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틀비적 사건, ‘민주적 사회주의’
    [소설로 읽는 한국사회]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2019년 07월 10일 01: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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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장은 손으로 하늘을 찌르며 열변했다. 2010년부터 바다 건너 들려오는 샌더스의 연설은 나를 종종 가슴 뛰게 했다. 댓글엔 미국 상원의원 후원 방법을 묻는 내용이 많았다. 나도 후원방법을 찾다 월 후원금액들을 헤아려보기도 했다.

    몇 년간 차곡차곡 납부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당비였다. 나는 권리 당원이었다. 정의당 5기 당직 선거가 한창이다. 익숙한 이름도 있고 생경한 이름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당직 선거에 뜨겁게 관심을 갖게 한 사건은 양경규의 ‘과감한 전환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슬로건 때문이었다.

    “사회주의를 말한다고? 그것도 공중파에서?”

    여름 문턱, 선거 열기가 불붙었다. 그를 아는 몇 지인들은 연일 전화를 해댔다.

    “정말 하시겠데?” “사회주의는 알겠는데 민주적은 왜 붙는 거야”

    민주적 사회주의의 소용돌이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앞서 그 논란 속에 제 발로 들어간 그의 뒷모습을 보다 공연히 바틀비를 떠올렸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화자는 월스트리트의 법률 사무소 변호사다. 그는 스스로를 야심 없는 ‘야망 없는 안전제일주의자’라 칭하며 안전한 성공을 꿈꾼다. 헛된 야망이 없고 화내지 않으며 사업수완으로 이윤 창출에 능하다. 분명 직원들의 병리적 증세가 있음을 알지만 오전과 오후로 나눠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직원과 잔심부름하기 적합한 어린 사환을 시스템에 맞게 잘 활용한다.

    차츰 법률 사무실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늘어난 업무량 때문에 새로운 필경사를 추가 고용한다. 이때 새로 들어온 직원이 바틀비다. 그는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 불능으로 쓸쓸한” 인상에 걸맞게 업무 태도 또한 특별했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치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27쪽)

    사흘 후 화자는 필사한 문서를 검증하기 위해 바틀비를 부른다. 바틀비는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한다. 그 뒤로 어떠한 항변도 요구도 하지 않고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로 모든 지시를 거부했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출간 이후, “바틀비처럼” “바틀비적”이란 수식은 후기 근대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표현이 되었다. 동시에 노동자의 존재 양식에 대한 질문을 소환한다. 화자인 변호사는 저렴한 임금과 노동력 착취를 당연시하고 직원들도 무감하다. 차라리 자발적 착취를 택해 고용주만큼의 부를 이루는 일이 직원들의 목표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월가 사무실 귀퉁이에서 “먹어치우듯이 필사”를 하는 바틀비의 등장은 흡족 그 자체였다. 화자에게 아무 상념을 주지 않는 그는 마치 19세기 이후 나온 복사기와 다를 바 없는 필사 기계였다. 그러나 필사를 검토해봐야 했고 고용주가 시킨 검토 업무를 중단함으로써 바틀비의 존재감은 되살아난다. 화자는 바틀비가 너무 열심히 일해 각막이 손상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바틀비는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로 일관한다. 그 뒤로 화자는 바틀비가 누구인지 어디서 살고 뭘 먹는지 알고자 한다. 무엇을 제안해도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기이한 바틀비의 행적은 화자의 지식과 인식 내에 포획되지 않는 난제로 남는다.

    조르주 아감벤은 바틀비를 “비실천적 잠재력”을 가진 존재로 일컬었다. 바틀비는 단순히 노동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체의 행위도 하지 않고 월가의 벽을 바라보며 실존하고 있다. 그는 월가에 던져진 하나의 질문이다. 바틀비의 행동이 화자와의 갈등 때문인지, 계급 갈등인지, 산업자본주의 구조적 모순 때문인지 정확한 결론을 도출하기 어렵다. 그저 상상하며 월스트리트의 차디찬 법률 사무실에 던져진 바틀비의 의미만 상기해 볼 뿐이다.

    유능한 변호사이자 고용주인 화자에게 바틀비는 이해와 정복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바틀비 때문에 침투하는 인간의 존재 양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경험한다. 바틀비는 화자에게 고용주-고용인의 상식으로 포섭되지 않는다. 이성의 한계를 시험하고 사무실 한 귀퉁이에 있는 이름 모를 노동자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서로의 존재를 낯설게 해 노동자들이 말하는 방식을 변화시킨 정치적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틀비는 대안이 아니며, 오히려 대안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근원적 질문이다. 19세기 미국은 산업혁명과 급진적 기술의 발달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사회. 문화의 변화를 가져왔다. 새롭게 등장한 자본가, 금융업자, 법률가, 의사 등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나뉘었다. 바틀비의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는 혼란과 갈등을 일으키지만 바틀비 자신만은 평온하고 태연하다. 근대적 인간형인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동일자로부터 탈주한 바틀비의 가능성은 오로지 화자에게 끊임없는 의구심과 질문을 불러낸다.

    번듯한 법률사무소장인 화자는 월가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 ‘무(無)도 아닌 비실천적 잠재력’을 가진 존재의 수수께끼로부터 무기력과 파괴력을 느낀다. 급기야 이런 바틀비를 피해 사무실을 이전하지만 바틀비가 사무실에 그대로 노숙한다는 민원 때문에 다시 바틀비를 마주한다. 끊임없이 화자의 상식 선에서 바틀비의 욕망을 규정하는 순간 언어는 미끄러진다. 이로써 바틀비의 존재 규정은 유보된다.

