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좌파 그리고 포퓰리즘
[책소개]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샹탈 무페/ 이승원(옮긴이)/ 문학세계사)
    2019년 02월 09일 10: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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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에서 주장하는 핵심은 헤게모니적 위기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경계를 반드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권력 분점’과 ‘소수의 권력 독점’ 사이에 정치적 경계를 구성하는 담론 전략인 좌파 포퓰리즘이, 현 국면에서 민주주의의 회복과 심화를 위해 필요한 정치 유형을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이 ‘좌파 포퓰리즘을 위한(For a left populism)’ 적기인가?

세계적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는 지난 2018년 8월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라는 짧은, 하지만 강렬한 책을 냈다. 이 시대에 포퓰리즘은 그저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며,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현상이라고 무페는 말한다.

어지럽다. 좌와 우, 중도를 넘어 웬만한 신생 정치세력은 다 포퓰리즘이라 불리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럴수록 도대체 ‘포퓰리즘’이 무엇인지 더 헷갈리기만 한다. 어떤 정책이든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포퓰리즘’이라 딱지 붙이는 주류 언론과 지식인들의 관행 때문에 혼란은 더욱 심해지기만 한다. 우리 시대는 ‘포퓰리즘 국면’이다. 이런 혼돈 속에서 나침반 역할을 할 만한 책이다.

샹탈 무페가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포퓰리즘적 계기’가 드러내는 현재 정세의 본질과 도전을 좌파가 시급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 구성체의 위기이며, 이 위기는 현재 민주주의 질서를 보다 더 민주적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진행되어 온 전환들의 본질과 이 전환들이 민주주의 정치에 끼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민주주의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이것은 우선 좌파와 우파의 경계선이 희미해진 것 때문인데, 이 상황은 ‘탈정치(post-politics)’라고 지칭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근본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대안은 없다는 생각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다.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의 프로그램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도 없기 때문에, 투표장에 간 시민들에게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부유한 소수의 집단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격차가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과두지배(oligarchisation)’의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민영화, 특히 긴축 때문에, 중간 계급의 빈곤화와 불안정성이 진행돼 왔다는 점은 새로운 점인데, 중간계급은 현재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의해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은 중도에서의 합의(consensus of the centre)에 대해 왜 그리도 많은 저항이 발생했는가를 설명해준다.

샹탈 무페가 현 시기를 ‘포퓰리즘 계기(populist moment)’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포스트-민주주의의 상황에 대한 다양한 저항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한 저항들은 많은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며, 반드시 진보적이지만은 않다. 그러한 저항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의 요구,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요구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들은 외국인혐오(xenophobic)의 방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문제는 이민자들 때문이야’라고 주장하는 우파의 포퓰리즘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들은 민주주의를 확대하며 근본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즉 진보적인 방향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이것이 샹탈 무페가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의 지지층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그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현재 사회의 더 많은 부분들이 이전 어느 때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새로운 통제 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다. 포드식 자본주의의 시대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만이 영향권 내에 있었다. 그러나 금융자본주의의 발전, 그리고 (무한경쟁의 환경을 만듦으로써 사람들을 경쟁에 몰두하게 만들어 결국 그들의 삶을 통제하는) 소위 ‘생명관리정치(biopolitics)’는, 우리의 삶의 모든 양상들을 자본주의의 통제 하에 있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부정적인 측면이지만, 근본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또한 기회이기도 하다. 단지 노동계급이 아니라 우리가 전취할 수 있는 중간 계급의 많은 중요한 부문들이 존재하게 됐다.

전통적인 좌파의 정치적 전선은 계급에 기초하여 그어졌다. 노동계급, 즉 프롤레타리아 대 부르주아의 전선이 그어졌다. 오늘날에는, 사회의 발전을 고려해 볼 때, 그런 방식으로 정치적 전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계급의 관점에서 정식화될 수 없는 일련의 민주주의 요구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페미니즘, 반 인종주의, 성 소수자 운동, 환경운동 같은 요구들을 고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런 요구들은 노동계급과 부르주아 사이의 전통적인 대립과는 결이 다른 요구들이다. 우리는 포퓰리즘의 방식으로 전선을 만들어야 한다. 그 전선은 ‘대중(the people)’과 ‘과두지배자들(the oligarchy)’ 사이에 그어지는 전선이라는 점에서 훨씬 더 포괄범위가 넓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프로젝트를 위해 전취할 수 있는 많은 부문들이 존재하며 단일한 ‘대중’을 구축함으로써 그들을 결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적 전선은 계급만으로는 구축될 수 없다. 노동계급의 요구가 버려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요구들은 다른 민주주의 요구들과 함께 표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좌파 포퓰리즘의 주요한 특징이고, 계급적 관점에서 전선을 구축하는 것과의 주요한 차이다.

