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둥 전투와 맹장 쉬스유
[국공내전㉗] '쉬스유, 주먹으로 마오쩌둥을 치다' 일화의 배경은?
    2019년 05월 23일 01: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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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㉖] 전략적 반격과 토지개혁

1947년 하반기에 공산당은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서며 전쟁의 주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천겅과 세푸즈의 집단군은 8월에 황허를 건너 룽하이 철도를 차단한데 이어 10월에는 이를 회복하려는 국군과 싸워 3만명을 섬멸하였다. 천세 부대는 10월 29일 다시 허난성 서부 푸뉴산 부근에서 국군과 전투를 벌여 잇따라 승리했다. 천겅은 부대 일부로 국군을 유인하여 분산시킨 다음 각개 섬멸하는 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천겅의 부대와 결전을 하고자 하는 국군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11월말, 천겅의 부대는 허난성, 섬서성, 후베이성 일대에 예섬악 근거지를 창건하며 공산당의 기반을 다졌다.

한편 천이와 쑤위가 이끌고 있는 산둥성의 화동 야전군 해방군 부대는 국군의 공격에 맞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멍량구 전투에서 장링푸를 전사시키는 등 해방군은 잠시 기세를 올렸지만 그후에도 계속 이어진 국군의 공세에 시달렸다. 장제스는 산둥성에 대한 중점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1947년 7월 국군은 25개 여단을 동원하여 해방군을 밀어붙였다.

장링푸의 74사단을 전멸시켜 사기가 오른 해방군은 산둥성 난마(南麻)에서 국군 정편 11사단을 포위하여 4일 밤낮 섬멸전을 펼쳤다. 그러나 국군 11사단장인 후롄(胡璉)은 장링푸와 달라서 쑤위의 속셈대로 쉽게 해치울 수 없었다. 그는 성격이 신중하고 치밀하여 이미 20일 동안 견고한 수비진지를 구축해 두었다. 해방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계속 11사단을 두들겼으나 끝내 함락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폭우가 내렸는데 7일 밤낮을 내리 퍼부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구원병이 시시각각 다가오자 국군의 형세가 점점 호전되었다. 공격군은 탄약이 모두 물에 젖고 도로가 진흙탕이 되는 등 전황이 날로 불리해졌다. 쑤위는 후퇴명령을 내려 실패를 인정하였다. 그 뒤에도 국군은 이멍산(沂蒙山)의 공산당 근거지를 빼앗는 등 공세를 거듭하여 잠시 동안 주도권을 되찾았다.

1947년 8월초,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화동야전군 지휘부에 병력을 둘로 나누어 작전하라고 지시했다. 서부 병단은 류보청과 덩샤오핑 부대의 중원 돌파에 호응하여 산둥성 서남부와 허난성, 안후이성, 장쑤성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동부병단은 산둥성에 남아 국군의 공격에 맞서 근거지를 사수할 임무를 맡았다. 서부병단은 화동야전군 사령원인 천이와 부사령원 쑤위가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동부병단은 쉬스유(許世友)가 사령원을 맡았으며 정치위원은 탄전린(譚震林)이었다. 중원으로 출격한 천이와 쑤위에게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근거지를 지켜야 하는 쉬스유의 책임도 막중했다.

내전 초기, 산둥성은 공산당의 가장 커다란 근거지였다. 내전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랴오닝성의 따롄항을 소련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롄과 엔타이까지의 해운은 관내 해방군의 구명대와 같았다. 동북의 공산당 근거지에서 생산한 포탄, 화약, 총, 약품, 포목 등 군수물자가 따롄에서 옌타이로 수송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구매한 군수물자나 약품도 모두 따롄항에서 자오둥 반도로 수송하였다. 이것을 다시 육로로 화동야전군과 진기로예 야전군에게 보급하였으니 옌타이는 해방군을 지탱하는 전략기지였다. 자오둥 반도는 백성들의 호응도 높아서 화동 야전군 5개 종대 주력이 자오둥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자오둥 반도에는 해방구 민병만 십수만명에 이르렀으니 병력과 보급물자에서 화동야전군을 지탱하는 기반이 아닐 수 없었다. 옌타이에는 병원, 병기공장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기관원과 치료받고 있는 부상병을 합하여 5만명이 넘는 인원이 상주하였다. 산둥성에서 군사기지가 이멍산이라면 보급기지는 옌타이였다. 장제스와 국민당군이 이곳을 점령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였다.

