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앞에서 시작된 말,
파문 일으키고 이어져야
[소설로 읽는 한국사회] '미투'와 카프카 『소송』과 「법 앞에서」
    2019년 01월 28일 11: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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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청년노동자 고 김용균과 코맥 매카시의 『로드』”

죄에 관대한 법 앞에서, 너도 나도 죄 하나쯤 나눠 갖는 법 앞에서, 피해를 증언하는 것을 넘어 가해자의 가해를 입증해야 하는 일은 실로 어렵다. 때로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일을 떠올려 문건화하고 바늘 같은 기억을 언어로 적어가며 지난한 고통을 제 힘으로 복원해야 한다.

하여 선언은 결말이 아닌 시작이었다. 법 앞에 설 이유조차 없는 피해자들이 오히려 법 앞에 서서 그 문을 지키라 고용된 문지기를 상대해야 했다. 법의 문지기들은 “입장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노라”(「법 앞에서」 p. 9) 정작 자신이 지키는 것의 정체도 모른 채 위에서 시키는 대로 입장을 불허하며 문지기의 소임을 다한다.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나를 뚫고 저 문으로 들어가 보라”(「법 앞에서」 p. 9) 허나 애초에 문도 없고 법도 없다. 문지기들은 오로지 ‘문지기 됨’만을 관철하기 위해, 법 앞에 선 자의 말을 가로막는다. 정작 필요할 때 침묵했던 법은 ‘빈 형식’ 이 되어 문만 덩그러니 남겨뒀다. 그럼에도 문지기들은 법의 문 앞을 떠나는 법이 없다. 지킬 문이라도 있어야 누군가 감히 저 문을 열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2018년 연이어 폭로된 미투 이후 사건 추이를 보며 수많은 법의 문지기를 목격했다. 안희정 1심 재판 결과를 보며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와 『소송』을 떠올렸다. 두 작품 모두 피해자에게 거부된 ‘어떤 법’과 ‘어떤 말’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품 속에서 피해자를 심리하는 법원은 피해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거부된 말의 자리에 발화되지 못한 고통이 있었다.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은 이 세계 자체가 어쩌면 거대한 말의 수용소였을지도 모른다.

법조계, 문화예술계, 체육계까지 성범죄는 폐쇄적 조직문화 깊숙이 뿌리내린 명백한 권력형 범죄였다. 정당한 폭로였지만 법적 공방으로 치달으면서 본질을 흐렸고 돌연 ‘진실 공방’으로 둔갑했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됨과 가해자의 가해됨까지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법은 줄곧 피해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의심했다.

역으로 묻겠다. 피해자를 심문하는 그 법과 법적 판단은 과연 진실하고 신빙성 있는 것인가.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소송』p. 9)

은행 직원 요제프 K는 서른 살 생일에 느닷없이 체포된다. 감시인은 자신을 고용한 상급 관청이 요제프 K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고, 법에 합당한 사유로 요제프 K를 체포할 의무가 있다 주장한다. 도대체 그 합당한 사유가 뭐냐는 말에 그들은 그저 법에 착오가 있을 리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난 그런 법은 모릅니다.” (『소송』 p.15)

요제프 K는 저항한다. 무작정 체포돼 법원에 심리를 받으며 이 거대한 조직의 배후에 대해 비판한다.

“오늘 심리의 배후에 어떤 거대한 조직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뇌물을 밝히는 감시인들, 생각이 모자라는 감독관들, 그리고 기껏해야 보통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 예심판사들을 고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어쨌든 상급, 그리고 최상급의 판사 계층을 먹여 살리고 있고, 아울러 어쩔 수없이 필요한 수많은 정리, 서기, 경찰관과 보조 인력을 거느리고 있는 조직입니다. (중략) 이 모든 일이 이렇게 무의미한데, 어찌 관리들이 완전하게 부패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소송』p. 65)

예심판사는 요제프 K에게 이득이 되는 심리를 걷어찼다며 비아냥된다. 하지만 엄연히 요제프 K는 죄가 없다. 없으므로 그들을 향해 말한다.

“그럼 모든 심리를 당신들에게 선사하지” (『소송』p. 68)

요제프 K는 조력자들과 소송에 나선다. 배후를 알 수 없는 법과 절망적인 대결을 펼친다. 그 과정에서 삶 전체를 성찰하지만 끝내 죄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많은 사상가와 평론가들이 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요제프 K 그리고 법 앞에 서서 법의 문지기와 싸워야 하는 주인공이 처한 두 소설의 상황이 지금-여기에서 투쟁 중인 미투 피해자들의 상황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진실이 폭로된 뒤, 피해자들은 다시 ‘진실공방’에 참여한다. 피해자 자체가 진실인데 진실을 입증하라 강요받는다. 가혹하게도 ‘법적 다툼’이란 의무마저 짊어진다. 이때 사법정의는 아무 의심 없이 보편타당한 상징으로 기능한다. 남성의 이성과 남성의 언어로 구성된 근대의 법체계는 성폭력을 사적이고 사소한 문제로 치부한다. 피해자들은 법의 문지기들과 싸우며 진정 가해자 중심의 세계였음을 뼈저리게 경험한다. 법은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냐” 같은 물음 즉 추상적인 어떤 인간, 극심한 억눌림과 공포 속에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여기 ‘없는-인간’의 행동을 준거로 삼는다.

