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에게 사랑받는 문학의 거장"
    2006년 07월 10일 07: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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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7일 프랑스의 모든 학교 교실에서는 대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의 시가 일제히 낭송됐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에 걸친 2주간의 노엘방학을 마친 프랑스의 모든 초·중·고교 학생들이 이날 새해 첫 수업을 빅토르 위고의 시를 읽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는 프랑스 교육당국이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빅토르 위고가 태어난 지 2백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새해 첫 수업시간에 교과목에 관계없이 위고의 시를 읽을 것을 권장했기 때문이었다.

자끄 랑 당시 교육부 장관도 이날 파리의 달랑베르 초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1853년 위고가 쓴 서사시인 <징벌시집>(Les Chatiments)의 한 구절을 암송해줬다.

우리에겐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1862)과 <파리의 노르트담>(Notre-Dame de Paris, 1831)의 작가 정도로 알려진 위고는 프랑스인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문인이다.

시낭송뿐 아니라 그해 프랑스에서는 2월26일 빅토르 위고 탄생 2백주년을 전후해 심포지움, 연극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는 것을 비롯해 한해 내내 위고 관련 행사가 진행됐다.

   
 
 

그가 이처럼 프랑스인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 것은 문학적인 업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혁명의 세기라 불릴 정도로 격동적이었던 19세기 프랑스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빅토르 위고의 83년 긴 생애에서 문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그가 추구했던 사회진보에의 열망은 프랑스인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있다.

"레 미제라블, 현실에서 그린 지옥"

특히 그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은 발표될 당시부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주머니를 털어 조금씩 모은 돈으로 책을 사서 돌려본 이래로 빅토르 위고는 특히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왔다.

<레 미제라블>은 위고의 인간애와 사회진보에의 열망을 담은 대표작이었지만 동시대의 작가와 비평가들에게는 혹독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플로베르는 "의도적으로 부정확하고 저속한 문체로 쓰여졌다"고 비난했고 보들레르는 "추잡하고 하찮은 책"이라고 악평을 했다.

하지만 프랑스 문학 특유의 고상하고 귀족적인 문체를 배제하고 실제 파리 하층계급이 쓰는 일상언어와 실감나는 표현과 어휘로 쓰여진 이 작품은 19세기 문학의 대중적인 성공 사례로 꼽혔고 "주머니에 12프랑이 있으면 노동자들은 이 책을 샀고 제비뽑기로 읽는 순서를 정했"을 정도로 당시 노동자들에게 인기였다.

‘레 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위고가 1845년부터 구상했던 것으로 가장 연약한 자들의 비참함, 노인들의 궁핍, 굶주린 아이들의 참상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대중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1830년대 파리의 현실을 그린 이 작품에 대해 위고는 "단테가 시에서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내려 했다"고 말했다.

나폴레옹, 위험인물로 분류

빅토르 위고는 1802년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휘하 장군이었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 출신이었다. 위고는 유년 시절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할 수 있었다.

아버지 레오폴은 아들을 군인으로 키우고 싶어 했으나 빅토르 위고의 관심은 이미 문학으로 향해 있었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1817년 15살의 나이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문학 경시대회 시부문에 입상하면서 증명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와 소설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 그는 1819년 형 아베르와 함께 <문학 수호자>라는 잡지를 창간한 이후 소설과 시집을 출간하며 파리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문학적인 명성을 높여가기 시작한 20대때 그의 정치적 성향은 민주주의와 자유 왕정제 사이에서 맴돌고 있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이후 1830년까지 계속된 왕정복고시기에 그는 검열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으며 ‘레지스탕스’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1830년 7월 혁명이 성공한 후 샤를르 10세가 금지시켰던 그의 희곡 <마리옹 드 로름므>가 열광적인 분위기로 공연됐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이어졌던 이 ‘7월왕정’ 체제 하의 프랑스에서는 거의 매년 노동자와 학생들의 봉기가 이어졌고 이 혁명적인 분위기는 이후 빅토르 위고의 작품에 큰 영향이 끼치게 됐다.

1845년 <레 미제라블>를 집필하기 시작할 무렵 자유 왕정을 지지했던 위고는 루이 필립 왕의 측근이 돼 프랑스 상원의원에 임명되기도 했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보통선거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자 위고는 급진파 의원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2월 혁명으로 수립된 제2공화국은 반공화파인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위기를 맞게 됐다. 루이 나폴레옹은 교육을 교회에 종속시키는 팔루(Falloux)법을 선포하자 ‘교육의 자유에 대한 논설’을 발표하며 이에 맞섰던 위고는 결국 위험인물로 분류됐다.

1851년 12월 2일에 루이 나폴레옹은 군사를 동원한 쿠테타를 일으키고 사회주의자들이 꾸미는 음모를 타도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한다는 명분 하에 의회를 해산하고 빅토르 위고 등 급진파 의원들을 체포했다.

위고는 출옥 후 경찰의 눈을 피해 저항운동을 조직하다 벨기에로 망명했다. 이 기간동안 쓰여진 <징벌시집>은 정변을 일으켜 반동체제를 수립한 루이 나폴레옹을 꾸짖는 내용이었다. "사회주의자"임을 선언하고 반나폴레옹 투쟁을 벌인 위고는 1859년 나폴레옹 3세의 사면을 거부하고 게르느제 섬에 머물며 1848년 2월 혁명 이후 중단했던 <레 미제라블> 집필을 재개하는 등 작품활동에 몰두했다.

19세기 프랑스역사 온몸으로 부딪쳤던 꼬뮨전사의 벗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이후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그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파리 시민들은 그를 뜨겁게 맞이했다. 그리고 파리시민은 그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했다.

1871년 3월 파리꼬뮨 시기 그는 잠시 브뤼셀에 머무르고 있었다.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꼬뮨파의 편에 서있었고 벨기에에서도 파리의 동지들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위고는 파리꼬뮨이 진압된 후 벨기에로 도망 온 꼬뮨전사(꼬뮤나르드)들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지 않는 벨기에 정부에 항의하다 기피인물로 낙인찍힌 후 추방당했다.

룩셈부르크 등지를 떠돌다 1872년 파리에 정착한 위고는 망명시절 쓴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급진파 상원의원에 선출돼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만년을 보냈다. 1885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국민들은 성대한 장례의식을 베풀었으며 팡테옹까지의 운구행렬에는 수많은 애도인파가 몰렸다.

빅토르 위고의 생애는 제1제정, 왕정복고, 7월왕정, 제2공화국, 제2제정, 제3공화국으로 이어진 19세기 프랑스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억압체제에 저항하며 노동자계급과 꼬뮨전사의 편에 서고자 했던 그의 작품과 생애는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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