론가가 필요성을 역설하고 많은 사람들이 스크린 독과점 현상을 막을 수 있는 대안으로 언급하는 이 정책은 상영하는 영화의 프린트수를 제한하여 600개씩 스크린을 독점하는 현상을 막자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변화하는 상영 시장 환경에도 부합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실제 상영 시장 내에서는 스크린 독과점을 막는다는 의도와 달리 시장을 더욱 왜곡시킬 수 있는 맹점이 있다.

    프린트 벌수를 제한하면 제한된 숫자만큼만 스크린을 차지할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멀티플렉스는 하나의 프린트로 여러 스크린에서 영사가 가능하다. 프린트 한 벌 가지고 전체 스크린의 상영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또한 점자 디지털 상영이 대세가 되어가는 현재 시장 상황에서 프린트 벌수를 제한하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의 정책이 될 수 없다는 문제도 간과할 수는 없다.

     

     

    ▲ <내 청춘에게 고함>

     

    무엇보다 이 정책이 가진 맹점은 프린트수가 제한될수록 배급사의 힘이 강력해 진다는 것이다. 프린트 수가 부족하다면 관객들이 자주 찾는 주요 멀티플렉스 체인들과 배급사와 수직 계열화된 멀티플렉스 체인만이 그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배급사의 힘은 더욱 강력해지고 독립계열 극장들은 관객이 잘 드는 영화 프린트를 확보하기 위해 배급사에 이전보다 더욱 강력하게 종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영시장은 배급사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면 블록부킹 등 불공정 거래가 확산될 우려가 있다. 이에 따라 강력한 힘을 가진 배급사가 배급하지 않는 영화의 경우 상영 기회를 잡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이 힘의 논리에 의해 더욱 왜곡되어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전용관의 확대’. 문화관광부가 스크린쿼터 축소의 대책으로 예술영화전용관 100개를 들먹이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던 전용관 확대 정책은 어느 정도 실효성이 있다. 실제로 상영 시장 내에서 상영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하는 독립영화계는 줄기차게 ‘독립영화 전용관’의 설립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1기, 2기 영진위는 독립영화전용관 설립을 부적절한 정책이라고 외면해 왔다.

    다행히 3기 영진위에 들어와서 경우 추진 정책의 하나로 인정받긴 했지만, 그 동안 너무 심하게 바뀌어버린 영화 상영 시장 현실에 의해 쉽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영진위와 독립영화계는 독립영화전용관의 운영 방식이나 의의에 대해 이견을 가지고 있지만, 독립영화전용관 설치가 상영 시장에서 배제된 독립영화의 상영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에는 이견없이 동의하고 있다.

    물론 지금 이야기되는 전용관이 독립영화전용관을 확대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용관의 확대는 우선적으로 영진위가 지원하는 아트플러스 시네마네트워크(이하 아트플러스)같은 예술영화전용관을 지칭한다. 아트플러스 사업은 시장에서 밀려났거나 단관으로 예술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해 온 영화관들을 대상으로 예술영화 상영을 하면 이에 대한 보상으로 일정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이다.

    영화관 보조금 지급이라는 방식으로 예술영화 상영 기회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100개관을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 많은 예산이 소모되므로 부적절하다는 것이 거의 대다수 영화계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영진위는 지역 시민회관, 문예회관 등 영화 상영이 가능한 비상설 극장을 전용관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사업 내용을 수정하였다. 이런 사업 내용의 수정은 그동안 독립영화계와 시네마테크 단체들이 요구해온 공공/공동체 상영관 요구에 일정하게 맞닿아 있기도 하다.

    독립영화계와 시네마테크 단체들은 비영리적 영화 활동이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상영관 정책으로 공공/공동체 상영관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공공/공동체 상영관 설립 요구는 시장 내에 있는 극장들은 시장 논리에 구애받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시장 내에 있는 극장들에게 비영리적인 독립영화, 다큐멘터리영화, 실험영화, 고전영화 등을 상영하도록 요구할 것이 아니라, 시장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공공적으로 운영되는 상영관을 통해 시민들이 다양한 영화적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것이 이 제안의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영진위의 전용관 정책은 이런 제안의 일부를 수용하고 있긴 하지만 다르다. 영진위가 지역의 비상설 상영관에 접근하는 방식은 비영리적인 영화의 상영을 공공적으로 보장하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일단 비상설 극장을 영화 상영관으로 바꾸어 시장에서 상영되지 못하는 영화들을 상영하겠다는 것이다.

