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균을 보내고
    노동자 가슴에 빛을 담다
    발인제와 영결식, 하관까지 18시간
        2019년 02월 11일 10: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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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운수노조에서 정리한 고 김용균 사망사고 62일만의 장례, 발인제와 노제, 영결식과 화장, 하관까지 18시간을 기록한 사진과 글이다. 노조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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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2시, 자정이 넘어서까지 다음날 있을 장례준비에 여념이 없던 장례위원들이 지쳐 쓰러진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5일 당정의 후속대책 발표 후 장례준비에 사실상 3일여의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은 조건에서 민주사회장을 준비하고 치르는 것은 매우 벅찬 일임에 틀림은 없을 것이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곳곳에 몸을 뉘인 사람들을 고무줄 놀이하듯 피해 밖으로 나온 순간이다. 비현실적으로 파리하고 흰 달 조각이 어스름도 오지 못한 새벽 하늘에 걸려있다. 남색도 푸른색도 끼어들지 못한 이른 새벽 검은 하늘에 유일한 위안일 뿐인 작은 달 조각 빛. 목숨값으로 받은 김용균이라는 빛을 우리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어떻게 받아안아야 하나. 무겁고 또 무거운 밤이다.

    김용균을 보내는 날, 새벽 3시 장례지도사의 채근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이 다시 삶 쪽으로 한 발 내딛는다. 피곤과 졸음을 털어내며 상복을 서둘러 입는 사람들. 오늘의 상복은 몸자보와 머리띠다. 내가 김용균이다 라는 구호가 선명하다. 유가족과 장례위원장들이 빈소에 모였다. 기자들의 자리잡기가 시작돼 상복을 착장한 장례위원들은 장례식장 좌우에 나뉘어 섰다. 발인제가 시작되고 유가족들이 흐느낀다.

    고인의 영정이 빈소를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 앞에 잠시 섰다. 장례위원장인 박석운 대표가 품속에 고이 적어온 조사를 꺼내어 든다. 김용균의 죽음은 분명 사회적 참사이며 끔찍한 타살이었건만 고인의 참혹한 죽음을 언급하는 장례위원장의 조사에 유가족들의 표정을 살필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다. 아니 생명이 없다. 자신의 생명같은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내심을 짐작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걱정스럽게 언니를 부축하고 있는 이모의 표정만이 간절하다.

    태안으로 내려가는 장례버스에 몸을 실었다. 김용균이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는 날이다. 김용균이 몇 달간을 지났을 태안화력발전소의 입구에 도착했을때서야 겨우 푸르스름한 새벽의 냄새가 코끝에 감긴다. 오전 7시, 이미 노제 장소에는 충남권 지역의 많은 동지들이 김용균을 맞으러 나서있는 참이다. 만장을 선두에 앞세우고 김용균의 이름이 적힌 대형명정과 김용균이라는 빛을 형상화한 부활도가 뒤따른다.

    바람이 너무 불어 만장을 든 동지들의 몸이 휘청인다. 휘청이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 위압적인 발전소의 건물들이 새벽밤을 가로지르고 있어서인지 지난 밤 보았던 조각 달은 도저히 찾아지질 않는다. 김용균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빛은 부연 탄가루속 자신의 핸드폰 불빛이었겠다는 생각에 이를 때 즈음 그가 죽었던 컨베이어밸트 구간 아래에 행진대오가 도착했다. 아마도 사측이 깔아놓았을 가지런히 놓인 의자들을 좌우로 제치고 김용균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일했던 곳에 도착했다. 그가 죽은 지 62일 만이다.

    태안노제를 마치고 서둘러 다시 버스에 오른 장례위원들. 이제 오전 11시 서울노제를 지내기 위해 서두른다. 오늘의 일정은 그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시간이 늦어지면 차가운 겨울날씨에 땅이 얼어 하관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상여소리를 하기 위해 서둘러온 전북도립국악원지부의 고양곤 지부장이 목을 가다듬는다. 우리에겐 지부장님, 본부장님이지만 소리꾼으로서는 명창으로 소개받는 고양곤 동지의 한 서린 쇳목소리가 운구행렬을 이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장례행렬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사뭇 흥미롭다. 민주사회장이 뭔지 노제가 뭔지 의미를 모르는 젊은 기자들이 그 뜻을 질문해올 정도로 이런 대규모 장례행렬은 이미 어색한 어떤 것 일터라. 역사속 어떤 장면을 바라보듯 행진대오를 바라본다. 천오백여 노동자, 시민들이 김용균의 영정을 뒤따라 광화문 영결식장에 도착했다.