‘대중’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사람들을 행동하게 하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왜 사람들은 특정한 유형의 예속에 저항하는가? 왜 그들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가? 샹탈 무페는 평등의 이념, 사회정의의 이념, 그리고 주권재민의 이념이 민주적인 사회에 대해 사람들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근본 가치라고 생각한다.

민주사회의 시민들은 그런 근본 가치에 의해 정치적으로 구축되고 사회화 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러한 가치를 박탈당했다고 느낄 때, 그들은 다양한 형태로 저항한다. 정치영역에서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지금 포스트-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저항들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포퓰리즘만큼 상처가 많은 용어도 드물 것이다. 이백 년 전 민주주의가 그랬을 것이고, 백 년 전 마르크스주의가 그랬을지 모른다. 우파의 포퓰리즘을 그저 인종차별주의적이며 성차별주의적인 요구의 표현으로 간주하지 말고, 그 요구들이 사실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즉 자기의 목소리를 내겠다는 요구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긴박한 문제는 어떤 종류의 포퓰리즘이 헤게모니를 잡아 그런 요구들에 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많은 이들이 더 이상 좌파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 ‘좌파’ 포퓰리즘?

샹탈 무페는 우파의 포퓰리즘에 대항해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좌파의 포퓰리즘을 발전시키는 것뿐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다시 말해, 포스트-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저항들을 염두에 두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확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저항의 방식을 만들어 내는, 그런 포퓰리즘이 필요하다.

여러 사례들을 볼 때, 노동계급의 요구들이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혹은 외국인혐오의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요구들이 접합되는 방식(how they are articulated)에 의해 결정된다. 그 요구들은 우파 포퓰리스트들에 의해서 외국인 혐오의 방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좌파 포퓰리즘에게 제기되는 문제는 그러한 요구들을 다른 방법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좌파’라는 용어가 현재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스페인에서는 좌파라는 말이 사회민주주의의 배신자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사람들은 좌파라는 말만 들으면 신물이 난다고 한다. 프랑스도 상황은 유사한데, 많은 사람들은 좌파라는 말을 들으면 프랑수아 올랑드를 떠올리기 때문에 그 용어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이 용어를 포기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용어가 포퓰리즘 전략이 갖는 포괄적 성격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다. 포데모스의 당원들은 ‘우리는 자신을 좌파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다,’고 말한다. 샹탈 무페는 이런 우려를 이해하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전통적인 좌와 우가 대결하는 방식의 전선을 구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좌파의 다른 의미도 있는데, 그것은 보다 가치에 주안점을 둔 의미(axiological)다. 좌파는 사회정의, 인민주권, 평등 같은 특정한 가치를 지향한다. 샹탈 무페는 그런 가치는 옹호돼야 한다고 생각하며, 샹탈 무페가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다.

격동의 2016년 겨울과 그 이듬 해 봄이 지나면서 한국 사회는 대통령 탄핵과 새로운 정부의 탄생을 결과로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전 사회적인 역동적 경험은 한국 시민들에게 정치와 주권이란 대의제 민주주의와 관료주의에 갇힐 수 없음을 자각시켰다. 그러나 정치와 시민들의 헌법적 주권은 여전히 국회와 정당 그리고 행정부를 이끌어 가는 정치·관료 엘리트들에 의해 제약되어 있고, 신자유주의가 가속화시킨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양극화, 불평등 그리고 차별, 혐오, 위험의 심각성은 제약된 정치 밖에서 방치되고 있다.

샹탈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에서 주장하는 핵심은 헤게모니 위기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경계를 반드시 설정해야 하며, ‘대중’과 ‘과두 세력’ 사이에 정치적 경계를 구성하는 담론 전략인 좌파 포퓰리즘이 현 국면에서 민주주의의 회복과 심화를 위해 필요한 정치 유형을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어쩌면 신자유주의의 신화가 만든 유리천정 아래에 갇힌 우리가 새로운 정치를 위한 가능성의 실마리를 찾고, 그 과감한 실천을 통해 스스로 삶의 정치를 구성하고,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를 보다 더 발전시키는 주체가 되도록 안내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기존에 ‘민주·진보세력’, ‘좌파’, ‘민주화 운동 세력’ 스스로 걸어온 길에 대한 냉정한 비판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낡은 좌우 대립틀을 벗어나 더 많은 민주적 권리와 요구들을 우리 스스로 자유롭고 열정적인 새로운 정치 실천을 통해 실현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가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한 또 하나의 운동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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