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반격과 토지개혁
[국공내전 ㉖] 마오쩌둥, 해방전쟁 2년차의 '전략방침’ 수립하다.
    2019년 05월 16일 04: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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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㉕] 섬북의 싸움, 전환점 넘다

내전이 발발한 지 어느새 일 년이 지났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공산당은 어느새 전세를 만회하여 팽팽한 대치상태를 만들어 내었다. 1947년 7월이 되자 공산당은 섬북, 산둥, 허난 등 주요한 지역에서 잇따라 승리했으며 동북에서도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병력이나 무기 등 전체적인 군사력에서 국민정부 쪽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였다. 1947년 7월, 해방군은 작전부대 90만명, 지방부대 60만명, 그리고 군사 및 당조직에 40만명 등 총병력 190만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군은 해방군의 두 배인 380만명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국군은 정예병력이 100만명 가까이 섬멸당하여 상당한 숫자가 새로 징집한 신병이었다.

전쟁의 주도권은 이미 공산당이 쥐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여전히 섬북에서 후쫑난 부대의 추격에 쫓기고 있었지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의 진기로예 해방군을 따베산으로 진격하게 하고, 천겅과 세푸즈의 집단군과 천이와 쑤위의 대군을 중원으로 진출시킨 것은 이런 자신감에 근거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의 모험에 가까운 작전들이 성공하자 해방군의 사기도 크게 고무되었다.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은 이런 상황에 힘입어 더욱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게 된다.

중공 중앙 토지개혁 운동으로 농민의 지지를 얻다

1947년 9월 1일, 중공 중앙은 당 간부들에게 ‘해방전쟁 2년의 전략방침’ 지시를 발송하였다. 이 지시에서 마오쩌둥은 해방군의 2년차 작전임무를 명확히 지적하였다. “전국적 반격을 실시한다. 주력은 외선작전으로 전쟁을 국민당 통치지역으로 끌고 가라. 외선에서 적을 대거 섬멸하라. 주력 일부와 지방부대는 계속 내선작전을 견지하여 적을 섬멸하고 실지를 회복하라.” 마오와 중공중앙은 또 “기회를 잘 포착하여 더 많은 승리를 거둬야 한다. 군중을 쟁취하는 정책을 견결히 집행해야 한다. 광범위한 군중이 이익을 얻도록 하여 아군의 편에 서게 하라.” 고 지시하였다.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한 공산당에게 군중의 광범위한 이익이란 곧 토지개혁을 말하는 것이었다.

전쟁 2년차 전략방침을 담은 마오쩌둥 선집 4권

1947년 7월 17일에서 9월 13일까지 중공 중앙공작위원회는 허베이성 핑산현(平山县) 시바이포 마을(西柏坡村)에서 전국 토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중공 중앙위원회 서기인 류샤오치가 주재하였다. 공산당은 회의를 통해 1946년 ‘5·4지시’에서 발포한 토지개혁 경험을 총괄하고 ‘중국 토지법 대강’을 제정하였다. 중국 토지법 대강의 기본원칙은 다음과 같다. “봉건적이거나 반봉건적인 토지제도를 철폐하고 경자유전의 토지제도를 실시한다. 토지개혁 이전의 노동인민의 채무를 폐지한다.”

토지를 균분하는 방법과 부농의 남는 토지재산을 징수하는 정책도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대부분이 소작농이거나 빈농인 중국 농민에게 이러한 조치는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토지개혁 운동으로 농촌의 민심은 공산당에게로 급속히 기울게 되었다. 전쟁 초기 국민정부 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할 때는 아무리 좋은 선전도 효과를 보기 힘들었다. 심정적으로 동조한다 하여도 감히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공산당이 전세를 만회하여 팽팽한 대치국면을 만들어내자 상황이 달라졌다. 중공 중앙은 토지개혁에서 중농까지 배척했던 일부 좌경적 오류를 바로잡아 대지주를 고립시키기로 하였다.