공산당 자오둥 해방구 은행에서 발행한 5각짜리 지폐(0.5위안)

국군은 산둥성 자오둥 반도의 공산당 해방구를 점령하기 위해 ‘9월 공세’ 계획을 수립했다. 국군이 산둥성 동부를 공격한 것은 중원의 병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산둥성의 공산당 후방기지를 점령하고 나아가 화동야전군을 섬멸할 바탕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류덩 대군의 따베산 진격과 천이와 쑤위 부대의 중원 진출, 그리고 천겅과 세푸즈의 부대가 중원에 진출하자 국민정부는 이에 대응할 방어병력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천이와 쑤위가 지휘하는 화동야전군 주력이 떠난 산둥성 동부를 공격, 해방군을 섬멸한 뒤 병력을 중원으로 돌리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장제스는 난징에서 비행기로 칭다오에 날아와 직접 작전계획 수립을 지시하였다. 지휘관도 육군 부총사령관인 판한지에(範漢杰)에게 맡겼으니 장제스가 이 작전을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국군 지휘관인 판한지에는 육군 6개 사단 20개 여단병력과 해군과 공군을 출동시켰다. 판한지에는 칭다오 쪽에서 자오둥 해방구를 공격하여 레이양, 옌타이를 점령, 해방군을 반도끝으로 몰아넣을 셈이었다. 자오둥 반도는 삼면이 바다인데다 가운데가 산악지역이었다.

국군의 육군 부총사령관인 판한지에(範漢杰)

마오쩌둥과 중공중앙 군사위원회는 이들에게 크고 작은 섬멸전을 펼쳐 자오둥 해방구를 사수하라고 지시했다. 쉬스유는 국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부심했다. 병력이 열세이므로 소모전과 지연전을 펼치고 기회를 엿보아 각개 섬멸하는 전술을 쓰기로 하였다. 하지만 국군 사령관 판한지에는 해방군이 즐겨 쓰는 이 전술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는 4개 정편 사단을 전위 제대로 배치하고 2개 사단을 후위에 바짝 따르게 하였다. 병력을 밀집시켜 차근 차근 진격하자 해방군은 점점 뒤로 밀렸다. 공산당 자오둥 근거지는 차츰 압축되어 동서 75킬로, 남북 40킬로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반도이므로 뒤로 밀리게 되자 삼면은 바다이고 동쪽은 국군이 밀고 들어오는 형세가 되었다. 하지만 해방군은 뒤로 밀리다가 갑자기 습격하기도 하고 진격하는 국군의 배후로 강행군하여 포위공격을 하는 등 철저하게 소모전을 펼치며 시간을 벌었다. 10월초 해방군 주력은 자오허(膠河) 서쪽의 인마(飮馬) 산양좡(山陽庄) 지역에서 국민당군 1만 2천명을 섬멸했다.

자오둥 전투의 해방군

자오둥 전투가 벌어진 곳

11월 상순, 국민당은 부득이 자오둥에서 병력을 이동시켜 중원 전장을 증원했다. 따베산을 비롯한 중원의 전황이 급박해졌던 것이다. 그러자 해방군 산둥병단은 국군을 악착같이 추격하여 섬멸전을 펼쳤다. 해방군은 까오미(高密)、센즈완(現子灣)에서 국군 1만명을 섬멸했다. 자신감을 얻은 해방군 산둥병단은 12월에 다시 레이양의 국군을 공격하여 1만 7천명을 섬멸하였다. 4개월간의 전투를 통해 해방군 산둥병단은 적 6만 3천명을 섬멸하고 10여개 현성을 점령했다. 이로써 국군의 산둥 해방구에 대한 중점공격이 수포로 돌아갔다.

