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뿌리 쫓다 운동 만나
70년대생, 이제 당 전면에 나서야
[당당히 앞으로④-1] 장태수 정의당 대구시당 위원장
    2018년 12월 04일 09: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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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수는 197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91년 영남대학에 입학한 이후 4년 동안 운동을 ‘빡세게’ 했다. 96년 졸업 후 6년 동안 주민 밀착형 지역 운동을 했다. 만 30세 되던 2002년, 대구 서구에서 기초의원에 당선된 이후, 2006년에 낙선했다. 이후 2010년, 2014년 같은 지역에서 당선된 3선 구의원이다. 올해 그는 대구광역시 의원에 도전했으나 낙선했다. 그가 떠난 이후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는 ‘노회찬의 후배’들을 만나는 인터뷰 네 번째 주인공 장태수를 지난 달 27일 정의당 대구시당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현재 정의당 대구시당 위원장이다.

장태수 대구당 위원장(사진=정의당 대구시당 총무국장 김지훈)

민주당 ‘응칠부대’ 주목

이광호 : 내 주변에 진보정치 운동을 하는 사람 가운데는 유난히 71년생이 많다.

장태수 : 더불어민주당에서 최근에 ‘응칠부대’를 만들었다. 70년대생 모임이다. 정의당도 당직 선거든 총선에 비례대표 후보든 70년대생이 주요 당직을 맡아 당 전면에 배치되고, 주요 공직에 진출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연령이 가지는 세대적 특성도 그렇고 당 활동 경력으로 봐도 다들 당을 책임질 수 있는 경력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향후 우리 당을 10년 동안 주도할 수 있는 힘들이다. 이들이 네트워킹 되거나 조직되지 않는 게 아쉽다.

어떤 매체에서는 민주당 응칠세대의 모임을 두고 20년 집권의 그림 중 하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광호 : 요즘 한창 뜨고 있는 박용진 의원도 71년 생으로 알고 있는데.

장태수 : 그렇다. 민주당 응칠이들의 모임은 현역 의원과 일부 당직자들이 함께 하고 있다. 지역 순회 콘서트도 열고 있다. 우리 당의 당내 정치 기획으로 할 부분이 그런 것 아닌가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어서 좀 아쉬웠다.

이광호 : 선거법 개정할 생각은 안 하고 콘서트나 다니니 문제다.(웃음) 낙선 후 근황을 얘기해 달라.

장태수 : 빈둥거리며 좀 놀고 있다.(웃음) 대구시당 위원장 직책을 맡고 있어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걸 기본으로 하고 있다. 친구들과 만나 술도 마시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면서 오랜만에 약간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이광호 : 오랜만의 여유 아닌가.

장태수 : 맞다.

중학교 무상급식 도입 성공 이끌어

이광호 : 대구시당 현안은 무엇인가?

장태수 : 얼마 전에 끝난 현안이 있다. 대구는 무상급식 비율이 전국 꼴찌다. 현재 초등학교까지만 무상이고, 중학생은 저소득 자녀 중심 차등 급식이다. 시와 시 교육청이 내년도에 중학교 1학년에 한해서 무상급식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의당은 중학교 전체 전면 무상급식을 내걸고 지역 내에서 시민사회에 연대활동을 제안하고, 대구시의회에 찾아가서 전면 무상급식의 필요성을 알렸고, 주민들에게 캠페인을 했다. 학부모도 조직해서 함께 싸웠다. 지난주 목요일 대구시와 교육청이 손을 들었다. 중학교 전체 무상급식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광호 : 지역 언론에서도 관심 가질 주제인 것 같다.

장태수 : 그렇다. 이 지역 언론에서 많이 다뤘고, 시와 교육청은 여론에 부담을 느꼈다. 거기다가 대구광역시 유일한 무소속 단체장인 달성군수가 달성에서만이라도 전면 무상급식을 하겠다고 치고 나왔다. 언론인 출신인데 흐름을 알았는지 이런 선언을 한 것이다. 대구가 다른 광역 단위에 비해서는 돈이 없다고 해서 무상급식 유보 정책에 면피를 할 수 있었는데, 달성군의 선언으로 그런 논리가 설 곳을 잃은 것이다.

이광호 : 운동의 주체로 당의 주도적으로 나섰나?

