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천년 수도에서 관광 도시로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
    2019년 05월 14일 09: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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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군산 원도심, ‘식민의 기억’을 품은 도시

2016년 9월 대규모 지진으로 인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경주는 여전히 매력적인 관광지로 손꼽히는 도시이다. 경주가 매력적인 도시인 이유 중 하나는, 경주를 찾는 목적이 다양하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경주는 수학여행이나 답사로 대표되는 역사유적지는 물론 보문관광단지나 동궁원, 최근에 조성된 황리단길처럼 볼거리가 공존하는 곳이다. 석굴암과 불국사(1995년), 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양동마을(2010년) 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는 점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경주는 관광 도시로도 유명하지만, 신라의 수도였다는 점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수도와 관광 도시 사이에는 괴리감이 있어 보이지만, 경주가 9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수도였다는 점이 지금의 경주를 관광 도시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경주가 관광 도시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삼국시대 이후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경주는, 일제강점기에 왕릉이 발굴되면서 다시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박정희 정권기 관광 도시로서 또 한 번 도약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경주 – 관광도시의 시작

▲ 고적조사사업

1902년 세키노 타다시가 두 달 일정으로 한반도의 건축물을 조사하면서 고적조사사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세키노는 경주를 방문해 읍성, 월성, 분황사, 오릉, 불국사 등을 조사하였다. 1906년 9월에는 동경제국대학 이마니시 류가 경주를 방문해 사천왕사 터, 분황사, 월성 등지에서 기와와 문양이 있는 벽돌을 수집하였고 일부 고분을 조사하여 유물을 수습하였다.

1909년에는 세키노가 통감부 탁지부의 의뢰를 받아 궁전 ․ 성곽 ․ 관아 ․ 능묘 ․ 탑 ․ 불상 등의 종합적인 조사를 개시하였다. 이 조사는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1915년까지 이어졌다. 당시 조사를 기반으로 고적의 가치를 판단하여 갑~병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갑 ․ 을은 특별보호가 필요한 것, 병 ․ 정은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따라 경주의 건축물들도 분류가 되었는데, 향교 ․ 객사 ․ 숭덕전 ․ 불국사 ․ 백률사 대웅전이 ‘을’로 백률사 봉서루가 ‘병’으로 분류되었다. 더불어 이 때 불국사 청운교 ․ 백운교 ․ 다보탑 ․ 석가탑, 석굴암, 첨성대, 포석정, 분황사석탑, 태종무열왕릉비 등 이후 주요 관광자원이 된 유적이 조사되었다.

경주의 고적조사 현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지금도 경주의 대표적인 유적지 중 하나인 석굴암은 1913년 수리공사가 진행되었다. 최초 공사는 1915년 8월에 마무리되었지만 누수 및 결로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여 1917년, 1920년 등 몇 번의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불국사는 1918년 10월부터 수리 공사가 진행되었고, 1925년에는 다보탑을 전면 해체 수리하였다.