맹장 쉬스유, 마오쩌둥을 주먹으로 치다.

자오둥 전투를 총지휘한 동부병단 사령원 쉬스유는 해방군 지휘관중에서도 특이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성격이 괄괄했으며 충직하고 용감하여 타고난 용장이었다. 그는 홍군 4방면군의 군단장으로 장궈타오와 천창하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허난성 신양에서 태어났는데 일찍이 소림사에 들어가 무공을 배웠다. 그는 격투로 수많은 적을 죽였으며 홍군 시절에는 일곱 번이나 결사대에 자원하였다. 군단장이 되어서도 결사대장을 맡은 일이 있었다. 그는 또 평생 술을 좋아하여 적의 대병이 눈앞에 있어도 태연히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한 뒤 그는 병사들 앞에서 적과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 부상당한 뒤 스스로 칼을 꺼내어 총알을 파낸 일도 있었다. 그런 그가 마오쩌둥을 주먹으로 쳤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일화가 펑황(鳳凰)TV에 방영된 일이 있으며 중국 공산당 홈페이지에도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니 전해 내려오는 소문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쉬스유가 그만큼 독특한 인물이며 마오쩌둥의 포용력이 컸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향집에서 물을 긷고 있는 쉬스유. 웃고 있는 이가 노모인데 쉬는 지극한 효자였다고 한다.

1936년 10월 상순, 홍2, 4방면군과 중앙홍군이 류판산 후이닝에서 합류했다. 이것은 홍군이 장정을 완전히 끝냈다는 상징이며 마오쩌둥과 장궈타오 사이의 공산당과 홍군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마오쩌둥이 당중앙과 홍군에서 영도자의 지위를 확립한 사건이기도 하였다. 이때 홍 4방면군 사단장이던 쉬스유는 군사위원회의 통지에 따라 홍군대학 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장궈타오의 잘못을 청산하는 투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홍군대학의 교장은 린비아오였다. 쉬스유는 2과 학생으로 천겅이 교육대장을 맡고 있었다. 학생들은 대다수가 군정간부들로 대부분 25세에서 30세까지의 젊은 나이였다. 서른 한 살의 쉬스유는 학생들 중 큰형 격이었다.

장궈타오의 죄상을 폭로하는 과정 중 홍 1, 2방면군 출신과 4방면군 출신 학생들 사이에 갈등이 갈수록 커졌다. 4방면군의 실패를 보고하는 대회에서 쉬스유는 주위의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방성통곡을 하였다. 그는 대회에서 폭로된 어떤 일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때 홍1, 2방면군 출신 학생들은 ‘사상개조를 돕는다.’는 명분 아래 쉬스유 등 4방면군 학생들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홍 4방면군 출신들이 장궈타오를 동정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방면군 출신들이 장궈타오의 죄상을 제대로 폭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더 강한 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쌍방은 크게 다투었으며 당장 칼을 뽑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뒤에도 적지않은 4방면군 출신 학생들이 비판을 당했다. 쉬스유는 장궈타오가 총애하던 장교로 지목되어 계속 비판을 받았다. 따베산 출신의 맹장인 쉬스유는 억울한 심정을 호소할 데가 없었다. 다시 장궈타오의 도망주의 죄상을 폭로하는 대회가 열리자 쉬스유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한걸음에 주석단에 뛰어 올라가 큰소리로 따졌다. “장궈타오가 무슨 도망주의냐? 중앙은 도망가지 않았나? 중앙 홍군도 소비에트를 버리고 달아나지 않았나? 우리보고 도망주의라고 하면 모두 도망주의가 아닌가? 어째서 적하고 싸우지 않고 우리끼리 싸우려는 거냐? 지금 와서 무슨 도망주의라고 하는 거냐?” 참으로 폭탄 같은 발언이었다. 홍군대학 강당이 시끌시끌해지더니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쉬스유는 따베산의 토비이다.” “쉬스유는 홍군의 트로츠키다.” “장궈타오의 추종자 쉬스유를 타도하자!”

