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운동 만난 것에 정말 감사
    서울시, 열심히는 하는데 답답해요
    [당당히 앞으로⑤-1] 권수정 정의당 서울시의원
        2019년 01월 16일 01:4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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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당당히 앞으로’ 인터뷰 : ‘장태수 정의당 대구시당 위원장’

    권수정은 1973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1945년생인 어머니는 지금도 괴산에 계신다. 딸만 넷 있는 집안의 맏딸이다. 중고등학교 때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고 잘 해서 대학은 물리학과를 들어갔으나 도중에 접었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이 선택은 권수정을 노동운동과 만나게 했고, 이후 그의 삶이 바뀌었다. 그 변화를 권수정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인터뷰하는 권수정 서울시의원

    110명 중 102명이 민주당인 서울시의회의 유일한 정의당 의원인 그는 커다란 벽을 마주한 것 같은 아득함을 느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돌파구를 마련하느라 몸과 머리가 바쁘다. 1월 7일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서 권수정 의원을 만났다.

    딸 부잣집 첫째 딸

    이광호 : 가족 관계를 간단히 소개해 달라.

    권수정 :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아버님은 경찰이셨는데 내가 30대 초반 때 돌아가셨다. 공공연맹에 파견 근무할 때 회의하다가 부고를 받았다. 아버지는 대단히 가부장적이고, 일면 폭력적이며 가정은 도외시하는 전형적인 과거 한국 남성상을 보여주신 분이다.

    이광호 : 아버지 말씀은 잘 들었나?

    권수정 : 부딪칠 일이 없었다. 가정 일에 신경을 안 쓰셨으니까. 어머님은 지금도 괴산에서 교회 명예 장로님 하면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신다. 나보다 바쁜 분이다. 우리는 딸 부잣집이다. 넷 중에 내가 장녀다.

    이광호 : 노동조합 일을 하기 전후의 삶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대학 졸업 때까지 자기 삶을 간단하게 소개해 달라.

    권수정 : 아버지는 집안일에 도통 관심이 없으셨다. 월급만 가져다 주셨다. 어머님도 일을 했다. 나는 동생들을 건사해야 했고. 두꺼비집이 나갔을 때나 다른 전기제품이 고장 나면 내가 다 고쳤다. 그때부터 책임감이라는 게 나를 붙잡아 놓았다.

    한편으로는 나서는 것을 좋아한 아이였다. 아버님도 장남이었고 집안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아이여서 귀하게 자란 것 같다. 사람들 앞에 나가서 떠들고 장기자랑 하는 걸 좋아했고 뭔가 책임 있는 것을 맡아서 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자기주장을 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을 지지해 주셨다.

    이광호 : 중고등학교 때 별명은 있었나.

    권수정 : 키가 커서 지어진 별명이 많았다. 전봇대, 뭐 이런 종류다. 이것저것 다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특히 과학과 수학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본인이 하고 싶었는데 못한 음악을 딸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다. 성가대 반주도 하고 어떨 때는 ‘출장 반주’도 했다. 피아노를 전공하라는 제안까지 받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안 한다.

    학생운동 경멸했었는데

    이광호 : 대학 생활은 어땠나?

    권수정 : 91년도에 입학했다. 잘 노는 학생이었다.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경멸하디시피 했다. 관심도 별로 없었고 운동하는 애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늘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다. 아버님 입장에서 보면 학생운동 하는 애들은 불온하고 불순한 세력이었다. 그 영향이 나를 지배했다. 집안 첫째로서 규칙 벗어나지 않은 삶을 중시했다. 내 삶에 자율성은 보장됐으나 기존 질서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데모 하는 친구들과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친구들을 끌고 다니면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동아리 활동은 주로 음악과 연관된 곳들이었다. 관현악 모임에도 갔다. 첼로를 하려고 했는데 인원이 다 차서 베이스를 했다. 그러다가 장구 치는 모임에도 나갔는데, 가서 보니까 ‘색깔’이 좀 이상해서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서 나왔다. 그런 쪽으로 촉이 발달했다.