1909년에는 황남리, 서악리 고분이 조사되었고, 1911년에는 세키노 일행이 남산성지 ․ 명활산성지 ․ 흥덕왕릉 ․ 우러정교지 ․ 옥산서원 등지를 답사하였다. 1915년에는 경주 발굴이 집중적으로 실시되었다. 세키노의 주도로 황남리 대총과 황남리 대총이 발굴되었는데, 이 때 발굴로 돌무지덧널무덤의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밖에 보문리, 동천리, 서악리 등지의 고분군도 발굴되었다. 1921년에는 금관총이 발굴되면서 금관이 세상에 소개되었고, 이를 계기로 총독부에 고적조사과가 신설되어 총독부 박물관과 고적조사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1924년에는 금제 방울이 출토된 금령총과 금동신이 출토된 식리총이 발굴되었고, 1926년에는 서봉총이 발굴되었다. 1926년 5월 경주역 기관고 증설 공사를 위해 대량의 흙이 필요하였고, 노서리에 있는 가장 큰 봉분이었던 서봉총의 흙을 활용하기 위해 발굴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서봉총이라는 이름은 스웨덴(瑞典) 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하였고 이 고분에서 봉황 장식이 달린 금관이 출토되었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1930년대에는 조선고적연구회 주도로 고적조사가 진행되었다. 연구회는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경주연구소를 설치해 고적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시기에는 황남리 82 ․ 83호(1931년), 충효리 석실분(1932년), 황오리 54호(1933년), 황남리 109호 ․ 황오리 14호(1934년), 충효리 고분 ․ 황오리 고분(1936년) 등 기존과 마찬가지로 고분을 발굴하는 한편, 원원사지 석탑 복원(1931년), 장항리사지 석탑 재건(1932년), 낭산 능지탑 조사(1937년), 천군리사지 발굴(1938년) 등 불교유적에 대한 조사도 더불어 진행되었다. 그밖에도 1934년 5월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터 부근 언덕에서 임신서기석이 발견되었고, 1934년 9월에는 사정동 흥륜사지에서 출토된 인면와(人面瓦)가 출토되어 다나카라는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1972년 경주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이 기와가 신라의 미소로 알려진 암막새로, 2018년 보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한편, 고적조사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주의 고적보존사업을 돕고 고적을 보존, 전시하기 위해 1913년 5월 경주고적보존회가 창립되었다. 이 보존회는 기존에 이 지역의 고적을 조사, 보전하기 위해 설립된 ‘신라회’를 모태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보존회는 경상북도 장관을 회장으로 부회장 2명, 평의원과 간사를 임원으로 두고 재경주 일본인 고적 연구가와 일본인 상인들 등이 주도하였다. 보존회의 활동은 현지보존 사업과 수집보존 사업 등으로, 현지보존 사업이란 유적에 울타리를 치거나 안내판을 설치하는 것 등이며, 수집보존 사업은 유물의 훼손을 막기 위해 진열관을 설치하는 것 등이었다. 보존회가 1915년 만든 진열관에는 개인이 수집한 유물을 진열하였으며, 금관총이 발굴된 이후 금관총 출토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보존회를 주심으로 기부금을 내 1932년 금관총 출토 유물진열관을 기증하였다. 이 진열관은 1926년 6월 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승격되었다. 그밖에 보존회는『新羅舊都慶州古蹟圖彙』등 경주의 유적을 안내하는 책자를 만들기도 했다.

▲ 도시의 변화

고적조사사업과 더불어, 관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도시기반 설비도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철도 개통이다. 사설철도회사인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가 1916년 2월 15일 대구-경주-울산-동래, 경주-포항, 울산-장생포 사이의 경편철도(궤도 간 간격이 좁고 차량의 수가 적은 철도) 부설 허가를 받았다. 경주에 처음으로 개설된 노선은 서악-경주 구간으로, 1918년 12월 29일 운행개시를 인가받았다. 1919년 1월 14일 경주-불국사 구간 운행개시 인가를 받으면서 대구와 불국사 사이의 노선이 완성되었다.

경주역은 1918년 11월 1일 사정동 1-25번지(현재 서라벌문화회관)에 건설되었다. 당시 노선은 황남동, 황오동, 인왕동을 지나갔다. 그러다 1927년 7월 15일 선로와 역사를 확장하여 지금의 경주역 자리로 이전하기까지 사용되었다. 선로 및 역사가 확장된 것은 경주역이 서악역과 통합되었기 때문이었다. 1918년 경주역이 건설되었을 당시 대구-포항 열차는 경주역에 들리지 않고 서악역을 지나갔는데, 그 노선에서 경주 시내 방면으로 향하는 승객은 서악역에서 내려서 기차를 환승하거나 서악역에서 자동차로 경주 시내로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경주를 방문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런 방식이 불편하였고, 이에 서악역을 폐지하고 경주역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경주역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게 된 것은 1939년 12월 1일로, 1936년 부산-경주 사이에 동해남부선이 개통되면서 신축 이전하였다. 기존에 부설된 선로는 1943년까지 사용되다가 폐쇄하고 현재의 선로가 건설되었다.