숙소로 돌아온 쉬스유는 화를 참을 수 없어 몸을 떨었다. 그는 함께 교육을 받던 왕젠안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래 가지고 우리가 훙군에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나?” 그날 저녁 쉬스유는 위험천만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잔차이팡(詹才芳), 왕젠안(王建安), 우스안(吳世安) 등과 함께 쓰촨의 류즈차이(劉子才)에게 가 의탁하려고 한 것이다. 류즈차이는 전에 쉬스유의 부하였는데 쓰촨에 남아 유격대를 이끌고 있었다. 류즈차이가 이끄는 부대는 1만명으로 당시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 왕젠안이 먼저 수락을 하였고 그뒤 4방면군 출신자 가운데 호응자가 날로 늘어났다. 연대 간부가 20여명, 사단 간부가 6명, 군단 간부가 5명이었으니 결코 적은 규모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장궈타오와 측근 몇명은 데리고 가지 않기로 하였다. 말을 달려야 하는데 모두 체력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쉬스유는 움직일 노선도를 그리는 한편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편지도 한 통 썼다. 그들은 1937년 4월 4일 밤 10시에 떠나기로 확정하였다. 쉬스유는 이 계획이 성공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뜻밖의 변고가 발생했다. 그가 가장 믿고 있던 왕젠안이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왕젠안은 장정 때에 홍4군 정치위원이었다. 그는 거사 당일인 4일 오후 쉬스유 등이 모의한 계획을 홍군대학 보위처장에게 보고하였다. 마오쩌둥은 이 소식을 듣고 대노했다. 그에게 보고한 린비아오에게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이게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당장 쉬스유 등을 붙잡아 오라.”

다음날 저녁을 먹은 뒤 쉬스유가 심문실로 잡혀 왔다. 홍군대학 정치부 부주임인 푸종(傅鍾)이 심문했다. “달아나려고 모의했으니 중죄를 범한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나?” 쉬스유는 분연히 “모두 당신들이 내몬 것이다. 통분함을 참을 수 없다. 우리보고 죄를 지었다 하면 심문해서 그들에게 데리고 가라.”고 대답하였다. “너희들은 어디로 가려고 한 것인가?” “쓰촨에 가서 근거지를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당신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다. 누가 혁명을 하는지 반혁명을 하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누가 당신들에게 이런 일을 하라고 지시했나?” “가려고 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나 혼자 계획했다. 다른 사람은 관계가 없다. 때리든 죽이든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 쉬스유는 주머니에서 마오쩌둥에게 쓴 편지를 꺼내어 푸종에게 던졌다. “가져가라. 이게 그 증거다.”

심문이 끝나고 쉬스유는 감방에 갇혔다. 며칠 뒤 쉬스유는 간수로부터 놀랄만한 소식을 들었다. 당중앙이 이 사건을 “쉬스유 등 반혁명 집단 사건”으로 규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조직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려 하였으며, 옌안을 불태우고 마오쩌둥을 죽인 뒤 장궈타오를 데려가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간수가 덧붙였다. “중앙이 고등법원을 열어 너희들을 총살할 거다.” 며칠 되지 않아 쉬스유의 부인인 레이밍전(雷明珍)이 이혼을 청하였다. 레이밍전은 쉬스유의 두번째 부인으로 옌안현의 부녀부장을 맡고 있었다. 쉬스유는 더욱 화가 났다.

