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희문 밖 ‘황학동’,
    공동묘지에서 만물시장으로의 변화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가난·전쟁·압력 속 버텨낸 삶
        2019년 07월 05일 12: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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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도성 동남쪽의 작은 문 ‘광희문’, 이 문은 가까이에 청계천이 흘러나가는 수문(水門)이 있어 속칭 수구문이라고 했는데, 도성 내 시신을 성 밖으로 옮길 때도 사용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렸다. 도성에서 광희문 밖을 나서자마자 마주치는 청계천변 지역은 낮고 습해서 사람도 거주하기 힘들고, 나무도 스스로 자라기 힘들었다. 단지 겨울 한 철, 나무에 앉지 못하는 두루미만이 고요하게 잠시 머물다가는 땅이었다. 광희문 밖 황학동. 낮고 습해 쓸모없던 그곳이 1970년대 만물시장, 도깨비시장, 중고시장 등 다양한 수식어로 불리게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동교의 성저십리에서 가장 낮고 쓸모없던 지역, 이름 없는 묘지로 뒤덮이다

    도시화에 따른 거주지의 팽창으로 나타난, 도시 외측에 있는 지역과 촌락과의 점이지대(漸移地帶)를 ‘근교(近郊)’ 혹은 ‘교외(郊外)’라고 한다. 근대 서양이론에서 등장한 ‘suburb(준도시)’가 전통공간인 교(郊)에 대입되면서 비슷한 의미로 혼용되고 있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교(郊) 지역은 근대 이전 도성 중심의 권역체계 속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공간의 이름으로, 도성을 둘러싼 100리 이내를 교(郊), 성 밖 50리까지를 근교(近郊)라 했고, 조선시대에는 이를 좀 더 구분해서 한양도성의 성 밖 10리 이내를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했다.

    ‘광희문 밖’이라고 불리던 이 지역은 동교(東郊) 성저십리 권역의 한 부분으로, 성저십리에는 금표(禁標)가 설치되어 한성부의 규제관리를 받았다. 함부로 벌목할 수도, 식물과 토석을 채취할 수도, 작물을 재배할 수도, 묘지를 쓸 수도 없었다. 허가가 있는 경우에만 식물을 채취하고, 채소와 과일을 생산해 도성으로 공급할 수 있었는데, ‘광희문 밖’인 이곳은 그러한 생산력도 갖출 만한 환경이 안돼서 다른 곳과는 달리 특색 있는 자연 경관을 가지고 있었고, 도성의 보호막처럼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변화는 18세기를 전후로 일어났다. 각종 재해 등으로 인한 기근 때문에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유랑민들이 증가한 시기였다. 이들은 전쟁 이후 허술한 도성관리와 규제를 틈타 도성 밖 외진 곳, 혹은 관리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삶을 연명했고, 광희문 밖은 맞춤인 장소였다. 유민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농산물과 같은 식재료를 비롯해 일상생활에 필요한 갖가지 물건들을 도성에 공급하는 일로써 도성민들의 삶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질병과 빈곤의 요인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설치된 것이 빈민의 구휼을 담당하는 기관, 활인서였다. 조선 초기 설치된 활인서는 한동안 유명무실하다가, 18세기 중반 서울 주변으로 유민이 몰려들자 이들이 주로 머물던 광희문 밖에 이전 설치되었다. 활인서는 일반 의료 활동 이외에도 무의탁 환자를 수용하고,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는 병막을 가설하여 환자를 간호하며 음식과 의복·약 등을 배급하기도 하고, 또한 사망자가 있을 때는 매장까지 담당한 기관이었다. 그렇게 활인서가 설치되자 광희문 밖은 습지에 인접한 구릉에서부터 듬성듬성 묘지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일대는 이름 없는 묘지로 뒤덮인 공동묘지처럼 변해갔다.