[그림 1] 경주역. 출처 : 조선총독부, 『生活狀態調査』 慶州郡, 1934

철도 부설과 더불어, 기존 경주읍성 일대의 도로도 정비되었다. 연구에 따르면 도로망 정비는 네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기존의 경주 읍성 일대와 1918년 새로 건설된 경주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신설되었으며, 읍성 내부의 도로가 신설 및 정비되었다. 이 과정에서 읍성 성벽이 다수 철거되었고, 무열왕릉과 김인문묘, 안압지와 월성이 도로 개설로 인해 분리되기도 하였다. 그밖에 포항 등 경주 외부 지역과의 연결을 위환 도로 정비 등이 실시된 후 그 골격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읍성 성벽은 1912년 남문 철거를 시작으로 훼손된 것으로 추측된다. 11월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를 방문하였는데, 남문을 철거해야만 차를 타고 읍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5년에는 성벽을 관통한 신작로가 개통되었고, 1932년까지 대부분의 읍성이 철거되었다. 남아 있는 성벽은 읍성 동쪽 성벽 40~50m 정도뿐이었는데, 경주시에서 2014년부터 읍성 복원에 착수해 2018년 11월 동문인 향일문과 동쪽 성벽 324m 구간의 복원을 마치고 시민에게 개방하였다.

한편, 도로 정비와 더불어 1912년 8월 자동차 운수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대구와 경주 사이에 철도 노선이 부설되지 않았기에 대구에서 경주로 관광객을 운송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당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행되었다. 1921년 7월에는 경주와 포항을 오가는 운행노선이 개설되는 등 관광을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었고, 1930년대 이후에는 경주와 주변 도시 사이의 도로와 경주 내부의 관광지를 연결하는 도로가 정비되면서 철도와 자동차를 이용한 관광이 활성화되었다.

[그림 2] 경주 도심 부근 일대 지도.
출처 : 조선총독부, 『生活狀態調査』 慶州郡, 1934(왼쪽 지도), 카카오맵(오른쪽 지도)

철도, 도로 등의 기반시설 정비와 더불어, 경주 읍성 내부에 군청 ․ 경찰서 ․ 법원 등의 식민통치 기관들이 들어섰다. 경주 객사인 동경관의 동헌 일승각은 경주군청으로 사용되었고(1934년 객사부지로 신축이전), 객사는 경주공립보통학교 교실로 사용되었다. 1909년 7월에는 북부리에 일본인 소학교가 설립되었고, 1914년 11월에는 서부리에 일본불교 중 정토진종 본원사파 경주포교소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15년에는 조동종 포교소 설치를 신청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이후가 되면 일본인을 중심으로 경주 시내에서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증가하였다. 당시 경주 시내의 중심지는 본정통(本町通)으로, 현재의 봉황로 일대이다. 본정통을 중심으로 번화가가 형성되고 예전 읍성 내부에 조성되었던 군청 ․ 면사무소 ․ 시장 ․ 우편국 등 통치기반 시설들과 더불어 근대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 관광도시로서의 모습

경주는 1900년대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고적조사가 진행되었지만, 1920년대 금관이 발굴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경주가 관광 도시로서 각광을 받은 것은 1920년대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이 시기에는 고적조사와 더불어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한 고적 정비 ․ 보존 사업, 대외 홍보 등도 더해지면서 관광산업이 활발하였다.