    ‘김용균이라는 빛’ 영결식 사회를 맡은 이태의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의 목소리가 침통하지만 힘있다. 수많은 조사와 위로의 말 속에 한 분의 조사가 오롯하다. 그도 역시 사회가 만든 구조에 의해 살해당한 한 청년의 어머니이다. 故이한빛PD의 어머니인 김혜영씨는 조사를 통해 말했다.

    ‘3년 전, 스물일곱의 아들 한빛을 잃었고 지금까지도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가족에게는 자식을 잃은 날 시간도 기억도 함께 멈춥니다. 유가족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죽이며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많은 유가족들은 앞서서 길을 열어왔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울음을 삼키며 앞장서 싸웠습니다. 죽은 자식을 끌어안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혼자보다는 함께하고 연대할 때 슬픔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용균이네 가족들이 이후 겪어내야 할 고통을 위로하고 우리가 함께할 때 씩씩해질 수 있을 것이고, 이 사회는 존엄을 지킬 것입니다’

    이한빛PD의 어머니는 울고 있었지만 그 어느 조사보다 영결식에 참석한 3천여 노동자 시민들을 강하게 감동시켰다. 그에 답하듯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는 유족 인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아직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우리 아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이에 따라 살인을 저지른 책임자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의 부당함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그 길이 우리 아들과 같은 수많은 비정규직을 사회적 타살로부터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현장을 지키고 싸울 것인가. 죽음의 외주화라는 화두를 어떻게 바꾸어 낼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좋은 사회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인가를 자식을 잃은 두 어머니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김용균이라는 빛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안을 것인가.

    수많은 이들의 헌화를 뒤로하고 김용균 동지를 보내기 위한 일정을 지키기 위해 장례위원들과 유족들은 서울시립승화원으로 향했다. 운구차에서 김용균의 시신이 내려지고 화장을 위해 이동하는 길목에서 김용균의 아버지는 너무도 처연하게 흐느꼈다. 아들의 시신이 유골함에 담겨 자신의 품에 안길때도 아버지는 흐느꼈다. 김용균의 유골이 담긴 함은 태안지회의 깃발로 곱게 싸여 부모의 손에 들려있다. 유골함이 너무도 작다. 장례위원들도 이때만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짧은 겨울 해가 야속하게 저물어 갈 즈음 김용균이 영면할 마석 모란공원에 도착했다. 전태일 열사가 잠든 곳 바로 뒤가 김용균이 묻힐 곳이다. 유골함이 안장되고 유가족과 장례위원장, 태안지회의 동료들이 치토작업에 손을 보탰다. 묘를 고르는 평토작업과 평토제를 지내는 동안 벌써 날은 어두워 조명 등 하나에 의지해 장례가 치러졌다. 마지막 장례의식은 결국 우리가 어찌해야할 것인지를 결의하는 결의대회로 진행됐다.

    “김용균 동지여, 잘가시오”

    “비정규직이 없고 차별이 없는 곳에서 영면하소서”

    공공운수노조 최준식 위원장의 결의조사가 모란공원을 울린다. 김용균 동지의 영면을 바라는 우리의 바람은 그대로 우리의 결의가 돼야한다. 비정규직이 없고 차별없는 그곳에서 평안하라는 우리의 바람은 살아남은 우리의 일터를 바꾸겠다는 결의여야 한다. 기업의 탐욕과 정부와 국회의 무책임함 속에 지금도 죽음의 일터로 향하는 수많은 김용균들을 살리기 위해, 유가족의 눈물과 의지에 연대로 화답해준 많은 이들과 함께 조금 더 용기를 내야한다. 생명이 존중되는 일터와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김용균 이라는 빛은 장례일정을 모두 마친 어두운 모란공원에서 너무나도 밝게 우리 가슴에 세겨졌다. 장례를 마치고 모란공원을 내려오는 길, 지난 새벽 보았던 조각 달빛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선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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