장태수 : 지역에서 사회복지 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우리복지 시민연합)와 함께 전교조에 우선 연락을 해서 공조를 취했다. 2012년에도 초등학교 친환경 무료급식을 요구하면서 내가 단식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같이 나와 단식을 한 팀들이다. 시민단체의 호응과 다른 정당도 일부 참여했고, 특히 학부모 단체를 조직한 것이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연애하면서도 사회주의 혁명 꿈꿔

이광호 :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대학까지 다녔다. 조용히 대학을 다니지는 않았던 걸로 알고 있다.(웃음) 대학 4년 생활을 소개해 달라.

장태수 : 나는 늘 궁금했다.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그 원인을 쫓아가다 보니 학생운동과 만났다.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공명심도 있고,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에다 주목받고 칭찬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광호 :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렇다.

장태수 : 그때는 연애를 하면서도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다.(웃음) 자신만만하고 호기롭던 시절이었다.

이광호 : 총학생회장 출마를 했다고 들었다.

장태수 : 출마했다 낙선했다. 4학년 때라서 졸업에 대한 부담도 있었지만, 학교에 있는 선후배나 친구들에게 마지막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섰다. 낙선 후 반 년 동안 학교생활을 더 했다.

이광호 : 학점은 제대로 땄나?

장태수 : 졸업 평점은 2.6 수준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조교한테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는 내가 꼴찌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웃음) 내가 졸업할 무렵 ‘진보적 사회 진출’ 문제가 주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예컨대 우리들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했던 총학생회장 등 학생운동의 주요 지도부들이 졸업하면서 학교 때 지향했던 가치와는 많이 차이 나는 개인적인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하는 각오를 다졌다.

가난의 뿌리는 자본주의

이광호 : 가난의 뿌리는 찾아냈나?

장태수 : 자본주의 체제였다. 자본주의가 가지는 원천적인 불평등, 생산 과정에서의 착취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착취는 당하지만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당사자들과 함께 외쳐 주고, 행동도 하고 싶었다. 당사자들은 자각과 행동을 할 사회적 힘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다. 노조가 있지만 그들은 노조를 만날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불평등과 착취 구조가 개선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광호 : 모범 답안을 찾아낸 것 같다.(웃음) 대학 졸업하던 해 국회의원 선거를 도와줬다고 들었다.

장태수 : 무소속으로 나온 김기수 후보를 도왔다. 학생 운동할 때 우리도 정치를 해야 하고,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룹의 선배였다. 학생과 학교 밖에서 정당 만들자는 선배들이 자연스럽게 인연이 닿아 출마했고 선거운동을 함께 했다.

사실 내가 처음 선거운동에 뛰어들은 때는 1991년 대학 1학년 때였다. 5.16 쿠데타 때 없어진 후 31년 만에 치러진 지방 선거였다. 장명숙 선배가 대구 시의원에 출마했다. 서구 비산동 일대에서 한 달 정도 선거운동을 도왔다.

1996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서구 을에 출마한 김기수 선배 선거운동을 했다. 내 셋째 누나가 마침 이 지역에 살고 계셨다. 내가 후보를 수행해야 돼서 매형의 정장 옷을 빌려 입기도 했다. 선거운동에 필요한 거의 모든 일을 해야 했다. 수행도 하고, 합동 연설회 때 유세장에서 고함도 지르고, 자전거 캠페인도 하고.

이광호 : 그런 경험이 나도 한 번 직접 후보로 뛰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나?

장태수 : 정치를 잘 할 사람을 잘 도와주는 사람을 하고 싶었다.(웃음)

이광호 : 졸업 후 6년 지나서 서구 의원에 출마했다. 6년 동안 어떻게 지냈나?

장태수 : 졸업하면서 바로 진보정치연합 회원으로 가입하고 언젠가는 회원 활동 열심히 하겠다고 각오했다. 하지만 당장 학자금 융자 빚도 갚아야 했고, 먹고 살 것도 벌어야 했다. 학원 강사를 1년 정도했다. 강사 생활 1년, 채무를 갚고, 먹고 살 거리도 어느 정도 마련했다. 학원 강사를 하면서 내가 언제부터인가 학생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97년 대선 때 대구에 권영길 선거운동본부가 꾸려질 무렵 부족한 일손을 돕기로 했다. 그 당시 진보정치연합은 가난한 사람이 많이 사는 서구에서 노동자 대상 야학, 주민 프로그램 운영 등을 통해 당 이전의 준 정치 조직으로서 주민을 만나는 접촉 공간이었다. 이런 경험이 축적돼 나중에 서구 문화복지센터를 세우는 밑거름이 됐다.