경주의 관광자원이 고적과 유물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부여와 더불어 역사유적을 중점으로 한 테마관광이 성황이었다. 1931년 10월 말 경주 고적 방문객이 2만 명을 넘었고, 1935년 9월에는 4만여 명에 이르렀다. 역사라는 테마와 관련해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을 찾는 사람도 증가하였다. 분관이 개관한 다음 해인 1927년 조선인이 8,749명 방문하였으며, 1934년에는 25,265명으로 급증하였다. 경주분관은 조선인 방문객의 비율이 일본인 방문객보다 높았는데, 이는 수학여행 등 조선인 단체관람객의 방문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경주에서 활동하던 오쿠다는 그가 저술한『新羅舊都 慶州誌』에서 몇 가지 관광코스를 제시하였다. 크게 두 가지 안이 있다. 날짜별(2일~4일)로 돌아다니는 방법과 도로를 따라 4일 간 관람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그 외에 남산불상탐험, 왕릉 순회처럼 특정 주제를 정해서 돌아보는 방법도 있었다.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건립된 이후에는 관광의 출발지 또는 종착지 경주분관인 경우가 많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도로 정비에 따라 외부 도시와 경주 간 자동차 운수업이 시작되었는데, 고적을 돌아보는 유람용으로도 자동차가 이용되었다. 유람자동차는 1930년대 성행하였으며, 동부 ․ 서부 ․ 중부 코스로 운행되었다. 동부는 경주역 – 사면석불 – 백률사 – 표암 – 경주역 코스(1시간), 서부는 경주역 – 무열왕릉 – 경주역 코스(30분), 중부는 경주역 – 박물관 – 분황사 – 황룡사지 – 안압지 – 석빙고 – 첨성대 – 계림 – 오릉 – 포석정 – 경주역 코스(1시간 40분)였다.

한편, 경주가 관광 도시로 성장하면서 관광객을 위한 기반시설도 구축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숙소시설로, 읍내에는 안동여관, 월성여관 동도여관 등의 조선식 여관과 시바타여관, 아사히여관 등 일본식 여관이 있었고 불국사 근처에 불국사 호텔이 있었다. 불국사 호텔은 당시 대표적인 숙박시설이었다.

[그림 3] 불국사여관. 출처 : 조선총독부, 『生活狀態調査』 慶州郡, 1934

그밖에, 1934년 신라제(新羅祭)라는 행사가 기획되었다. 이는 신라의 발상을 재현하고 6부의 건국을 현창하는 행사로, 제전식(祭典式)과 더불어 선덕여왕을 기리는 행렬, 화랑단 행렬, 김유신 장군 출진 행렬 등과 궁술 ․ 체육 ․ 백일장 대회를 열었다. 신라제는 1940년까지 열리다 전쟁으로 중단되었으며, 1947년 다시 거행되었다가 1962년부터 ‘신라문화제’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2017년 현재 제45회 개최).

또 한 번의 도약 – 경주고도개발사업과 경주

▲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정소영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을 단장으로 1971년 6월 15일 실무작업반이 구성되었고, 1971년 8월 13일 최종 계획을 확정지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 개발을 구상한 계기는 일반적으로 1971년 6월 포항제철 고로 화입식에 참석했다가 상경하는 길에 경주를 방문해 관리되지 않는 고분군, 허물어져가는 불탑과 불상을 본 뒤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을 방문한 시기는 1973년 7월이었으므로 이는 맞지 않는 주장이다. 이보다 1969년 경주시에서「관광개발기본계획」이라는 이름의 종합개발계획을 만들었고, 이것이 2년 뒤의 계획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1971년 7월 13일 계획서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신라고도는 웅대, 찬란, 정교, 활달, 진취, 여유, 우아, 유현의 감(感)이 살아날 수 있도록 재개발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개발 대상지역 지정, 각 지구별 세부계획 및 문화재 ․ 사적 보수, 경주시 도시계획 ․ 도로개발계획 등에 대해 직접 지시하였다.

[그림 4]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지시사항. 출처 : 건설부,『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1971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핵심 내용은 고도(古都) 지역과 보문호(普門湖) 일대를 개발해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신시가지를 조성하며, 13개의 사적지구(토함산지구, 무령왕릉지구, 남산지구, 미추왕릉지구, 낭산지구, 괘릉지구, 명활산지구, 오릉지구, 월성지구, 김유신장군묘지구, 황룡사지지구, 문무대왕지구, 금강산지구)를 정비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만드는 것 등이었다.