    이 두 입장이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기본 전제부터 큰 차이가 있다. 전자가 다양한 영화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비영리적이고 공공적인 상영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현재 영화 시장이 가진 독과점의 문제를 비상설 극장을 영화 상영관으로 바꾸어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시장에서의 독과점 문제를 시장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내버려둔 채, 우회적으로 문제를 풀겠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배제된 영화들을 위한 상영관이 늘어나는 것은 일면 바람직 하지만, 상영 시장의 독과점을 해소하려는 노력 없이 진행되는 정책은 시장에서 소외받는 영화들의 상영 기회를 시장 밖에서 창출함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이런 영화들을 시장 밖의 영화로 인식시키고 시장 내의 다양성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

    마이너쿼터, 스크린 독과점의 대안? 

    ‘마이너쿼터’는 전용관 정책과 달리 시장 내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정책이라 할만하다. 알려진 마이너쿼터는 ‘각 스크린의 년 중 상영 일수 중 일부(최소 7일부터 최대 14일)를 저예산영화/예술영화/독립영화의 상영일로 보장하자’는 내용이다.

    전국에 스크린을 1,600개라고 가정했을 때, 최소 11,200일에서 최대 22,400일 동안 상영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날짜를 365일로 나눠보면 최소 30개관의 연중 상영이 보장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인데, 이 숫자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상영관 30개는 그저 산술적 수치일 뿐이지 실제 상영관 수는 아니란 것이다.

    만약 주어진 쿼터를 연속으로 사용하지 않고, 일주일에 관객이 가장 들지 않는 날 중 하루씩 7주(혹은 14주)를 상영한다면, 이 정책은 있으나 마나 한 정책이 된다. 연속으로 사용하게 한다고 해도 문제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는 이 극장, 저 극장 전전해야 하며, 관객들은 영화 상영 극장을 찾아가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어찌되었든 상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야 이런 기회라도 만들어서 활용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영의 문제가 단순히 극장이 있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란 점을 기억하라. 지난 번 글에서도 언급했듯 영화가 상영되기 위해서는 홍보/마케팅 작업이 필요하다. 이 극장 저 극장 전전한다면, 새로운 상영관을 알리기 위한 홍보/마케팅 비용이 상승하게 되며, 이럴 경우 총제작비가 증가하게 되어 개봉 상영에 부담을 주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상영을 하게 될 경우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하는 관객 커뮤니티가 구성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수정된 ‘마이너쿼터’가 제안되기도 했다. 멀티플렉스를 대상으로 한 마이너쿼터를 시행의 경우, 각 스크린의 배정일수를 하나의 스크린에 몰아서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개의 스크린을 가진 극장의 경우 하나의 스크린에서는 최소 70일에서 최대 140일까지 저예산/예술/독립영화를 상영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앞서 제안된 마이너쿼터의 비효율성을 상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마이너쿼터가 바로 이런 것이다. 멀티플렉스 내에 최소 한 개씩이라도 다양한 영화가 상영될 수 있는 스크린을 만들자는 것인데, 전국의 멀티플렉스가 160여 곳이라면 160여 개의 (최소 30일 이상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는) 전용관이 생기는 효과가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정책은 구체적인 정책이 되지 못했다. 이유는 2004년 마이너쿼터를 정책화하려던 열린우리당이 스크린쿼터제의 축소를 위한 정책으로 상정하고 검토하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마이너쿼터 정책이 이 제도를 시행하는 영화관에 손실분만큼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방식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시행되는 일수만큼 보조금을 지급한다면, 매년 최소 수십 억 원 이상의 보조금이 지급되게 될 것이다.

     

     

     

    ▲서울시내 한 대형복합영화관이 영화 ‘괴물’을 보기 위한 관객들로 북적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매년 수십 억 원 이상의 공적 자금을 투여하더라도 시장 내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이 사업은 추진해 볼만하다. 그러나 멀티플렉스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이 과연 적절한가? 만약 보조금 지급을 하지 않는다면 마이너쿼터는 검토해볼만한 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국 스크린이 1,600여개 중 멀티플렉스 내의 1개씩 마련되는 160개의 스크린은 전체 스크린의 10%에 해당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정말 10%일까? 다시 계산해 보자. 160개 스크린에 마이너쿼터 최소 7일을 상정하면 총 1,120일이다. 이 수를 365일로 환산하면 극장 3개 정도의 상영일수일 뿐이다. 14일 쿼터를 적용한다고 해도 6개의 전용상영관을 대체하는 효과밖엔 없는 셈이다.