    한양도성 밖 묘지. 중앙에 광희문과 그 뒤로 남산 능선이 보인다. 출처: 『東宮殿下韓國行啓記念』, 1907년

    공동묘지구역이 위치, 면적 등의 규정을 통해 근대적 제도 안으로 들어온 것은 1912년이었다. ‘남부 명철방 수구문 외’, ‘묘지·화장장·매장 및 화장에 관한 규칙’을 통해 마련된 묘역의 위치였다. 명확하게는 ‘내지인’의 화장장 및 묘지로 공표된 것이었다. 1910년 병합으로 일본인의 경성부 이주가 본격화되면서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기반시설 중 하나로 들어선 것이었다. 이는 기존에 있던 조선인 공동묘지의 남쪽을 사용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되자 광희문 밖 일대는 ‘신당리 공동묘지’로 불리게 된다.

    신당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제외된 묘산동(墓山洞) 토막촌

    일제강점기에도 유민은 계속 증가했다. 다만 그 주된 요인이 이전과 달리 일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수용방식에 따른 농민들의 향촌 이탈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차이가 있었다. 농업에 종사하던 수많은 조선인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고향을 떠났다. 만주로 이민을 간 경우도 많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수는 아무런 대책 없이 도시, 그중에서도 경성으로 향했다. 이들은 도심부에서 일을 하며 세를 얻어 지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막노동을 하는 도시 빈민이 되어 도시 주변을 떠돌 수밖에 없었다.

    당시 총독부는 도시 주변 임야나 하천바닥과 같은 빈 땅에 움집을 짓고 살게 된 이들을 토막민이라 규정하는 한편, 이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토막촌을 무허가, 비위생 등의 도시 관리상 위협요소로 판단했다. 그 중에는 신당리 공동묘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인 화장장 인근에서 바라본 광희문 밖, 묘지가 가득하다. 출처: 1909년

    신당정 토막촌 풍경, 출처: 1936년 5월 22일 매일신보

    신당정 토막부락(1,423) : 경성의 동남쪽에 해당한다. 공동묘지터의 완만한 구릉과 이를 둘러싼 강으로 이루어진 가장 오래된 토막부락이다. 큰 부락인데다 단결력이 강하여 해당부서 담당자도 그 처리에 애를 먹고 있다. 토지 소유자와의 분쟁이 다른 부락민이 비굴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심하고 반항심이 강하여 조사를 할 때도 여러 번 곤란에 처하였다. 생활정도는 대체로 좋다.” 1940, 경성제국대학위생조사부

    가장 크고 오래된 신당정 토막촌. 조선인 공동묘지 일대가 토막민들의 거주지였고, 묘역을 둘러싼 청계천과 습한 저지대는 토막촌의 울타리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묘산동(墓山洞)으로 불리는 지역, 신당정 162번지에는 가장 많은 744호, 토막민 3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대 토막촌에서의 거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경성부의 급격한 인구 증가는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부민의 활동반경 확대, 시가지의 확대, 기반시설의 확충 순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경성부 외곽으로의 주택지 개발 압력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제강점 초반에 기반시설로 설정된 묘역들은 점차 그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1928년 일본인 화장장은 홍제동으로, 조선인 묘역은 길음동으로, 일부 묘들은 가까운 금호동으로 밀려났다. 대신 폐쇄된 묘역과 그 주변에 무단으로 자리잡고 있던 토막촌을 대상으로 새로운 정비계획이 수립되기에 이른다. 이를 주도한 것은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였다.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획득한 토지의 개발과 경영을 목표로 1931년에 설립되었는데, 경성부의 토지주택지 개발, 그중에서도 신당리 일대 주택지 개발이 대표적 사업이었다. 일명 사쿠라가오카(桜ヶ丘)주택지, 1930년대 전원도시 및 문화주택지 개발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택지개발사업이었다.

    1차(1932년), 2차(1935년)사업이 순차적으로 시행되었다. 일본인 공동묘역과 주변 임야와 전답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자 경성부는 경성시가지계획(1936)을 수립하면서, 경성 동남부 지역에 신당토지구획정리지구를 지정하는 것을 내용으로 담아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의 사쿠라가오카 사업을 측면 지원한다. 그러나 신당리 일대 대부분을 포함한 이 토지구획정리지구 범위 안에 ‘묘산동 토막촌’만큼은 제외되어 있었다.