개발 계획은 2단계로 진행되었다. 개발에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되는 만큼, 계획을 한 번에 진행시킬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처음 5년(1972년~1976년) 동안에는 경주시의 기반시설과 사적지구를 정비하고, 다음 5년(1977년~1981년) 동안에는 그 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문화관광도시로서 탈바꿈하고자 하였다.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재원이 필수적이었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IBRD가 1971년 유고슬라비아 관광 사업에 차관을 도입하는 등 1970년대 들어 관광 사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하였던 것이다. IBRD에 요청할 차관 금액은 2,394만 달러(89억 7,700만 원)로, 당시 정부가 사업에 필요한 예산으로 책정한 225억 7,100만 원의 40%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IBRD는 정부의 요청을 받고 1973년 4월 8일 평가조사단을 파견하여 예비조사를 실시했고, 같은 해 11월 5~9일 차관협정 최종 협의를 통해 차관 지원을 결정하였다. 차관 금액은 정부의 요청금액보다 많은 2,500만 달러였다. 더불어 차관집행기구로 경주관광기구를 설치할 것, 민간투자를 유치할 것, 보문지구 도로를 정비할 것 등의 사항을 요구하였다. 이에 정부는 경주개발위원회를 설치해 계획의 집행과 운영을 담당케 했고, 집행기구로서 경주개발공사사무소를 설치했다. 차관 외의 자금은 정부, 경주시, 민간자본이 공동으로 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중 하나는 사적지구 정비 사업이었다. 총 13개의 지구 정비에 있어 주요 원칙은 도로 정비나 보문관광단지 조성 등의 사업은 문화재 매장 여부를 조사한 뒤에 공사를 진행할 것, 주요한 유적을 발굴 ․ 조사하여 중요한 것은 복원하여 교육 자료로 활용할 것, 현존하는 문화재는 정비하고 파손된 문화재는 보수하며 사적지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를 신설 ․ 개수할 것 등이었다.

[그림 5] 사적지구 현황. 출처 : 강지희,「경주 관광 도시적 특성에 관한 연구 –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 관광개발을 중심으로」, 울산대학교 건축학과 석사학위논문, 2009, 49쪽

이 시기 발굴된 대표적인 곳이 천마총이다. 당시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인 황남동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시범적으로 98호분 앞에 있는 작은 무덤인 황남동 155호분(천마총)을 발굴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1973년 4월 황남동 155호분 발굴이 시작되었고, 8월 233일 금관을 비롯한 수천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된 유물 중 하나가 천마도였다. 천마총의 성공적인 발굴에 황남동 98호분 발굴도 개시되었고, 이 고분에서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천마총은 발굴에 그치지 않고 고분 안을 관람객이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도록 개방하기도 하였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특징 중 하나는 신라의 인물에 대한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시설이 신라 통일에 많은 기여를 한 김유신, 태종무열왕, 문무왕 세 명을 기리는 통일전이었다. 통일전 건설은 1974년 6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되었으며, 1976년 4월 22일 공사를 시작해 1977년 9월 7일 개관하였다. 통일전 본전에는 세 명의 영정을 두었고, 본전을 둘러싼 회랑에는 삼국통일 기록화를 전시하였다.

통일전과 더불어 화랑교육원을 통일전 근처에 설립하여 주체적 민족사관을 학생들에게 내면화시키고자 하였다. 화랑교육원 건립 계획은 1970년 11월 3일 확정되어 1973년 5월 30일 개원하였다. 이곳에는 한 번에 30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입소해 3박 4일간 교육을 받았다. 교육은 하루에 16시간 정도에 이르는 강행군이었으며, 주된 내용은 화랑정신, 무술, 봉사활동 등이었다.

사적 정비와 더불어, 관광지 조성 사업이 진행되었다. 당시 투자방향은 보문호 일대를 국제적인 관광지를 조성, 감포유원지는 모래사장과 소나무 숲을 활용해 해수욕장과 하계운동지구로 조성, 남산과 토함산은 관광호텔과 유스호스텔만을 허가하고 전망대나 휴게시설을 조성, 교촌지구에 민속문화센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지역 중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보문관광단지를 들 수 있다. 보문단지는 보문호를 중심으로 조성된 관광지로, 관광지 조성 이전의 보문호는 주변에 낚시터만 있었을 뿐이었다. 보문단지 조성 계획은 100평 규모의 종합관광센터와 더불어 300평 구모의 골프장, 100평 규모의 어린이공원, 유스호스텔, 낚시터, 케이블카, 전망대, 휴게소와 더불어 유흥단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보문호 동쪽에 종합관광센터를 조성하여 1,100실 규모의 관광호텔을 건설하고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쇼핑센터를 건설해 편의 제공과 관광수입 증대를 도모하고, 유흥지대는 종합관광센터 북쪽에 조성하며, 보문호 남쪽에는 청소년 시설로서 어린이 공원과 유스호스텔, 동식물원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림 6] 보문관광단지 계획도. 출처 : 건설부,『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1971