대통령 선거를 마치고 진보정치연합 회원으로서 서구 문화복지센터 사업 계획을 짜는 데 거들었다. 그때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냈는데, 결국 ‘아이디어 낸 놈’이 책임져야 한다는 그 유명한 ‘법칙’에 따라 센터 상근자로 일을 하게 됐다.

이어 실업극복 국민운동본부에서 법률 상담을 했다. IMF 직후 임대차 분쟁이 엄청나게 많이 발생했다. 예를 들면, 전세금 빼서 치킨 가게를 차렸는데 치킨 가게 주인이 보증금 반환을 빼 주지 않아서 분쟁이 발생했는데, 사실 세를 준 가게 주인도 어려워서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와 비슷한 민원 상담이 폭주했다. 그래서 임대차 상당실을 따로 개설했고, 거기서 실장을 맡아 양적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상담을 했다. 전화 상담은 물로 사무실로 직접 찾아오는 사람을 대상으로 상담했다. 전화가 폭주해서 사무실에서 상담할 때는 전화기를 아예 내려놓아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구 비산동 주민들과 만났고, 이들과 함께 활동하는 사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지역에 진보정당 만드는 일을 지속했다. 그러다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때 대구시당 기획국장을 맡았다. 당이 만들어진 후에는 문화복지센터 일을 대폭 줄이고 당 활동에 전념하게 됐다.

60.5% 득표로 당선되다

이광호 : 그러다가 선거에 출마하기로 한 건가?

장태수 : 2001년 말부터 다음해 치러질 지방선거에 우리도 덤벼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 당시 서구에서 출마할 선배 한 명이 있었다. 나는 서구가 아니라 수성구 지구당 운영위원이었다. 나는 처음에 아닌 것 같다며 고사했는데, 사무실에서 일하던 선배들이 96년부터 지역 사업을 통해 동네 사람을 제일 만난 사람이라는 이유로 출마를 권했다. 우리가 유권자 여론 조사를 했는데 결과도 괜찮았다. 나가면 30%는 넘겠다는 판단이 섰다. ‘쪽팔리지는 않겠다.’는 믿음을 가지게 됐다.

이광호 : 첫 출마에 60.55%라는 놀라운 득표율을 기록했다. 원인이 뭔가?

장태수 : 당시에는 정당 공천이 아니었다. 후보 번호도 가나다로 돼 있는데, 내가 ‘가’ 번을 받았다. 이 영향도 조금 있었다. 주민들에게 나는 이야기 거리가 있는 후보였다. 이미 말한 것처럼 상담실장으로서 주민들과 접촉면이 넓어졌고, 실직 가정 생계비 지원 사업팀장으로 한 일도 주민들에게는 이야기 거리를 제공했다. 실제로 선거 운동 기간 만난 동네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상담했던 기록을 가지고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하기도 했다. 주민들 가운데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장태수 후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었다. 가난한 지역에서 없는 사람 편에 서서 도와준 후보라는 점이 지역 주민들에게 어필했던 게 높은 득표를 기록한 요인 중 하나로 보인다.

이와 함께 당시 선거는 한 개 동(비산동)에서 한 명 뽑는 거라서 우리 쪽이 역량이나 세력이 크지는 않았지만 한 개 동 선거 운동은 커버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같이 뛴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했다. 우리가 작전도 잘 짰다. 상대 후보 약점과 그 후보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잘 파악해서 상대가 싫어서 나를 찍을 수 있게 했다. 정말 다들 열심히 열정적으로 뛰었다.

이광호 : 선배인 김기수 얘기로는 후보 요인도 컸다고 하던데. 젊고, 잘 생기고, 말 잘하고.(웃음)

장태수 : 내가 낯도 좀 가리고 그런 편인데, 일단 일을 시작하면 의식적으로 친화력이 생기도록 노력한다. 유권자들인 동네 분들은 젊은 후보가 ‘아버님, 어머님’ 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보고, 기특해 한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후보는 없었다. 합동 유세 때도 복장부터 자세까지 신경을 많이 썼다. 연설문 보고 읽는 식의 유세도 안 했다. 동네 분들이 젊은 놈이 예쁘다, 라고 생각해 주신 것 같다.