    이광호 : 대학 때 전공은?

    권수정 : 물리학이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말렸다. 취직도 힘들고, 여자가 하기 힘들다면서. 부모님도 환영하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대학원은 카이스트에 가겠다고 부모님께 약속하면서 설득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다. 물리 공부하는 여학생이 없어서 남자 반에서 물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좋아했다. 충남대 물리학과에 들어갔지만 도중에 전공을 포기했다. 대학 3학년이 되니까 양자역학 같은 게 나오면서 따라갈 수가 없었다. 물리학을 학문으로 내가 공부하기는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슬펐다.

    그러면서 앞으로 뭘 해먹고 살까, 고민을 했다. 선생님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교직 과목도 이수했다. 4학년 때 교생 실습도 나갔다. 실습하기 위해 나가서 본 교육 현장에서 이 길도 내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150대 1 경쟁률 뚫고 승무원 됐지만

    이광호 : 왜 그렇게 생각했나?

    권수정 : 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강압적인 선생이었다. 보통 실습은 모교로 가는데 나는 행정 착오로 학교 이름은 같은 남자 중학교로 배정됐다. 아이들 행동이 용납하기 힘든 때도 있었다. 치마 입은 여선생님한테 무례한 장난도 많이 쳤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내쫓았다. 매질도 했다. 게다가 남자 선생 한 명이 어린 여학생을 상대로 성폭행을 해서 입건하는 사건도 봤다. 교육계도 아름답지 않구나, 라고 생각했다. 좀 끌려야 해 볼 텐데 내겐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이것도 접었다.

    그럼 뭘 하나, 고민하다가 대학 4학년 때 우연한 기회에 아시아나항공 다니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 그 사람에게 비행기 승무원 세계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대기업에다가 약간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직업이었다. 4학년 2학기부터 준비했다. 1995년 입사 당시 충청도 지역에서 2명 뽑았는데, 지원자 수는 300명 정도였다. 150대 1의 경쟁률이었던 셈이다.

    이광호 : 입사 하니 어떻던가?

    권수정 : 입사할 때 노동조건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고 직장을 선택했다. 외국을 많이 다닌다는 등 다른 직업이라면 하기 어려운 것을 경험한 것은 좋았지만 견디기 힘든 노동조건이었다. 한 달에 5~6일 정도만 비행이 없다. 노동자들 보호하는 조치는 없었다. 승객들의 성희롱은 예삿일이었다.

    노조 간부 일 봉사활동으로 생각해 시작

    이광호 : 승무원으로서의 성공적 경력 쌓기와 노조 활동과는 거리가 있을 텐데, 노조 활동을 하게 되면서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한 적이 없나?

    권수정 : 큰 고민 안 했다. 노조 활동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지금처럼 이렇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노동조건이 너무 힘들었고 회사는 성장하는데 우리 처우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자기들이 뽑은 인재상에 맞아서 들어온 사람들인데 이런 처우를 받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조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노조 간부를 그저 교회 선생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성탄절에 교회에서 하는 일종의 봉사 활동으로 여긴 것이다. 그 전에 노조나 노동운동에 관련된 공부를 한 적도 없었다. 노조 활동을 한다고 승무원으로서의 내 생활이 달라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노조 파업을 겪고 나서 우리 사회가 움직이는 원리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현재 사회의 구조를 알아가게 됐다. 2004년 말 공공연맹 부위원장으로 파견 활동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상급단체에 가서 공부를 좀 더 하고 와서 아시아나 노조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우리는 당시 출근하면 손톱 매니큐어 검사, 앞치마 검사를 받았고 이 과정에서 인격적인 모독을 감수해야 했다. 회사는 갈수록 커나가는데 우리는 오랫동안 임금이 오르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파업을 했는데 <조선일보> 같은 신문에서는 우리 주장은 아예 나오지도 않은 채 ‘가뭄에 웬 파업’이냐는 식으로 보도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욕해 왔던 게 잘못됐구나, 내가 생각했던 세상과 실상은 많이 다르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 늦게나마 깨닫게 된 것이다.

