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원도심,
‘식민의 기억’을 품은 도시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군산의 기억
    2019년 04월 15일 10: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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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목포의 근대사, 공간의 분할과 경계의 변천 과정”

2018년 봄, 나는 군산을 다녀왔다. 구형 새마을호가 이제 운행을 중단한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새마을호를 타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3세대 새마을호인 itx-새마을호가 뒤를 이어 계속 운행한다고 하지만, 어린 시절 그저 바라만 보았던 새마을호를 한번 타보고 싶다는 핑계를 꺼내들어 군산으로 봄나들이를 떠났다.

군산을 방문한 것은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대학원 시절 학생회 답사를 준비하면서 김제와 군산을 다녀간 바 있다. 당시에도 이미 군산 근대문화도시 조성사업이 꽤 진척되어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막 개관한 참이었고, 시내의 주요 건축물들도 새롭게 단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두 번째 방문하는 군산은 처음 발걸음을 내디딜 당시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군산의 거리는 더욱 일본풍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시에서 대대적으로 투자해서 지은 일본식 여관이 거리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고, 그렇게 조성된 분위기를 느끼며 거리 곳곳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산의 거리는 왜인지 아쉽게 느껴졌다. 기사를 찾아보면 군산시의 근대문화도시 조성사업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상황이다. 그렇지만 군산의 모습은 단지 퇴색한 이국적 모습이 남은 거리일 뿐, 멀리서 찾아와 근대 도시 군산의 오랜 세월을 읽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러한 아쉬움을 보충해줄 박물관에서도 마음을 달래지 못했다. 전시장의 떨어질 듯한 낡은 설명판이 개관 당시로부터 지금껏 아무 개선 없이 그대로 붙박여 있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군산, 국제무역항을 꿈꾸었으나 식민도시로 귀결되다

금강 하류에 위치한 군산은 일찍부터 대외교류의 관문이자 조운의 중심지였다. 군산의 포구는 서울로 연결되는 곳이었기에 군사적 요충지로서 또한 전라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운반하는 조창으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또한 군산은 서울로부터 여러 가지 문물이 들어오는 포구로서 유통경제가 발달하였다.

군산지역이 갖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생긴 오류가 바로 1899년 군산의 개항은 일제의 식민지화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주장이다. 서해안에 위치한 주요 항구로서의 잠재력에 주목한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군산지역에 진을 설치하고 조창으로 활용해왔던 조선정부가 군산의 가치를 더 잘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1899년 군산의 개항은 군산지역의 경제적 잠재력과 가능성에 주목한 대한제국의 자주적 결정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군산을 개항장으로 삼음과 동시에 근대문물을 선도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점지역으로서 만들어가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대한제국 정부가 군산진이 있던 구역을 조계지로 설정하고 격자형의 가로망을 따라 새롭게 도시를 만들려고 했던 점, 군산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온 객주들을 중심으로 상회사를 설립하여 외국 상인들과 경쟁하려고 했던 점, 향교가 있던 자리에 공립소학교를 설치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려고 했던 점 등에서 유추할 수 있다. 지역 유지세력 또한 진명의숙이나 금호학교 등의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근대교육을 실시하여 적극적으로 근대문물을 받아들여 익히고자 하였다.

이처럼 대한제국 정부는 군산지역의 경제적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스스로 개항하여 근대문물을 선도적으로 받아들이는 도시로 만들려고 하였다. 조금 심하게 비약하자면, 대한제국 정부는 군산지역을 20세기 초 국제무역항으로 성장시키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왼쪽, 1904년 군산항도1911년. 오른쪽, 군산각국 조계도(사진으로보는 군산100년))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의 기대와 달리, 군산지역은 개항 초부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경제체제 속에서 기능하는 식민지 거점도시로서 형성되어갔다. 앞서 살핀 것처럼, 대한제국 정부는 군산을 개항하고 감리서, 경무서, 재판소, 체신사, 전신사 등을 설치하는 한편 격자형의 공동조계지를 설정하여 여러 국가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실제로 군산에 설정된 조계지를 장악해 갔던 이들은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은 개항 직후인 1899년 5월에 바로 내외 통상무역 및 거류민의 보호를 목적으로 군산진이 있던 수덕산 중턱에 목포영사관 군산 분관을 설치했으며, 그 옆의 산자락에는 군산신사와 공원을 조성하며 일본인 위주의 시가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인들의 조선 진출이 활발해졌고, 그 흐름 속에서 군산을 거점으로 일본인 지주들이 전라북도의 평야지대로 진출하였다.