마오쩌둥은 쉬스유 등을 총살하자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쉬스유 등이 달아나려고 한 것은 단순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오쩌둥은 “1, 2방면군 동지들이 일을 그르친 것이다. 사람들을 양산박으로 내몬 것이다. 심문을 해보니 더 그렇지 않은가?”하고 말하였다. 쉬스유가 쓴 편지를 읽고 마오쩌둥은 더욱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이런 일을 경솔하게 처리하면 후환이 더 커지게 된다. 마오쩌둥은 사상공작으로 쉬스유 등을 일깨우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저녁, 마오쩌둥은 쉬스유가 있는 감방에 가서 그와 이야기하려고 하였다. 감방에 들어가자 마오는 친근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쉬 사단장 잘 지냈나?” 쉬스유는 적의가 가득한 목소리로 “나 쉬스유는 죄인이오. 곧 총살될 텐데 좋을 리가 있소? 젠장.” 마오는 더욱 친근하게 “쉬 사단장, 요 며칠 고생이 많소. 오늘 내가 당중앙을 대표해서 왔소. 당신하고 4방면군 동지들에게 사과하려고 온 것이오.” 그러더니 마오쩌둥은 팔각모를 벗고 쉬스유에게 세 번 절하는 것이었다.

캉위에 앉아있는 쉬스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당신이 우리를 잡아 가두라고 명령하지 않았소. 지금 사과해서 뭘 어쩌려는 거요?” 하고 물었다. 쉬스유는 그동안 고통을 받을 만큼 받은데다 부인까지 이혼하자고 하니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마오쩌둥이야말로 그 모든 일의 원인이 아닌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쉬스유는 갑자기 갱에서 일어나 주먹을 휘둘러 마오쩌둥의 얼굴을 때렸다. 그때 경호를 맡고 있던 뤄루이칭(羅瑞卿)이 깜짝 놀라 마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경호원들이 쉬스유를 꼼짝 못하게 붙잡았다. 붙잡힌 쉬스유는 대신 마오쩌둥에게 소리 질렀다. “때리든지 죽이든지 하나도 겁 안난다. 목을 치려면 쳐라. 마오쩌둥 당신 뭐하는 사람이냐? 내가 총이 있으면 당신을 쏘지 못할 줄 아는가?” 마오쩌둥도 화가 났다. 쉬스유를 살려주고 싶어 찾아 갔으나 주먹세례를 받고 곧 자리를 떴다. 쉬스유가 아무리 담이 크기로 중공 중앙 주석인 마오쩌둥을 주먹으로 쳤으니 소문이 금방 퍼졌다. 당 중앙은 신속하게 결정했다. “쉬스유는 즉시 총살할 것”

처형할 날이 다가왔다. 집행대원이 쉬스유의 감방문을 열었다. 집행관인 캉성(康生)이 쉬스유에게 말했다. “이것이 집행 문건이다. 서명하라.” 쉬스유는 문건을 받더니 힐끗 보고 말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나 쉬스유는 수없이 싸운 사람이다.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일이 없다. 지금 죽으러 가는데 마오쩌둥을 한 번 더 봤으면 한다.” “무엇 때문인가?” 캉성이 물으니 “나는 그와 따질 게 있다. 가서 전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서명하지 않는다.” 그후 쉬스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행대원인 장밍이(張明義)가 말을 타고 마오쩌둥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그때 중앙이 쉬스유를 총살하기로 했지만 마오쩌둥은 여전히 그를 살려주고 싶었다. 그가 일시적 충동으로 그를 때리려 했지만 보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쉬스유는 4방면군 출신이었다. 장궈타오와 관계가 매우 깊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쉬스유를 잘 알지 못했지만 쉬샹첸은 “쉬스유는 어떤 일이라도 감당할 만한 사람이다. 경솔하기는 하지만 용감하고 항상 자신감이 넘친다. 독단적이고 교양이 없어서 그렇지 의기가 충천한 농민영웅이다.”하고 평하였다. 농민 출신인 마오쩌둥은 그 말을 듣고 쉬스유를 더 좋게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행대원 장명이가 캉성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마오 주석이 쉬스유를 보기로 했습니다.” 쉬스유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게 또 무슨 음모냐’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마오쩌둥의 본심이나 알아보자고 생각했다. 그는 캉성에게 “마오쩌둥이 나를 보겠다니 고맙게 받겠소. 귀찮지만 다시 한 가지 청하겠소. 나 쉬가가 그래도 홍군 사단장이오. 총을 차고 가면 안되겠소?” 쉬스유의 말을 듣고 캉성은 어이가 없었다. 등에 식은 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때 마침 마오쩌둥이 캉성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쉬스유를 총살하면 안 된다. 집행명령을 취소한다.” 마오는 다시 캉성에게 “쉬스유에게 총을 차고 접견할 것을 허락한다. 총에 장전해도 좋다.”고 지시했다.