    독과점, 영화 산업의 속성

    마이너쿼터제의 구체적인 실행 모델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실효성 있는 정책이 될지 아닐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만약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고 멀티플렉스 1관 당 1개 스크린에 대해 연간 상영일 수의 40% 정도의 마이너쿼터를 적용한다면 23,360일의 상영이 보장되고, 64개 정도의 전용관을 설치하는 효과를 볼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이 정도라면 더욱 해볼만한 정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만으로는 상영시장의 왜곡이 해소되지 못한다. 마이너쿼터가 시행되지만 다른 쪽에서는 전체 스크린의 40% 이상을 점유하는 현상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이너쿼터는 그저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상영관 정책일 뿐이다. 상영 시장의 다양성을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정책들이 필요하다. 최근 멀티플렉스 내에서 한 편의 영화가 차지하는 스크린의 점유율을 제한해 다양한 영화의 상영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주목할만하다.

    한 멀티플렉스 내에서 하나의 영화가 너무 많은 스크린을 차지한다면 다른 영화의 상영 기회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영화가 많은 스크린을 차지하는 것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배급사가 배급하는 거대 예산 규모의 영화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6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상영하기 위한 600개 프린트를 제작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쉽게 생각하듯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는 영화니까 영화관들이 상영하려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40%의 스크린을 채우게 되는 것은 아니다. 큰 예산을 들인 만큼 큰 수익을 발생시켜야 하기 때문에 많은 스크린이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스크린을 잡는 것이다. 웬만한 예산을 들인 영화는 흥행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확신이 없는 한 관객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비용을 더 들여가며 적정한 수 이상의 프린트를 제작하지는 않는다.

    스크린을 많이 잡는 또 다른 이유는 강력한 경쟁자가 없어야 시장에서의 성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강력한 경쟁자를 몰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다른 경쟁자가 발붙일 곳을 없애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시장 진입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크린 독과점의 문제는 단순히 저예산/예술/독립영화의 상영 기회가 없어지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 영화의 성공을 위해 다른 영화의 시장 진입을 억제하려는 자본의 욕망이 바로 스크린 독과점의 문제인 것이다.

    영화산업의 속성 중 하나는 독과점적 질서를 지향하는 것이다. 과거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수직계열화를 한 것도, 최근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다른 매체와 수평 계열화를 하는 것도 모두 과점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욕망 때문이다. 영화가 산업화될수록 이런 욕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영화가 산업화된다는 말은 한국영화산업의 독과점의 욕망이 커진다는 말과 같은 말인 셈이다.

    ‘상영 영화 쿼터제’, 상영 시장의 다양성을 위한 정책

    산업을 그냥 내버려 둘수록 독과점 현상은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장의 독과점은 시장 밖의 다양성 정책(전용관 설립)이나 소수 영화의 소극적 상영 정책(마이너쿼터의 도입)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 독과점으로 인한 시장의 왜곡을 막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정책 개입이 필요하다.

    최근 대안으로 말해지는 ‘스크린 점유율 제한’은 전용관 설립이나 마이너쿼터의 도입보다 적극적인 시장 내 정책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이 정책에도 맹점이 있다. 독과점 규제를 위한 강력한 정책처럼 보이긴 하나 잘못 적용될 경우 시장을 더욱 왜곡 시키거나, 한국 영화 제작 산업에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영화가 멀티플렉스에서 차지하는 스크린 점유율을 30%로 제한한다고 치자. 이 말은 하나의 영화가 차지하는 30% 이외에는 다양한 영화가 상영된다는 것을 의미하진 못한다. 30%의 스크린을 점유하는 세 편의 영화에게만 상영 기회가 보장되는 정책이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물론 너무 극단적인 예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수 메이저가 과점적 질서를 구축하는 경우라면 이런 맹점은 시장의 높은 진입장벽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 경우 다양한 영화의 상영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다양한 영화의 제작(특히 저예산의 영화)을 위축시킬 수도 있다.