    사진 설명 : 신당토지구획정리지구는 남북으로 길게 지정되었다. 이중 일본인이 소유한 임야와 묘역이 있던 신당리 남쪽 지역은 일정 부분 개발이 진행되었으나, 조선인 공동묘역과 토막촌이 있던 신당리 북쪽 지역은 지목 변경 말고는 사업이 진행될 수 없었다. 특히 묘산동 토막촌은 제외된 상태였다.

    출처: 국가기록원, 경성시가지계획 – 신당토지구획정리지구 현황 및 계획, 1940

    사진 설명 : 광희문 밖 신당리. 1930년대 일본인 화장장과 묘역이 있던 남쪽 일대에는 신주택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반면 북쪽의 조선인 공동묘역에는 토막촌이 산재하고 있었는데, 가장 큰 묘산동 토막촌 지역은 신당토지구획정리지구에 지정되지 않았다. (1936년 『대경성부대관』)

    당시 신당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45년을 준공 기한으로 하였는데, 1942년 부지 중 약 30%에 해당되는 용지를 환지예정지로 지정고시하고, 도로 및 배수공사 정도만을 완료했다. 이 30% 역시 대부분 일본인이 소유한 임야와 묘역이 있던 신당리 남쪽 지역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가난 속에서도 끈질긴 삶, 해방과 함께 맞이한 자유로운 시장

    신당리 남쪽에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택지정리와 문화주택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 북쪽에서는 토막민들의 삶과 더불어 이곳을 오가는 영세 상인들의 삶이 누적되고 있었다.

    상업 활동은 퇴계로 변 노상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송파·왕십리·뚝섬 등 서울의 동남쪽에서 도성의 성문에 들어서기 전 가장 마지막에 당도하는 지역이었고, 반대로 도성 안에서 청계천 혹은 을지로를 따라 성 밖으로 나섰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지역이기도 했다. 공동묘지가 지척인데다, 토막촌 옆의 습한 저지대는 생산성이 없었지만, 대신 도심과 외곽이 만나는 결절 지역이었기에 상업 활동의 잠재력을 늘 갖고 있었다.

    천변 노상에서 시작된 시장의 공식적인 등장은 해방 직후였다. 상인들은 일제 말기 지목 변경이 완료된 퇴계로 변의 대지를 확보하고 1946년 점포수 263개를 갖춘 ‘성동사설시장’으로 등록을 마친다. 성동사설시장은 서울 동부권역에서 다양한 생필품을 공급하는 자유로운 전통시장으로 손꼽혔으며, 1949년에는 점포수 309개, 한국전쟁 이전 서울에 있는 사설시장 중에는 가장 많은 점포를 갖췄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단순 점포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식재료를 중심으로 한 전통시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일대 주된 상업 활동이 바닥에 돗자리, 대야 등을 놓고 파는 노점 형태로 운영되었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해방 이후 자유를 맞은 대부분의 사설시장이 그러했듯이, 이곳에 진입하는 데에는 별다른 장벽이 없었다. 누구든 와서 자리만 있으면 펼쳐놓고 팔 기회가 있었다.

    인접한 조선인의 묘산동 토막촌 또한 해방이 되자 비로소 ‘황학동’이라는 명칭을 얻고 법정동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황학동의 800여 호 가구는 전소되고, 인접한 성동사설시장 역시 파괴되고 말았다.

    포화가 빗겨난 자리에 제각기 들어선 시장들, 그리고 부흥주택의 건설

    한국전쟁 발발 이후 황학동 주변으로 가장 먼저 돌아온 이들은 기존에 있었던 성동사설시장의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서울 수복 직후 바로 시장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자리 잡은 위치는 기존의 위치가 아니었다. 기존 시장이 전쟁으로 파괴되자 남쪽 간선도로인 퇴계로변에 자리를 잡고, 1950년 10월 20일 ‘성동시장’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시장을 설립했다.

    그 다음은 양곡도매상이 들어왔다. 생필품 1순위에 해당되는 양곡시장은 생필품 시장에 인접한 신당 교차로에 자리를 잡고 경기 동부권역에서 생산된 양곡을 활발하게 공급했다. 이들은 타 품목에 비해 탄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도심뿐만 아니라 서울 전역을 대상으로 양곡 유통을 담당했다. 양곡도매시장이 시장의 주도권을 차지할 즈음부터 황학동 남쪽의 퇴계로 변은 ‘성동시장’ 외에 ‘중앙시장’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불리게 되었다.