홍군 경호국장인 뤄루이칭이 쉬스유의 모젤총에 총알을 잰 다음 쉬스유에게 건넸다. 쉬스유와 경호원들이 마오쩌둥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쉬스유가 갑자기 마오쩌둥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주석,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더니 눈물이 샘솟 듯하며 펑펑 우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웃으며 걸어오더니 쉬스유를 부축해 일으켰다. “쉬 사단장, 우리는 때리지 않으면 사귈 수 없는 거요?” 하고 물었다. “주석, 사죄드립니다.” 쉬스유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마오쩌둥은 “쉬 사단장, 당신을 이제 알았소. 당신 성격 참 좋아요. 문무로 천하를 다스린다면 나 마오쩌둥은 문인이오. 당신 같은 무장이 없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소?” 쉬스유는 비로소 허리를 꼿꼿히 펴더니 마오쩌둥에게 맹세했다. “저는 당신에게 맹세합니다. 앞으로 당신이 한마디만 하면 칼산 불바다라도 뛰어들겠습니다. 저 쉬스유 절대 무섭지 않습니다.” 마오쩌둥이 엄숙하게 “앞으로 어렵고 힘든 일만 시키겠소. 돌아가 내 명령을 받을 준비를 하시오.”하고 대꾸했다. 쉬스유는 차렷 자세로 “네!”하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서로 한바탕 웃고 쉬스유는 신이 나서 갔다.

이런 일화를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쉬스유가 특이한 인물이니 일화가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같이 영향력이 큰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지어낸 이야기가 많은 듯 하다. 다음 기록으로 판단을 대신하고자 한다.

무술 시범을 보여주는 쉬스유

마오와 쉬스유. 이후 광저우 사령관으로 린비아오 쿠데타 저지의 핵심 기반

쉬스유는 1937년 반혁명 집단으로 몰려 처분을 당할 뻔한 위기가 있었다. 당시 중공 중앙이 장정을 마치고 섬북 바오안에 막 자리잡았을 무렵이었다. 쉬스유는 류스무(劉世模), 홍쉐즈(洪學智), 왕젠안(王建安) 등과 함께 무장 탈주하려고 하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들 가운데 왕젠안이 태도를 바꿔 제보했는데 쉬스유가 이 음모를 이끌었다는 것이었다. 중공 중앙은 이 사건을 “중국 공산당과 공농 홍군을 분열시키는 음모”로 규정했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공 중앙은 이 ‘반당반혁명 사건’에 대하여 처분하고 재판했는데 쉬스유를 비롯한 주동자들은 징역 1년반, 공민권 정지 1년의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은 쉬스유등이 억울하게 몰린 측면이 있었다.