경자유전 토지개혁에 기뻐하는 농민들의 모습

부착된 토지개혁법(왼쪽) 공산당이 발포한 토지개혁법을 보는 농민들(오른쪽)

토지개혁 운동은 농민들이 대거 참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농촌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전쟁에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8월부터 10월까지 3개월간 해방구 농민 중 30만명 이상이 인민해방군으로 입대하였다. 내전기간 동안 산둥성 해방구에서만 58만명이 새로 해방군에 입대하였다. 식량의 모집, 전선 지원에서도 농민들은 해방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우마차, 손수레, 멜대와 담가 등 원시적인 수단이었지만 농민들의 전선 지원은 해방군이 먼거리 보급을 하지 않고도 싸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전쟁 초기 8개월 동안 허베이, 산둥, 허난성 해방구에서 120만명의 노무자가 전선 지원에 동원되었다. 나중에 벌어질 화이하이 전투에서는 무려 500만명의 노무자가 동원되었다. 이런 동원은 강제적인 징발로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토지개혁운동으로 땅을 가지게 된 농민들의 심정적 지지가 바탕이 된 것이었다. 그들은 공산당이 승리하는 것이 새로 얻은 자신의 땅을 지키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장제스는 왜 패배하였는가>라는 책을 쓴 미국학자 이스트먼(Lioyd E Eastman)은 이렇게 썼다. “국민당이 농촌에서 실패한 것은 무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농민의 토지, 먹을 것은 물론 안전을 책임지지 못하였다. 그 결과 농민들은 정부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 버렸다. 국민당은 오히려 갖가지 잡세를 거뒀으며 지주에게 반대하는 농민을 적대시하였다.” 이스트먼은 또 “공산당 지역에서 농민들은 여전히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점차 협력하는 쪽으로 기울어 갔다. 먼저 청년들이 공산당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제 토지법을 제정하여 토지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자 지주들의 정치경제적 기반은 더욱 약화되었다. 지주나 부농들의 토지는 몰수되었으며 재산은 모두 빈농과 중농들에게 재분배되었다. 해방구 농민들은 토지 총면적의 95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국민당의 약화로 연결되었다. 국민당은 대도시의 자본가들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대지주들은 국민당을 구성하고 있는 군벌들의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정부 ‘반란평정 동원과 헌정실시 완성 강령’ 공포

공산당이 농민들의 지지를 강화하기 위해 토지개혁에 골몰하는 동안 국민정부는 통치지역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그동안 학생시위나 노동자 파업 등을 무력으로 진압해 왔으며 민주동맹 인사들을 탄압해 왔다. 장제스는 시위나 파업, 민주동맹의 행동이 모두 공산당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47년 7월 18일, 국민정부는 ‘반란평정 동원과 헌정 실시 완성을 위한 강령’을 공포하였다. 7월 4일, 장제스는 “전국 총동원과 공비 반란 평정, 민주 장애 제거와 예정된 헌정의 실행 및 관철을 위한 평화건국방침”을 제출하였다. 이 방침은 국민정부 국무회의에서 바로 통과되었다. 장제스는 이어서 ‘공비 반란평정을 위한 총동원령’을 발포하였다. 7월 18일, 국민정부는 더 나아가 ‘반란 평정 동원과 헌정 완성을 위한 실시요강’ 18개 조항을 공포 시행하였다. 이 요강은 반란 평정에 필요한 병력, 노무제공 및 기타 관련 인력을 규정하고 있다. 동원에는 적극 응해야 하며, 이것을 피하거나 방해하는 자는 의법 처리할 것을 규정하였다.

또 반란 평정에 필요한 군량, 피복, 약품, 기름, 석탄, 강철, 운수, 통신기재 및 기타 군용물자의 동원에 적극 응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일용품의 가격, 각 업종의 임금 및 물자유통, 자금운용, 금융업무에 모두 제한을 두거나 관리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태업, 파업, 조업정지, 폐업 등 기타 생산 및 사회질서를 방해하는 자도 의법 처리하도록 규정하였다. 반란 선동을 위한 집회 및 언론행위도 모두 금지되었다. 이로써 국민정부는 정치 및 군사는 물론 사회분위기를 전시체제로 완전히 전환하였다.