    특히 내가 공공연맹에서 활동을 하면서 결정적으로 시각이 바뀌게 됐다. 여러 현장도 다니고,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대의원 활동도 하면서 그렇게 됐다. 이때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기도 했다.

    노동운동 만난 것에 정말 감사

    이광호 : 상급 단체 파견을 끝내고 아시아나항공이 어려울 때 노조위원장을 맡았다.(2010~13년) 이후 민주노총 여성위원장(2014~15년)을 맡았다. 노동운동을 만나기 전후로 삶의 방향이 크게 바뀐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권수정 : 그런 기회를 갖게 된 것에 정말 감사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이전의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았을 거다. 내가 얼마나 개인적이고 내용적으로 협소한 삶을 살았을까, 생각하면 두렵기까지 하다.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다. 공공연맹에서 2년 동안 힘들게 전국 돌아다녔다. 한뎃잠 한 번 자본 적이 없던 내가 단식에 천막농성까지 했다. 그 시간을 같이 했던 많은 동지들, 각자 다른 삶의 내용 보면서 내가 살아온 삶이 단조롭고 좁았구나,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생각했다.

    이광호 : 언젠가는 현실 정치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나?

    권수정 : 전혀 없었다. 방금 말한 것처럼 공공연맹에 부위원장으로 갔을 때만 해도 연맹이나 민주노총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조직인지도 잘 몰랐다. 여성 할당제가 있어서 여성 부위원장이 있어야 됐고, 나는 여성 사업 몇 가지만 하면 되는 걸로 알았다.

    공공 부문이 우리 사회와 각각의 삶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도 잘 모른 셈이다. 하지만 공공연맹 일을 시작하자마자 정말 많은 현장을 돌아다녔다. 특히 양경규 위원장, 이성우 사무처장을 비롯한 쟁쟁한 선배들에게 많이 배웠다. 노동가요부터 산별 건설, 정치세력화, 지역운동, 조직, 교섭 체계 등 많은 부분에 대한 집중적 교육이 이뤄졌다. 이런 교육을 받고 난 후 내가 서울지하철노조 창동기지에 교육을 가게 됐다.

    정의당에 노동 목소리 더 커져야

    이광호 : 무슨 교육이었나?

    권수정 : 산별 전환 교육이었다. 이런 내가 나의 인생과 정치와 연결시키는 고민을 할 수 있었겠나. 그런 고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현장 경험과 관심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새로운 차원의 고민을 하게 됐다.

    내가 하는 노동이 감정노동이라는 것도 알게 됐는데,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법제화를 위해서는 무슨 노력을 해야 하나, 고민의 한 쪽에는 반드시 정치 영역과 맞물려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그 자리에 있기에는 정말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고, 그런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양경규, 김태진, 박정규, 이근원, 나상윤, 김철운 같은 선배들이 부족한 나를 채워줬다.

    이광호 : 서울시의회 비례대표 후보로 나서게 된 배경을 설명해 달라.

    권수정 : 그동안 노조운동을 하면서 뜻을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서 나오게 됐다. 민주노동당 분당되면서 진보정치 세력이 분열됐다. 노동 쪽에서는 노동정치연대를 만들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중에 4자 통합 형태로 정의당에 합류하면서, 분당 후 일정 기간 당적이 없는 상태였다가 그때 정의당에 입당했다.

    정의당이 노동자의 희망, 시민의 꿈을 말했지만 정말 노동자의 희망을 말할 수 있나, 그러기에는 내용이 좀 빈약한 거 아닌가, 부족한 부분을 좀 더 키워나가기 위해 노동 쪽의 목소리와 활동이 커져야 되는 거 아닌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뜻을 모아 나오게 된 것이다.

    서울시, 열심히는 하는데 답답하다

    이광호 : 6개월밖에 안 됐는데, 생각하던 것과 실제는 어떤가?