     

     

    ▲영화 ‘괴물’

     

    그렇다면 특정 거대 영화의 스크린 독과점을 막으면서도 다양한 영화의 상영을 보장하는 정책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특정 영화의 점유율을 제한하는 식의 배급의 문제가 아니라 상영관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편수를 제도화는 상영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영 시장 독과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멀티플렉스 상영관, 그 중에서도 배급사와 수직계열화된 멀티플렉스 체인 상영관이 특정 영화에 스크린을 몰아주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멀티플렉스가 상영해야 하는 영화의 편수를 할당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 ‘상영 영화 쿼터제’가 바로 그런 정책이다.

    ‘상영 영화 쿼터제’는 멀티플렉스의 스크린 숫자의 특정 퍼센티지의 영화를 상영하도록 하여 스크린 독과점을 규제하는 정책제안이다. 예를 들어 ‘상영 영화 쿼터제’가 각 멀티플렉스 스크린수의 70%로 적용된다면, 10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는 최소 7편 이상의 영화를 상영하게 된다. 완전하진 못하지만 최소한 다양한 영화의 상영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물론 1편의 영화가 3개의 스크린을 차지하고, 나머지 6편의 영화가 각각 1개의 스크린을 차지하는 쏠림현상이 생겨 스크린 독과점 현상이 반복될 수 있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흥행되는 작품이 1편뿐이겠는가? 1편이 아니라면 배급사간 경쟁을 통해 스크린 쏠림 현상이 줄어들 것이다. ‘상영 영화 쿼터제’는 특정 영화의 스크린 점유율을 제한하는 정책보다 상영하는 영화의 편수를 무조건 많아지게 한다.

    스크린 점유율 제한 정책을 강화하여 하나의 영화가 20% 이상의 스크린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해도 10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에서 상영되는 최소 편수는 5개이지만, 상영영화 쿼터제를 70% 적용할 경우는 최소 7편의 영화가 상영될 수 있는 것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영화의 상영 기회가 제도적으로 보장된다면, 배급사간 공정 경쟁이 가능할 것이며, 이에 따라 상영 시장 역시 서서히 정상화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문화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기획이 필요하다.

    ‘전용관 설립’ 정책이 시장에서 배제되는 비시장적인 영화를 상영하고 수용하게 하는데 의미 있는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상영 시장의 정책 개입을 통해 영화 산업의 독과점 욕망을 규제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를 내버려둔다면 영화 자본의 시장 지배 전략이 무제한적으로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 다양성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각각의 문화를 인정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프랑수아 드 베르나르는 [‘문화 다양성’ 개념의 재정립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문화 다양성(diversitē culturelle)의 다양함이 상이함(le diffērent), 다수(le pluriel), 복수(le multifle), 다채로움(le variē)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고 쓰고 있다.

    다양성의 의미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의 라틴어 어원인 ‘디베르수스(diversus)’가 가졌던 의미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디베르수스’는 ‘대립되는’, ‘불일치하는’, ‘모순되는’, ‘상이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어원에 따른다면 다양성은 고정된 결과나 상태가 아니라 투쟁 속의 운동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용관 정책’이 시장이 책임질 수 없는 비시장 영역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단지 시장에서 배제된 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정책이라면, 이 정책은 그저 시장 영역에서 배제된 (이미 있는) 영화들은 여전히 시장 밖에 존재해야한다는 것을 재획인시키는 것이 뿐이다. 이런 정책은 베르나르의 견해대로라면 다양성 정책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전용관 정책’이 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시장 내의 다양성을 확보해내기 위한 정책과 함께 존재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왜곡된 시장을 단순히 보조하는 전용관 정책이 아니라, 비시장적 영화가 소통되는 장으로서 전용관 정책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영화의 문화 다양성 정책은 영화 산업 자본의 지배 전략에 대항할 수 있도록 자본의 독과점적 욕망을 규제하고, 시장 안에서 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문화 다양성’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이런 기반 위에서 ‘법적/제도적 기획’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문화 다양성’을 정치적 기획으로 사고될 때, ‘메이저 사기업들의 무제한적인 지배전략에 맞서 전체 이익과 공공 이익의 무제한적인 지배전략을 완벽하게 대응’되는 영화의 문화 다양성이 제대로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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