이미 1903년부터 일본인 지주들은 전라북도의 전답을 매수하기 시작했지만, 러일전쟁 이후 본격화되어 1909년에는 이미 전라북도 평야의 1/3, 즉 2만 정보에 달하는 전답을 차지하였다. 일본인들의 매수지는 익산, 임피, 옥구, 김제 등 군산 인근의 4개 군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 지역의 전답에서 생산된 미곡은 대부분 군산항을 통해서 일본 등지로 매각되었다. 이처럼 개항 초기부터 군산은 일본인 지주들의 진출 거점이자 조선의 미곡을 일본으로 중개하는 항구로서 위치 지어져 있었다.

1910년대 군산 영화동 부근(사진으로 보는 군산100년)

이러한 가운데 군산에는 일찍부터 조선은행(1902), 제18은행 군산지점(1907), 미곡검사소(1907) 등의 금융기관과 세관(1906), 우체국(1901), 경찰서 등 각종 행정기구가 들어섰다. 나아가 국내 최초의 신작로인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도로가 1908년에 건설되었고, 1912년에 전북 이리와 군산을 연결하는 철도가 부설되면서 매우 급속하게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나아가 1913년 군산은 경성, 부산, 목포, 대구 등과 함께 ‘부(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일제강점 초기의 조선에서 주요 12개 도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한편 일제강점기 군산시가지는 조계지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으로 확장되어가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일본인들의 주거지역이 점차로 확장되는 양상과 일치하는데, 구체적으로 조계지와 항만이 있는 군산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서남쪽으로 뻗어가다가 동부 군산역 부근에 부도심이 생겨나 시가지가 확장되었다. 특히 일본인 부호들은 영화 ‘타짜’에서 평경장의 집으로 잘 알려진 히로쓰 가옥이 있는 신흥동과 신창동 등 군산 남부에 주거지를 형성하였다. 이 지역은 현재 군산시에서 전개하고 있는 ‘근대문화도시’의 핵심지역이기도 하다.

1920년대 군산거리의 모습(사진으로 보는 군산 100년)

군산시가지의 또 다른 특징은 민족별 거주지 분화 양상이 매우 뚜렷하다는 점이다. 즉 일본인들이 새로 설정된 조계지를 중심으로 근대적 도시를 만들고 외연을 확장해나갔던 것과 달리, 조선인들은 근대도시의 바깥에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또한 조선인들 가운데서도 계층에 따라 거주구역이 조금씩 달라서 기존부터 부를 축적해온 군산의 객주들과 개항 이후 부를 쌓은 조선인들은 일본인 시가지와 비교적 가까운 죽성로와 영정(현재의 영동)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도로를 닦거나 부두의 하역작업을 하는 조선인 노무자들은 개복동이나 둔율동 일대의 달동네에서 토막을 짓고 거주하였다. 조선인 거주지의 모습은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잘 드러나 있다. 소설에 비친 그 당시의 모습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예서부터가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지금은 개복동과 연접된 구복동을 한데 버무려가지고, 산상정(山上町)이니 개운정(開運町)이니 하는 하이칼라 이름을 지었지만, 예나 시방이나 동네의 모양다리는 그냥 그 대중이고 조금도 개운(開運)은 되질 않았다. 그저 복판에 포도장치도 안한 십오 칸짜리 토막 길이 있고, 길 좌우로 연달아 평지가 있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그대로 사뭇 언덕비탈이다.

그러나 언덕비탈의 언덕은 눈으로는 보이지를 않는다. 급하게 경사진 언덕 비탈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낡은 생철집 오막살이들이 손바닥만한 빈틈도 남기지 않고 콩나물 길 듯 다닥다닥 주어박혀, 언덕이거니 짐작이나 할 뿐인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하층 조선인들의 거주지는 도로도 제대로 놓이지 않은 열악한 거주환경에 놓여 있었다. 특히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농촌으로부터 유입된 사람들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일용직이나 행상과 같은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버티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꽤 높은 편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군산의 도시화가 산업의 발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던 데에 기인한다. 군산의 제조업은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정미소와 양조공장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그 밖에 철공소와 농기구 제작, 고무공장 등이 있었으나 비교적 영세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군산으로 유입된 유휴인력을 노동력으로 흡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조선인들이 거주지를 형성했던 군산 동부지역에는 유독 파출소가 많았다는 점이다. 조선인 거주지인 동남부 지역에는 세 곳의 파출소가 있었는데, 모두 조선인들의 동향을 살피고 감시하기에 좋은 지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군산은 일제 식민체제 하에서 전라북도 평야지대에서 생산된 미곡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거점으로서 성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군산의 도시화는 전북의 평야에서 생산한 미곡으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이 주도하였다. 아울러 식민지시기의 군산은 민족적, 경제적 조건의 우열에 따라 시가지가 확장‧분화해가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해방, 식민체제의 붕괴와 군산의 재도약