    성동시장 북쪽의 청계천 하류 저지대에는 전쟁으로 가족과 터전을 잃어 갈 곳이 없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전쟁 통에 쏟아져 나온 각종 고물들을 모아 팔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있어 청계천변 판잣집은 거주지였고, 청계천변 노상은 일터였다. 품목도 나사 한 개부터 각종 생활용품, 건축 폐자재까지 종목을 가리지 않았다. 때마침 서울로 들어온 미군부대에서 나온 각종 물품들도 이곳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 팔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이 청계천변으로 몰려든 것이다. 물건과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면서 고물상의 영역은 점차 넓어졌다. 고물은 노점뿐만 아니라 점포 내에서도 거래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향력은 양곡 및 생필품을 담당하던 성동시장 상권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전쟁이 끝나자 피난을 떠났던 사람들 대부분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기 시작했다. 당장 복구사업이 시급했으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대규모 계획정리는 시행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황학동처럼 전쟁으로 인해 전소되거나 주인이 없는 지역은 당장이라도 주택 건설을 시행할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정부는 일제강점기에 마련됐던 ‘신당구역 토지구획정리사업’을 검토하고, 사업지구에서 제외되어있던 황학동(묘산동 토막촌)에 ‘제2중앙토지구획정리지구’를 지정했다.

    사진 설명 : 연한 하늘색의 구역이 1936년 지정된 신당토지구획정리지구, 진한 파란색의 구역이 1954년 지정된 황학동 제2중앙토지구획정리지구(묘산동 토막촌)이다.

    제2중앙토지구획정리사업은 그 목표를 ‘6ㆍ25사변 이후 신속한 주민 복귀와 토지개량, 후생의 제반시설을 완비하여 상업지역으로서 지리적, 역사적 특성을 증진시키기 위함’이라 밝히고 있다. 도심을 대상으로 한 제1중앙지구에 이어 진행된 사업으로 황학동을 비롯하여 서울역앞, 독립문 등 도성 밖의 상업지역을 대상으로 했다.

    사진 설명 ; 1955년, 1957년 2차례에 걸쳐 건설된 황학동 부흥주택(1966년 폐쇄지적도(좌)와 1973년 위성사진(우))

    사진 설명 : 2019년 현재, 황학동 부흥주택 건설 초기의 형태에 가까운 건물은 사진에 나온 건물 포함해서 3채 남짓이다. 대다수는 사진 양옆의 건물처럼 필지별로 수없이 많은 증개축이 이뤄진 상태다.

    1954년 지구로 지정된 직후 대한주택영단은 부흥주택 사업을 시행했다. 1차사업으로 1955년에 4호 연립 50동 200호을 건설하였으며, 1957년에는 1차사업지의 양옆에서 2차사업을 시행했다. 육군공병단과 보건사회부, 국방부, 서울시 등이 관여한 이 공공주택사업은 서민주택 여부, 뒤늦게 나타난 지주와의 갈등, 상하수도 시설 공급 등 다양한 문제들을 드러내는 바람에 주택의 질을 크게 담보하지 못한 채, 1960년대 중반에서야 마무리됐다.

    고물에서 금맥캐는 황학동 시장의 탄생

    출처: 『매일경제』 1968년 1월 1일자 「달라질 서울 상가판도」

    1945년에는 충무로 거리시대,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는 명동시대, 1955년까지는 소공동의 백화점시대, 1960년대에는 무교동시대였다.1967년 이후부터는 종로, 청계천 쪽을 따라 다시 동쪽으로 상가 경기가 이동하고 있다. – 매일경제196811일자 달라질 서울 상가판도

    서울시는 1960년대 말 세운상가를 건설하여 시내 중심지 상가가 종로~청계천로 사이에 밀집시키려했다. 태평로와 종로1가 부근은 업무 중심지, 을지로 일대에는 건축자재 상가, 청계천 2~3가를 중심으로 해서는 기계공구 및 자동차용품상가, 평화시장과 창신동에는 의류도매상, 중부시장과 낙원상가에는 일부 품목의 도매상 등을 집중시킴으로써 서울의 시장을 종로2가와 동대문 사이에 선형(線形, linear)으로 집결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실제로 남대문의 화공약품상들이 종로 및 을지로 3~5가로 모였고, 봉래동의 철재상들도 청계천로 쪽으로 모여드는 등 세운상가 건설 이후 종로, 청계천로, 을지로 일대의 상업 공간은 청계천로를 따라 흘러나가듯 변화되었다.