한편 국민정부는 7월 15일, 국민대회 각 성대표 명단을 공포했다. 국민정부는 헌법실행 국민대회를 단독으로 처리하기 위해 7월 9일 정치협상회의 명의 및 정협 비서처 등 조직 폐지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7월 15일에 정식으로 국민당이 독자적으로 확정한 각 성대표 명단을 확정 공포하였다. 명단에 포함된 인사는 총 2,164명이었으며 티벳, 몽골과 각 민족대표도 포함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중공 국민대회 대표를 취소했으며 참정원에서도 제외시켰다. 국민정부는 10월 마침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민주동맹을 불법화하여 전시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국민정부 통치지역에서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이 여전히 일어났다. 1947년 7월 22일 쉬저우에서 학생시위가 일어나자 국민정부 경찰과 특무기구가 강경진압에 나섰다. 400여명의 학생들이 쉬저우 역에서 열차를 타고 난징으로 가 청원을 하려 하였으나 군경이 강제진압에 나선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학생 7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40여명이 체포를 당했다. 100여명이 실종되어 국민정부의 폭압적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1947년 9월 23일에는 상하이 전력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에 들어갔다. 27일에는 전차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국민당은 파업에 들어가기 전인 9월 19일, 상해 노동자협회와 노동조합을 수색하여 선전물을 압수해 갔다. 그리고 상해전력 노동조합 간부들을 체포했지만 노동자들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2,000여 노동자들은 감연히 파업에 나서 국민당 사회국을 포위하고 청원에 나섰다. 국민당은 상하이 전력 노동조합과 지역 노동조합들에 대한 공격을 통해 파업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산당 상하이 지부가 전차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는 등 행동에 나서자 백화점, 방직, 기계판매 노동자들이 잇따라 파업하며 연대투쟁에 나섰다. 파업이 7일 동안 유지되자 국민당은 부득이 노동운동 탄압을 잠시 멈추게 되었다. 이로써 국민정부의 위신은 더욱 떨어지게 되었으며 노동자와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3대 기율과 8항주의

<3대 기율의 노래>

첫째는요, 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르지요.
발걸음 일치하면 승리할 수 있답니다.

둘째는요, 군중에게서 바늘 하나 실 한오라기라도 가져오면 안되지요.
군중들이 우리를 옹호하고 좋아한답니다.

셋째는요, 모든 노획물은 공용으로 하지요.
인민의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3대 기율은 바로 우리가 만든 답니다.

<8항주의를 잊지 말자. 노래>

하나, 말은 부드럽게, 군중들을 존중하자. 거만하면 안 됩니다.
둘, 물건을 사면 공정한 값을, 힘으로 강탈하면 절대 안 돼.
셋, 빌린 물건은 돌려주자. 손해를 주면 절대 안 돼.
넷, 부서진 물건은 배상해요, 배상액은 제값으로.
다섯, 때리거나 욕하면 절대 안 돼, 군벌의 버릇은 반드시 고칩니다.
여섯, 농민의 작물을 사랑합시다. 행군이나 작전 때는 조심 또 조심
일곱, 부녀자를 희롱하면 큰일 납니다. 우리는 불량배가 아니니까요.
여덟, 포로 학대는 절대 안 돼, 때려도 안 돼. 호주머니를 뒤지면 더 안 되네.

기율을 준수하자. 우리 모두 각성하자.
서로 서로 감독하고 위반은 절대 금지
혁명기율 조항들을 우리 모두 기억하자.
전사들은 곳곳에서 인민들을 사랑하세.
조국을 보위하고 영원히 전진하자.
전국의 인민들이 우리를 사랑하네. 우리를 환영하네.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만들어 부르던 ‘3대기율, 8항주의’ 노래이다. 1947년 10월 10일,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해방군 총사령부가 3대기율 8항주의를 재차 반포할 것에 대한 훈령’을 기초하였다. 이때부터 ‘3대기율, 8항주의’는 전군의 통일된 기율이 되었다. 인민해방군의 이런 기풍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1927년 중국 공농홍군이 탄생한 무렵부터 비슷한 내용의 기율을 제정하고 차츰 강화하여 왔던 것이다. 홍군이 막 성립했을 때 부대는 그야말로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 1927년 9월, 마오쩌둥이 상감(후난성 간저우)변구에서 기의부대를 이끌고 싼완(三湾)에 이르렀을 때는 고구마를 수확하던 계절이었다. 마오는 병사들을 시켜 고구마 수확을 돕게 하였는데 어떤 병사들이 그 곳의 고구마를 먹었다. 마을에서 불만을 표시하자 마오쩌둥은 부대에 백성들의 고구마를 한 개라도 먹으면 안 된다는 기율을 정했다. 얼마 되지 않아 마오의 부대가 후난성 차링(茶陵)에 도착하여 자금을 조달하였다. 토호를 칠 때 어떤 병사들이 몰수한 재물을 자신들이 가졌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토호의 재물을 공용으로 한다는 규율을 정했다.