    권수정 : 생각했던 것보다 서울시가 하는 일이 방대하고, 연관된 단체나 사람도 정말 많다. 재정 규모도 크고. 서울시의회 구성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울시가 중앙정부와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의 규모나 독자적인 방향성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오랫동안 민주당이 지배해왔던 서울시는 어찌 보면 이미 관료화돼 있고, 기득권화 돼 있어서 생기가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이름만 바꿔서 사업을 진행하는 것 같다.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이광호 : 잠깐 들었는데 나도 답답하다. 이미 거의 모든 걸 알아 버린 사람 같다. 그래도 뭔가는 해야 될 테니까 어떻게 할 건가?

    권수정 : 현재 내년 예산까지 끝낸 상황에서 상상을 많이 하고 있다.

    작년 12월 5일 서울시의회 예결위 보이콧 기자회견 모습

    35조7천억 원이 넘는 서울시 예산은 지난해 12월 14일 통과됐다. 권수정은 12월 4일 민주당이 계수 소위 독점을 비판하며 기자회견을 가졌으나 메아리는 없었다.

    권수정 : 의회 들어와서 6개월 동안 공부하고 들여다보니까 서울시 차원에서는 최선을 다 해서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책의 경우도, 청년들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의 가장 고민이 되는 주거 문제에 대해 청년주택 고민도 하고 있다. 자원이나 재정 등 필요한 것들을 동원해서 하려고 한다. 아이 키우는 문제도 부족한 점은 있지만 현재 가능한 시스템 안에서 서울시가 동원할 수 있는 건 모두 동원해서 노력하고 있다. 이런 시스템 내부에서 변화를 준다면 올해 10만 원 주는 것을 내년에 20만 원으로 올린다거나, 1년 주던 것을 2년 주는 것으로 늘이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당 의원으로서 10만 원 주던 것을 20만 원으로 올려줘, 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이 든다. 이런 정도면 민주당 의원들 가운데 열려 있는 사람들은 함께 해 준다. 서울시 각종 조례 표현 중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흔쾌히 동의해 줬다.

    그런데 이런 수준의 일이 내가 앞으로 임기 동안 해야 할 일인가, 내가 만약 서울시장이라면 이 정도로 하는 게 맞는가, 과연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약간 좀 허무주의적이 되기도 한다. 물론 행정감사를 통해 비리를 지적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걸 떠나서 앞으로 남은 3년 반 동안 서울시에 대해 내가 말할 방향은 도대체 ㅁ무엇이어야 할까, 이걸 잡기 위해 요즘 많이 고민하고 있다.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민원 오는 것 처리해야 하고,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확대하고, 위탁 사업의 질을 높이고, 작년에 지적해서 개선했지만 서울형 생활임금 적용 범위를 넓히고, 여성 차별을 축소해야 하는 일, 아무도 건들지 않았던 성인지 예산 편성도 내가 처음 지적했던 것처럼 이런 건 기본적으로 내 목소리를 내야 할 일이다.

    이런 걸 하나의 축으로 한다면 다른 하나의 축은 자본 중심의 생산과 소비 시스템 안에서 아등바등 따라가며 살아가는 현실을 넘어서 서울시에서만이라도 공정 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은 무엇일까, 공유 경제가 이를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종류의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 구조가 변해 가면서 노동력의 형태가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다. 노동자도 아니고 사업자도 아니고 자본가도 아니고 복합적인 이상한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이익이나 사회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건가, 이런 시스템 어떻게 안정화시킬 것인가 하는 점, 이런 것에 대해서도 상상 속에서 고민하고 있다. 여전히 정리는 안 되고 있다.

    이광호 : 진보정치 일선에서 외롭게 마주보고 있는 문제라기보다 진보정당 앞에 놓여 있는 과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권수정 : 그렇다. 이밖에 내가 노동운동 출신이다 보니 노조 탄압 등 많은 의제 많이 나온다. 이들을 어떻게 묶어낼 것인가 하는 것도 내겐 숙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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