    이와 같은 계획은 황학동 일대가 도심부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강남 개발과 서울 권역 확대로 서울에서의 상업 활동이 부도심 지역으로 많이 분산되기는 했지만,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실제 서울 시내 상업 경기가 주로 을지로와 청계천로를 따라 이동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이러한 도심 상가 정책 속에서 황학동 일대가 그 영역을 더 확대하고 독특한 성격을 구축해 나가는 데에 도심과 외곽의 결절지라는 지역적 이점이 크게 작용한 것은 분명했다. 서울의 동쪽 교외에서 생산된 제품이 황학동에 모인 후 도심으로 들어가 최종 소비되었고, 도심에서 생산된 제품이 황학동을 통해 서울 외곽으로 유통되었다. 도심으로 들어가는 대표적인 생산품은 쌀, 채소와 같은 식재료였고, 도심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대표적인 물품은 중고품들이었다. 생필품 기반 시장에서는 도심과 서울 동남권에 식재료를 지원했고, 중고품 시장에서는 폐품에서부터 각지에서 들어온 만물(萬物)이 유입되어 재활용되어 나갔다. 서울 도심에 대한 지원(Support)과 재활용(Recycle)을 황학동이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과 상관없이 황학동 일대에서는 청계천 복개(1966), 고가도로(1969)와 삼일아파트(1969) 건설과 같은 토목사업들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공공에서 벌인 사업들은 지속적으로 황학동 상인들의 반발을 야기했다.

    성동구청은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 확보를 위해 관내 신당중앙시장 입구에서 영미교에 이르는 폭 15m, 길이 300m의 도로에 있는 노점(주로 식료품) 철거에 착수하였다. 이날 오전 9시부터 시작하려 했으나, 노점 상인들이 버티는 통에 철거작업이 중단되었다. 현재 시장조합측과 구청 측이 절충중이며 노점상인 300여 명이 몰려들어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 달라 아우성이다.” 동아일보1962917일자 노점 철거 말썽중앙시장서 두 여인 중태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황학동의 주거 지역은 계속해서 시장 영역으로 포섭되어갔다. 부흥주택 지역은 오히려 황학동 생필품 시장의 영역으로 흡수되었고, 새로 들어선 삼일아파트와 그 인근 블록은 고물상에서 목재상, 중고품, 수리점 등으로 다양하게 진화해갔다. 소방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자진해서 노점을 철거하기도 했고, 공공의 속도에는 따르지 못했지만, 기준에 맞춘 현대화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들어설 때까지 황학동 일대의 상권은 공공의 재정비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영역을 더 확대해갔다.

    공동묘지에서의 정착 이후 이곳에서 가난한 삶을 꾸리며 살아온 상인과 주민은 이처럼 끊임없는 갈등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그 상황에 맞게 변화시켜가며 결국에는 최대의 호황기 1980년대를 맞이했다. 당시 생겨난 만물시장, 도깨비시장, 벼룩시장, 골동품시장, 주방시장 등의 별칭들은 가난, 전쟁, 압력 속에서도 버텨내 결국에 살아남은 황학동 적응기의 다양한 이름들이었다.

    <참고자료>

    1. 『황학동, 고물에서 금맥캐는 중고품시장』, 서울역사박물관, 2014
    2. 『국토와 민족생활사』, 최영준, 1997, 한길사
    3. 『토막민의 생활과 위생- 1940년 경성의 풍경』, 경성제국대학위생조사부 엮음, 박현숙 옮김. 2010, 민속원
    4. 「조선도시경영회사의 주거지계획과 문화주택에 관한 연구」, 김주야, 한국주거환경학회논문집 <주거환경>, 2008, v.6 n.1(통권 9호)
    필자소개
    한국 도시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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