1928년 1월, 홍군 부대가 후난성 쑤이촨에서 군중을 움직여 자금을 조달할 때였다. 부대는 중대 및 소대별로 군중과 광범위하게 접촉했다. 그때 군중에게 손해를 입히는 일이 발생했다. 마오쩌둥은 사실을 확인한 뒤 다시 문짝을 달아주고 작물이나 곡식을 밟지 말라는 6대 주의사항을 정했다. 같은 해 3월, 부대가 후난성 남부 근거지에서 활동할 때 기율을 더 강화하였다. 4월초, 마오쩌둥은 구이둥(桂東)현 샤텐(沙田)에서 과거에 정한 기율과 주의사항을 종합하여 간단하게 수정 보완하였다. 그때 정식으로 ‘3조 기율, 6항 주의’를 선포하였다.

‘3조 기율’은 1.노동자, 농민, 소상인으로부터 물건 하나도 가져오지 않는다. 2.토호에게 빼앗은 물건은 공용으로 한다. 3.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른다. ‘6항 주의’는 1. 사용한 문짝을 달아준다. 2.작물이나 곡식을 밟지 않는다. 3.말을 온화하게 한다. 4.매매는 공평하게 한다. 5.빌린 물건은 돌려준다. 6.파손한 물건은 배상한다고 정하였다. 마오쩌둥과 홍군이 정한 이런 규율은 유격전을 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농민의 지지를 받지 않으면 소규모 유격부대가 확대되기는커녕 잠시도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31년에는 홍1방면군의 3대 기율을 전군 및 지방부대의 기율로 하였다.

중공 지도부가 정한 인민 해방군의 ‘3대 기율, 8항주의’은 다음과 같다.

3대 기율

  1. 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른다.
  2. 민중들에게 바늘 한 개라도 가져오지 않는다.
  3. 모든 노획물은 공용으로 한다.

8항 주의

  1. 말을 온화하게 한다.
  2. 물건을 사고 팔때는 공정하게 한다.
  3. 빌린 물건은 반드시 돌려준다.
  4. 파손된 물건은 배상한다.
  5. 사람을 때리거나 욕해서는 안된다.
  6. 농작물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7. 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8. 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

<당정간부의 ‘3대 기율, 8항 주의’>

3대 기율

  1. 모든 일은 실제에서 출발한다.
  2. 당의 정책을 정확하게 집행한다.
  3. 민주집중제를 실행한다.

8항 주의

  1. 함께 노동하고 함께 식당을 쓴다.
  2. 사람에게 온화하게 대한다.
  3. 일을 공정하게 처리한다.
  4. 매매를 공평하게 한다.
  5. 정황을 성실하게 반영한다.
  6. 정치적 수준을 제고한다.
  7. 군중과 상의하여 결정한다.
  8. 조사 없이 발언권 없다.

이와 같은 3개 기율, 8항주의는 홍군 및 해방군이 군벌 및 국민당 부대의 행동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 되었다. 해방군은 이와 같은 규을을 비교적 철저하게 지켰다. 내전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상하이 점령 때에도 해방군은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모습을 보여 자신들의 규율이 결코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따볘산을 둘러싼 공방

마오쩌둥은 후쫑난 부대의 추격에 따른 피난길에서 류덩 대군의 따베산 도착 소식을 들었다. 1947년 8월 27일의 일이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웅대한 반격작전이 성공한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 하지만 그곳은 국민정부의 통치구역 한복판이었다. 국군의 의표를 찔렀다고는 하나 해방군이 살아남을지 여부는 오로지 자신과 공산당의 정확한 방침에 달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현지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지휘관들의 판단과 능력이 가장 중요했다.