1945년 8월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식민지민으로서 설움을 견뎌내야 했던 조선인들에게 해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찬 감동의 순간이었겠지만, 일본제국의 식민경제 하에서 성장한 ‘군산’의 입장에서 볼 때 해방은 그다지 반가운 소식만은 아니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식민지 블록경제가 해체되었고, 그로 인해 일본뿐만 아니라 북한, 만주, 중국 등지와의 교역이 거의 중단되면서 군산의 지역경제는 정체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동안 도시 성장의 기반이 되었던 쌀의 수이출항으로서의 기능이 식민지 경제체제의 해체와 함께 배제되고, 군산의 경제기반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 지주와 자본들이 대대적으로 철수해버렸기 때문이다. 군산은 인근 농경지 중심의 전북지역에 비해 그나마 일부의 공업시설이 있었고 정부 립 이후 공장이 재가동되면서 다소 나은 상황이었으나,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다시 크게 위축되었다. 게다가 군산에 있는 공업시설들도 대부분 영세하고 기술수준도 낮아 식민지 시기의 번영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왼쪽, 1950년대 군산 시가지. 오른쪽, 1960년 군산 시가지(사진으로 보는 군산 100년)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60~70년대에도 군산의 지역경제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군산지역은 일제 식민경제체제 하에서 이미 고도밀집도시로 성장하여 1965년에는 인구생태적 집적순위가 전국 3위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그러나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자 군산의 위상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60~70년대의 경제개발은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이 지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산시를 비롯한 전북의 지역경제는 지속적으로 상대적 저발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군산의 지역경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정부가 중국 등 아시아지역과의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교두보로 서해안지역을 주목한 이후에야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정부는 1980년대 중반에 들어 국가 차원의 산업구조정책과 서해안개발사업계획을 발표하면서 군산과 그 주변지역을 서해안 개발의 거점도시로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같은 정부의 정책적 변화 속에서 1987년 새만금 간척사업계획을 발표하면서 군산지역은 서해안의 거점도시로 다시금 성장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1988년에는 군산국가공단 조성사업이 착공되었고, 이어서 1993년 군장국가공단이 착공되었으며, 1991년 새만금 방조제 사업이 착공되면서 군산의 해안 간척을 통한 산업공단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2008년에는 새만금과 군산 등지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어 개발이 활성화 되었다. 정부의 적극적 지원 속에 군산에 조성된 산업단지에는 현대중공업, GM, 두산 등 자동차 및 기계 부품산업계열의 기업들이 입주하였고, 이들 산업단지에 근무하는 노동자들과 그 가족이 거주할 배후도시로서 군산시는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

‘식민의 기억’을 간직한 군산 원도심

해방 이후 군산시가 오랜 침체를 겪다가 새만금 간척사업과 산업단지의 조성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면, 이와 달리 군산의 옛 시가지는 그러한 흐름에 반하여 아무런 개발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식민도시로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무계획 속에 방치된 그 시가지가 지금 군산시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새로운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오늘날 군산시는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곧 군산시의 주요 시설이 자리하고 있고 주민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시가지와 서해안 개발의 일환으로 건설된 새만금 간척지와 군산산업공단 및 그 배후의 거주구역, 그리고 옛 시가지를 둘러싼 옥구, 임피 등의 농업지대이다. 이중 군산으로 관광을 온 사람들이 흔히 찾는 곳은 군산 시가지이다.

오늘날의 군산 시가지는 개항기 조선 정부에서 군산의 문호를 열고, 외국인들이 들어와 거주할 수 있도록 설정한 격자형의 조계지로부터 시작되어 꾸준히 확장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미곡 수이출항으로서 군산에 일본인 지주들이 들어와 살면서 시가지의 영역은 크게 넓어졌다. 넓어진 시가지는 일본인들의 영역으로, 자신들의 생활공간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 도로를 깨끗이 닦고 상하수도 등 도시기반시설을 잘 갖추어 놓았다. 일본인들의 영역 너머에는 조선인들의 거주지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인 거주지는 아무런 도시기반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 그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이 지역은 조계지 설정으로 인해 밀려난 주민들이나 농촌에서 유리되어 도시로 유입한 인구들이 지은 토막들이 몰려 형성되어 있었다. 그나마도 일본인들이 지속해서 영역을 넓혀가면서 조선인들의 거주지는 꾸준히 밀려났고, 그렇게 확장된 시가지가 오늘날 군산의 원도심을 형성하였다.