관광지 개발과 더불어, 원활한 관광을 위해 도시 기반 시설도 정비되었다. 이와 관련해, 도로 정비가 주요한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도로 개발의 주요 방침을 보면, 사적군을 분단하는 노선은 이설(移設)하고, 관광코스 형성을 위한 도로망을 구축하며, 주차장을 사적지구를 비롯한 요소에 건설하고, 도로변에 적절한 가로수를 심고 주요 유적지 도로에는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의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방침 하에 26개 노선을 계획하여 35.3km를 신설하고 101.6km를 확장하였으며 가로수 30,777그루를 심었다. 도로망 정비를 통해 도시의 기반 시설이 갖춰지는 것과 더불어 도심과 관광지(사적지), 관광지(사적지)와 외부 도시가 연결되었다.

[그림 7] 도로망 계획. 출처 : 건설부,『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1971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 경주의 관광도시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관광도시화의 시기나 주체가 달랐음에도 ‘신라’라는 소재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경주가 신라의 수도였기 때문에 관광자원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 선택이 당연하다고 생각될 수 있겠으나, 소재 활용의 이유가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유사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관광도시화의 주체가 경주시나 경주 거주민이 아니라 외부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신라’에 집중한 관광도시화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일례로 경주시는 신라왕경 복원정비 사업에 박차를 가해, 그 첫걸음으로서 올해 3월 월성 해자 복원 착공식을 거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마냥 순조롭지는 않다. 올해 1월 동궁과 월지(안압지) 복원 사업이 유네스코의 반대로 중단되었고, 복원사업의 기간이 2022년이라는 짧은 시일 내에 진행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신라’에 집중하는 전략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의 접근도 필요하다.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2016년 9월 지진으로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 감소한 상황으로, 특히 수학여행 목적으로 경주를 찾는 학생이 예전 같지 않다. 또한 1970년대 경주가 개발되던 때와는 다르게, 경주 이외에도 매력적인 관광지가 많이 있다. 물론 지금 경주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인 황리단길처럼 ‘신라’와 관련이 없는 관광지도 부상하고 있다.

[그림 8] 황리단길의 전경. 출처 : 필자 촬영(2019.05.04. 촬영)

이 글이 경주의 관광도시 전략이나 대책을 논하는 글은 아니다. 다만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신라’ 관련 사적지와 그렇지 않은 관광지의 유기적인 연결이 필요해 보인다. 각각의 관광자원이 가진 매력도 충분하지만, 관광지 간 연결성이 높아진다면 더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바람은 대중교통에 대한 고민이 조금 더 진행되었으면 한다. 누군가 필자에게 관광지로서의 경주를 방문할 때 장애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교통이 불편하다는 점을 첫 번째로 손꼽을 것이다. 경주는 도시 전체에 관광지가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관광을 위해서는 여러 곳을 방문해야 한다. 하지만 경주에는 지하철이 없고, KTX나 SRT가 정차하긴 하지만 신경주역은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다. 대중교통으로 버스가 있긴 하지만 충분치 않은 상황이다. 그렇기에 원활한 관광을 위해서는 자동차를 필수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물론 자가용이 있는 사람에게는 문제되지 않는 사항이고 자가용이 없더라도 전세버스나 렌터카 등을 활용하면 되겠지만, 이는 교통수단에 고정적인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저렴한 비용으로 경주를 관광하기가 어렵게 되고, 코스를 정하는 데 있어서도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따라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관광지 간의 이동이 원활해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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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개발동우회,『그래도 우리는 신명바쳐 일했다』, 고려서적(주),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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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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