빨간 표시가 따렌산. 박스 안은 큰 지도 속에서의 위치

따베산에서 행군 중인 인민해방군

따베산에 진입한 뒤 정치위원을 맡고 있던 덩샤오핑은 여러 문제들을 인식하였다. 지방정권을 세우고, 따베산 근거지를 새로 건립하고, 지방공작에서 눈에 띄는 성적을 거뒀음에도 여전히 문제들이 존재하였다. 부대의 사기가 떨어지고 근거지 건립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며 앞으로 싸울 일을 걱정하였다. 1947년 9월 27일-29일 덩샤오핑은 허난성 신양시(信阳市) 광산현(光山县) 왕따완(王大湾)에서 여단장 이상의 고급간부들을 불러 이른바 ‘왕따완 회의’를 열었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따베산에서 국군의 포위토벌에 맞서 두 가지 방침을 확정했다. 즉 “인민들을 우리 편에 서게 하고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한다.”는 것이었다.

류덩의 부대는 10월 8일에서 11일까지 안후이성 장자덴(張家店)에서 국군과 싸워 5,600명을 섬멸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러자 중공 중앙은 10월 10일 ‘중국 인민해방군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놓고 “장제스를 타도하고 전 중국을 해방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3대 기율 및 8개 주의사항 조례’를 발표하고 ‘중국 토지법 대강’을 선포하였다. 모두 중국의 민중들을 공산당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 공세였다.

1947년 10월 27일, 류덩 부대는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뒀다. 해방군은 지형을 이용하여 17개 연대 병력으로 후베이성 동부 치춘현(蕲春县)에서 자루 모양의 매복 진형을 펼쳤다. 국군을 유인하여 까오산푸(高山铺)에서 1만 2600여명을 섬멸하니 이것이 까오산푸 전투이다. 이 승리로 섬북에서 노심초사하던 마오쩌둥도 한숨을 돌렸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에게 “까오산푸 대첩에서 적을 1만명 이상 섬멸하였으니 참으로 잘 싸웠소. 아군이 따베산에서 대병단 작전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오. 류덩이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겠소.”하고 평가하였다.

따베산의 생활

1947년 11월에서 12월 말까지 류덩 대군은 따베산에서 후방이 없는 전투를 해야 했다. 때는 겨울이어서 춥기 그지없고 조금 푸근하면 눈이 왔다. 부대원들은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에 시달렸다. 부대원들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북방 출신이었다. 남방인 따베산은 지형과 기후는 물론 풍습까지 모두 딴판이었다.

해방군 대대의 지도원 한 명은 이렇게 술회했다. “산에는 모기가 많았어요. 이름을 알 수 없는 등에도 있어서 한번 자리에 앉으면 얼굴, 목, 팔은 물론 배까지 가리지 않고 물거나 찔렀지요. 온몸이 가려워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나는 쉴 때면 홑이불을 머리까지 덮어 썼지요. 그래도 모기가 뚫고 들어와 찔러댔습니다. 어느 동지가 “모기가 살이 쪄서 세 마리면 볶아서 요리할 수 있다.”고 농담할 정도였지요. 북방 사람들은 물소를 본 적이 없었어요. 덩치가 엄청난데 눈도 화등잔만 해서 모두 괴물이라고 무서워했죠.. 멀리 물소가 보이면 감히 접근할 생각도 할 수 없었으니까요. 우리 대대에 꼬마가 있었는데 어느 마을에 갔다가 담 모퉁이에서 누워있는 물소를 밟았어요. 물소가 음메 하며 일어서 꼬마를 보자 기절초풍해서 울며 달아났습니다. 밤에 우리는 볏짚 위에서 잤습니다. 그런데 남방에는 뱀이 어찌나 많은지 볏짚 속에도 들어 있어 전사들이 기절초풍하곤 했지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자 그럭저럭 남방의 풍습에 익숙해졌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근거지 확대에 골몰했다. 2개 종대 병력을 안후이 서부와 후베이 동부로 진출시켜 군중을 조직하고, 지방부대와 지방정권을 세워 나갔다.

1947년 11월 초까지 류덩 대군은 국군 정규군 3만명 이상을 섬멸했을 뿐 아니라 지방 보안단 2,700여명을 섬멸하였다. 23개 현성을 점령하였으며 33개 지방정권을 세웠다. 12월 중순, 류덩 대군은 따베산 진격작전을 마무리했다. 1948년 1월 15일,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게 전문을 보냈다. “우리는 이미 자리를 잡았습니다. 상황이 엄중하지만 적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마오쩌둥은 이 전보를 받고 “당신들은 전략적 반격을 실행하였다. 위대한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칭찬하였다.

따베산의 해방군 지도부 유화. 안경낀 이가 류보청. 그옆이 덩샤오핑이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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