1978년 군산 시가지(사진으로 보는 군산 100년)

해방 이후에도 군산 시가지는 꾸준히 확장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군산의 원도심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새로이 들어서는 고층 아파트나 현대적인 건축물들은 주로 확장된 신시가지에 들어섰고, 군산의 원도심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도로망과 시설들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인 지주들이 거주했던 집들도 그대로 남아 있어 오늘날 군산의 주요 명소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형성되거나 성장한 도시들에서도 일본인 가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독 군산이 주목되는 것은 다른 도시에서는 이후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일본인 가옥들이나 당대의 시설이 상당수 훼철되어 대체로 하나의 구역이 잔존했다기보다 몇몇 건물들만이 점점이 남아 있는 반면, 군산의 경우 조성 당시부터 일본인들의 입김이 서려 있었고, 그렇게 형성된 시가지 위에 건설된 일본인 거주구역이 큰 틀에서 거의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산의 원도심이 이렇듯 오랜 시간 동안 그 형태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이후 군산의 도시계획에서 이 지역은 재개발의 대상이 아닌 화재로부터 보호해야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것처럼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보호하려는 시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조성된 시가지를 부수고 새롭게 재개발하는 것보다 그동안 조계지에 밀려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고지대의 조선인 주거지역을 정비하는 것이 시급했던 데에 기인한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국가주도의 개발정책 속에서 군산 외항과 해안 간사지를 중심으로 산업공단이 건설되는 등 군산의 도시공간을 크게 확장하는 방향으로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해방 이후의 군산의 도시개발은 기존의 시가지 중심에 대한 재개발보다 그 바깥에 있는 열악한 거주환경을 개선하고, 공간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 속에서 군산의 원도심은 역설적이게도 그 형태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산 원도심과 그 주변(DAUM 지도)

군산의 원도심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였다. 1995년 김영삼 정권에서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를 철거하자, 이를 계기로 일제강점기 건축물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나 찬반 논쟁이 가열되기도 했다. 군산에서도 일제강점기 건축물에 대한 찬반 논쟁이 거세게 일었다. 특히 군산시청을 비롯하여 은행, 관공서 등 시내에서도 규모가 큰 건축물들에 대한 논쟁이 크게 일어나, 이들 건축들에 대해 일제의 잔재이므로 철거해야 한다는 입장과 어두운 기억의 역사도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러한 가운데 군산시청이 철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자치제도의 실시 속에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관광지 개발과 관광객 유치가 지방자치단체의 주요 시책으로 제기되면서 군산의 원도심을 바라보는 입장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즉 일제의 잔재라고 하여 무작정 철거할 것이 아니라, 어두운 역사의 단면을 보존하여 ‘교육의 장소’이자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는 것도 괜찮다는 주장이 채택된 것이다.

군산 여행지도_군산시

이러한 기조 하에 군산시는 2008년 정부의 ‘근대산업유산 창작벨트화 사업’에 공모하여 국비를 확보하고 2009년부터 ‘근대문화도시 조성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모두 군산의 원도심에 남아 있는 일제 건축물을 복원, 정비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우당(古友堂)’이라는 이름의 일본식 여관을 대규모로 짓는 등 일본풍의 거리로 원도심을 적극적으로 다시 개조하고 있다.

이러한 군산시의 시도는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3년에는 대한민국 경관대상을 수상했고, 2014년에는 유엔-해비타트·아시아경관디자인학회·후쿠오카아시아도시연구소에서 주관한 아시아 도시경관 대상을 수상하였다. 관광객 수도 크게 늘어났다. 그 한 예로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입장객 수가 2013년 22만 4027명, 2014년 41만 8396명, 2015년 81만 5337명, 2016년 102만 6845명, 2017년 87만 4870명, 2018년 81만 27명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군산의 원도심을 찾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군산 원도심의 성공은 한켠으로 아쉬운 감이 적지 않다. 이는 군산시에서 원도심을 활용하는 방식이 매우 모순적이고 강박적인 데에 기인하는 듯하다. 앞서 살핀 것처럼, 군산시는 원도심을 이국적인 일본인 거리로 조성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대규모 일본인 여관을 짓고, 층고 제한을 두는 것은 그러한 기조를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군산 원도심의 일본인 거리 조성 작업에서 정작 식민지의 또 다른 한 주체인 조선인의 삶은 찾기 힘들다. 즉 군산시의 근대문화도시 조성사업은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품고 있는 건축물에 대한 아무런 성찰 없이 그저 관광상품으로만 이용하려 하는 얄팍한 발상이라는 비판에 쉽게 직면할 수밖에 없다.

사진=서준석

이러한 비판여론을 무마하고자 나타난 것이 거리 곳곳에서 문득문득 느낄 수 있는 강박적인 표어들이다. 시가지를 거닐다 보면‘역사를 잊은 자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식의 출처를 알 수 없는 현수막이나 심지어는 식민 체험을 소재로 한 게임방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식민지 잔재를 손쉽게 상품화한다고 비판하는데 대해 아주 도식적이고도 ‘손쉽게’방어하려는 꼼수에 지나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단순한 관광 상품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턱대고 일본인 여관을 짓기에 앞서 공간에 역사를 재현하는 것에 대한 좀 더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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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서울역사편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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