1935년 홍색수도인 루이진을 탈출하여 장정 중이던 마오쩌둥은 쓰촨성에서 장궈타오가 인솔한 4방면군과 합류하였다. 이때 북상 항일을 주장하는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공 중앙과 쓰촨성에 근거지를 건설하자는 장궈타오의 4방면군과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은 장궈타오와의 충돌을 우려하여 마오쩌둥과 당중앙, 그리고 1방면군만 섬북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자 장궈타오는 쓰촨성에서 스스로 “중공중앙”을 창건하고 자신이 “임시 중앙주석”을 맡았다. 장궈타오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보구, 장원텐을 제명하고 예젠잉, 양상쿤등의 직무를 박탈하였다. 그러나 4방면군은 국군의 토벌로 신장성 우루무치까지 전전하며 몰린 끝에 병력 대부분을 잃고 몰락하게 되었다. 장궈타오는 8만명의 부대원 중 대부분을 잃고 1만명을 이끌고 섬북의 공산당 근거지인 바오안에 도착하였다.

1937년 중공 중앙은 회의를 열어 장궈타오의 잘못을 비판하였고 장도 ‘나의 잘못’이라는 자기비판서를 써서 제출하였다. 이 회의에서 장궈타오의 부하이던 쉬스유를 비롯한 지휘관들에 대한 비판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 회의에서 쉬스유 등 4방면군 일부 지휘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이 제기되었다.

  1. 홍 4방면군은 토비이다.
  2. 홍 4방면군 간부들은 군벌이다.
  3. 홍 4방면군 간부들은 장궈타오에게 매수되었다.

당시 옌안에 있던 마오의 부대원들은 장궈타오의 4방면군을 매우 고깝게 보았다. 장궈타오와 쉬스유 등 주요 간부들을 “중국의 트로츠키이자 토비이며 중앙에 반항한 것”으로 보았다. 이 소식을 들은 쉬스유는 분통이 터져 피를 토하며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다. 류스무(劉世模)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하려고 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쉬스유는 병이 나은 뒤 장궈타오의 부하들과 연락하여 쓰촨으로 탈주하려고 하였다. 쓰촨성에서 유격전을 펼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왕젠안이 생각을 바꿔 당시 항일 군정대학 교장이던 린비아오에게 보고하여 사실이 마오쩌둥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마오는 즉시 병력을 보내어 쉬스유 등을 잡아와 심문하였으며 이 사건을 ‘쉬스유 등 반혁명 집단 사건’으로 규정하였다. 쉬스유는 붙잡힌 뒤에 왕젠안을 배반자라고 욕했으며 서로 외면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쨌든 관련자들은 모두 재판을 받고 사형 등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당내 단결과 지휘 재능 등을 아껴 “관대하게 처분토록”하여 징역 등으로 형을 낮췄다. 그리고 대부분 홍군 지휘관등으로 다시 등용하였다. 이런 사건이 있은 뒤 장궈타오는 섬북의 해방구를 탈출하여 장제스에게 귀순하였다.

1949년 신중국 건립 후 홍쉐즈가 이 판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는 “내가 왜 잡혀가야 했는가? 누구도 나에게 말해준 이가 없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조직적으로 도망치다 미수에 그쳤으며 다른 조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4방면군을 총지휘했던 쉬샹첸(徐向前)도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사실 이 사건은 관련자들에게 억울한 사건이다. 장궈타오 노선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고 괴로운 일이 많았다. 이 사건 처리에 강한 불만들이 있었다. 쉬스유 등은 옌안에 남지 않고 악예환(후베이, 허난, 안후이)나 천섬(쓰촨, 섬서) 근거지에서 유격전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반혁명 사건’으로 만들어 보고했는지 모르겠다.”

실은 항일군정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쉬스유 등이 장궈타오와 휘하 일부 지휘관들의 분열적 행위를 비판 받을 때 강렬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장궈타오나 자신들을 토비나 군벌 등으로 규정하니까 감정적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시방석 같은 옌안을 떠나 유격전을 하자고 모의했던 것이다. 쉬스유는 매우 충직한 인물로 나중에는 마오쩌둥과 당 중앙에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마오쩌둥도 장궈타오와 얽힌 구원을 털어 버리고 이들을 중용하여 항일전과 내전에서 크게 활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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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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