요제프 K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뒤, 자신의 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결말에서도 요제프 K의 죄를 밝히지 못한다. 부조리한 법에 의해 피해자가 된 요제프 K는 다시 부조리한 법을 통해 세계의 부조리를 증명해야 할 운명이다.

오늘날 법이 미투 피해자에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 착취, 성폭력, 노동 착취와 부당한 계약관계, 신체마저 처분한 노예제 계약, 섹슈얼리티의 폭력적 종속의 역사에 관한 법의 답변이 우선일 것이다.

법은 권력형 성폭력에 대해 ‘위력은 있지만 위력을 사용하지 않았다’식의 거대한 말장난을 생산하며 제 기능을 상실해왔다. 만약 법이 그토록 진실에 가닿고자 한다면 근대의 법체계야 말로 관성을 중지하고 법 전제에 대한 자발적 회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 시대의 상식 수준에 대한 심각한 의심 또한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밝혀진 양승태 사법 농단은 한국사회에 실종된 법이 직권남용죄를 묻는 구속 절차를 통해 비로소 제 자리를 찾겠다는 발본적 노력으로 여겨진다. 동시에 안태근 성추행 실형 선고도 부조리한 법 앞에서 무수한 좌절을 통해 그 부조리를 끝없이 증명해 온 투쟁의 소산이다. 정의의 실패가 결국 절실한 정의의 도래를 이끌어낸 셈이다.

죽을 때까지 열리지 않는 법의 문 앞에서, 소송으로 거대한 법정의 위계와 지속적으로 싸우는 인간은 소설 내에선 비극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두 난해한 소설의 주인공은 죽는 순간까지 법을 지키는 문지기 앞에 맞서 문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억울하게 태형 당하면서도 부단한 저항으로 응수했다. 두 작품 속 인물이 자처한 실패는 법정의 허위를 폭로하는 동시에 절망적 대결에 내몰린 자신들의 처지가 거대한 인간 사회의 유죄임을 입증하고 있다.

폭력을 경험한 몸은 기억을 지울 수 없다. 허나 폭력을 행한 몸은 ‘기억이 안 난다’ 며 기억할 수 없음을 기억하는 탈-신체가 된다. 이런 역능은 가해자의 망각을 객관적이고 신뢰할 만한 것으로 삼는 특권화된 위계이다. “모든 것이 법정에 속해 있다”라는 티토렐리(1)의 말처럼 법은 말을 선점한 자, 말을 만든 자들의 기획이자 ‘근대, 남성, 보편, 이성’의 외피를 쓴 가해자의 법이다. 법은 유체를 이탈한 ‘기억나지 않음’을 정당한 말로 해석한 뒤 저 자신도 유체이탈 판결문을 내놓는다.

미투 이후 당사자들에게 지지의 말이 쏟아졌지만, 수년간 질기게 이어질 지난한 싸움 또한 예고했다. 가해자들은 여론을 이용해 다른 사안으로 회피한 후, 피해자를 역고소해 피고인으로 만들었다. 주변인들은 화해와 중재를 종용해 동의하지 않는 해결을 강제하거나 피해자 됨을 강요하며 시혜적 말들로 피해자의 말길을 끊었다. 시선의 위계이자 말의 위계다. 범람하는 말들 속에 조직보위를 들먹이거나 음모론과 배후설을 창조하며 가해자의 입지를 사수하는 말들이 등장했다. 촘촘히 얽힌 카르텔은 암묵적 말이 되어 피해자의 말문을 차단했다.

하여 폭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자 부조리한 세계에 할당된 말의 전쟁이다. 그럼에도 앞선 미투에 힘입어 척박한 벽을 뚫고 목소리는 비어져 나왔다. 법 앞에 서서 고통을 증언하는 그들은 실존적 곤경을 투쟁으로, 개별적 아픔을 역사화 해 말의 길을 내는 당사자들이다. 그들의 선언은 나의 당사자 됨을 다시 재위치 시킨다. 이것은 결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수한 ‘나’의 과거이자 현재진행형인 ‘나’의 이야기이며, 가해자인 ‘나’, 묵인과 방조로 현실에 공모해온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죽기 직전까지 법의 문 앞에 선 주인공에게 문지기는 말한다.

“여기서는 다른 그 누구도 입장 허가를 받을 수 없었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문을 닫고 가겠소.”(「법 앞에서」 p. 9)

끝내 포기할 줄 모르는 인간에게 진실의 문이 열린다. 그는 문 뒤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결국 자백 받았다.

어느 날 갑자기 피해자가 된 이들은 시시각각 자신의 존재됨을 지우는 법의 말 앞에 굳건히 맞섰다. 피해자의 말을 가둔 말의 수용소에서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한 발언권을 청구하는 진정한 말이 시작되었다.

이제 ‘말의 시간’이다. “미투”로 시작된 말은 말해지지 못한 자리로 이어져야 한다. “미투”로 시작된 말은 자신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말의 폭력으로부터 철저히 유실되고 이탈해 자기 말을 지닌 주체의 말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미투”로 시작된 말은 말이 닿는 곳에 파문을 일으키고 파문의 파문으로 이어져 수백 년간 저들이 쌓아올린 견고한 말의 벽에 파열을 가할 것이다.

발화점(發話)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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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송』에 등장하는 화가로 법정사무국 근처에서 판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인물이다.

필자소개
여미애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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