    다시 말해 바틀비라는 부차적인 존재의 텅 빔, 그 양태의 불합리성을 드러내기 위해 항상 혼란이 수반된다. 불합리한 체제의 한복판인 월스트리트에 서 있는 바틀비와 무엇에 홀린 듯 그에게 휘말린 화자는 무수한 질문 속에 내던져진다.

    자본에 의해 모든 가치가 결정되고 생산과 소비가 초국가적으로 빠르게 유통되는 월가에서 모든 행동을 중단한 채 다시 생각한다는 것, 정교하고 빠르게 대체되며 고민할 틈 없이 주체를 체제로 흡수 통제하는 시스템에서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실존한 인간은 이제 어떻게 되는가.

    바틀비는 부랑자로 교도소에 수감되고 음식까지 거부하고 죽는다. 바틀비가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오기 전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부서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듣는다. 수취 불능의 편지는 죽은 자들의 편지다. 아무것도 아닌, 보류의 상태에 놓인 편지들은 마치 타자의 의미를 거부하는 바틀비와 닮았다. 편지는 수취인을 상실해 소각되지만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어디서든 또 발생하는 실재다.

    바틀비는 월스트리트의 차가운 벽과 수용소의 벽을 바라보며 끝까지 안하는 편을 택했다. 그곳이 어디든 바틀비 자신의 존재 양식 그대로 자신을 실현할 뿐이다. 바틀비에게 죽음은 비실천적 잠재력의 일부이며 화자에게 진정한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바틀비가 죽은 자리에 피어난 풀은 오히려 월가의 거리에 사라진 본래적 가치이다. 그저 평범한 자본가로 성공하고자 했던 화자는 바틀비가 선사한 질문 속에서 자기 내부에 손상된 인간적 가치를 직시한다.

    자본이 요구한 방식으로 살지 않는 인간, 어쩌면 세계의 질서와 관계 맺기를 거부한 인간, 근대와 거리를 두고 단독하게 살고자 했던 인간은 다른 무엇이 되지 않기 위해, 차라리 아무것도 되지 않음을 택했다. 그는 자본의 호명을 거부함으로써 정치적 해방을 꿈꿨다. 바틀비의 퇴거는 기존 질서로부터 시차를 벌린다. 하여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은 결코 바틀비가 아니라 그런 바틀비를 만난 고용주-화자이다.

    화자는 바틀비와 자신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절망을 확인했다. 죽음으로 질주하는 편지들의 비탄 속에서 피로로 소진된 월가의 유령이 실상 그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지금-여기 한국에 ‘민주적 사회주의’가 할당한 질문은 무엇인가. 소수 언론에서 서너 줄 겨우 다뤄준 진보정당 선거, 거기에 등장한 ‘민주적 사회주의’는 대중들에게 생경하고 불편할 터였다. 무더운 여름밤, 자정을 넘긴 공중파에 등장해 민주적 사회주의를 열렬히 설명하는 이름도 얼굴도 처음 보는 저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동유럽 사민주의의 구호였던 ‘사회보장을 유지하는 시장경제’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양극화 속에 사회적인 것은 가뭇없이 상실되고 밀려났다. 사민주의가 약속한 사회보장이란 얼마나 협소한 대안이었는가. 하여 20세기에 태어난 모든 생명에게 할당된 자유란 천차만별이며 자유라 부르기조차 힘겨운 환상이다. 생존을 결정짓는 정치적 숙명은 소수의 이익에 따라 분할대고 누군가의 삶을 뿌리 뽑았다. 이제 뿌리 뽑힌 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사회적인 것은 보다 냉담하게 살만한 자들에 의해 퇴거했다.

    자본주의로 영속되고 절대화된 미래는 ‘장래’를 잃었다. 동일한 질서의 단절 없는 귀속이 획일적 낙원을 세웠다. 무한긍정과 성장 제일주의는 낯선 대안을 모두 불편하고 실패한 이념으로 치부했다. 장래 없는 현실에 이질적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질문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총체적 사변을 불러들인다.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이 오래된 미래야말로 지배 질서가 부과한 일방적 호명에서 서로를 탈정체화하고 뿌리줄기처럼 서로가 서로를 얽혀낼 때 가능한 일이다.

    역사의 종말을 통해 지배를 영속화한 소수는 끊임없이 다수를 어림셈했다. 이제 이윤에 의해 N값으로 기입되지 않을, 기존의 언어로 포획되지 않을, 새로운 바틀비적 인간의 합과 등치가 필요하다. 익명의 윤리적 주체, 때로는 인민이라 불릴지 모를 demos를 구성할 때, 공동체적인 것의 몫을 요구할 때만이 저들이 존치시킨 신자유주의를 기각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여의도에 6명의 의원을 가진 진보정당에서 “누가 민주적 사회주의를 두려워하냐고” 되묻던 사람. 2019년 더위에 지친 어느 밤, 권태로운 정치적 수사의 범람 속에서 그 어느 불씨보다 논쟁적인 불꽃을 쏘아 올린 저 사람을 보라. 그의 출현이야말로 진보정당 권리 당원인 익명의 소문자 ‘나’를 대문자로 만드는 사건, 이른바 바틀비적 사건이다.

    필자소개
    여미애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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