자만심이 불러온 패배

이광호 : 그런데 2006년에는 민주노동당 후보로 나와서 낙선했다. 득표율 10.7%. 민주노동당 디스카운트가 50%포인트나 되나? 의정 활동을 잘못한 거 아닌가? 뭔 일이 있었나?

장태수 : 자만심이었다. 2006년 선거는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했다. 나는 재선 도전 후보였고, 또 한 명의 지역구 후보와 비례후보를 냈다. 사실 나는 무조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지역구 출마 후보를 반드시 당선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화력도 그쪽에 집중했고 비례를 노리는 선거 운동에 집중했다. 심지어 선거운동 기간에도 돈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나는 당선될 것이라는 자만심 때문이었다. 정당 공천과 중선거구제 등 달라진 선거 환경이나 제도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비산동에서야 장태수를 알겠지만 새로 추가된 4개 동에서는 내가 서구 의원을 했는지도 모른 사람이 대부분인데, 그 부분에 대한 준비 없었다.

이와 함께 선거 직전에 관변단체 보조금 비리를 크게 터뜨렸다. 지역 언론도 크게 보도했다. 하지만 관련 단체 특히 보훈단체에서 극렬하게 반발했다. 멱살잡이는 물론 물리적 폭력 행사까지 이어졌다. 그들 사이에 장태수는 우리 편 아니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동네 가게를 하면서 주민을 많이 만나면서 사실상 지역 여론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그 영향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결론은 자만심 때문이었다.

이광호 : 2010년에는 진보신당 후보로 나와서 17.69%를 얻어 3위로 당선됐고, 2014년에는 노동당 후보로 23.61%를 얻어 2위로 당선됐다. 지지율이 높아지는 게 눈에 띈다.

장태수 : 선거가 끝나고 2년 정도 당 사정이 좋지 않았다. 분당도 되고. 하지만 우리는 주민 속에 들어가는 활동을 계속했다. 주민에게 필요한 일, 아이에게 필요한 일을 했다.(2010년 선거 벽보에는 서구 어린이날 큰잔치 준비위원장, 어린이 도서관 햇빛따라 설립위원장이라는 경력이 적혀 있다) 시간이 축적 되면서 가까이에서 우리 민낯을 본 사람들이 열심히 도와줬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열심히 보여줬고, 이를 본 주민들이 입소문을 내줬다. 짧지 않은 기간 일관된 모습으로 주민들에게 다가간 모습을 보고 주민들이 신뢰를 하게 됐다. 우리 동네에 이런 후보, 이런 의원 한 명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갖을 만한 신뢰를 쌓은 것이다.

4개 정당 당적을 가지다

이광호 : 2018년 광역 의원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정의당 후보로 나와서 29.21%를 얻고 2위를 기록하면서 낙선했다.

장태수 : 후보는 3명. 자유한국당 후보가 50% 이상 득표했고, 공천 못 받고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나온 현직 시의원이 3등을 했다.

이광호 :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노동당, 정의당, 출마 당시 당적이다. 무소속까지 하면 무려 5개다.

장태수 : 지역 주민 보기엔 다 같은 당이다. 가까운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왜 거기를 고집하나, 한나라당으로 와라, 아니면 무소속으로라도 나와서 당선된 다음에 다시 가라, 당이 표를 다 깎아 먹는다, 이런 얘기다. 지지해 주는 유권자들이 “당 말고, 아 보고 찍어라. 아는 좋다.”고 얘기해도 상대방이 “아 좋은 건 아는데, 당이 되겠나?” 하면 할 말이 없다고 한다. 솔직히 나를 지지하는 분들도 당은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난 그냥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한다.

이광호 : 현재 대구 지역 진보정당 기초, 광역 의원 현황은 어떤가?

정태수 : 농사를 잘못 지었다. 3선인 정의당 수성구 의원 김성년 의원 말고는 없다. 대구에서도 민주당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민주당 후보 중에서는 투표 며칠 앞두고 포기하고 중단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까지 당선됐다. 생각보다 훨씬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정의당 표가 그쪽으로 간 것도 있고, 한국당이 싫어서 반작용으로 간 표도 있다.

자유한국당은 이제 대구밖에 없다. 미워도 다시 한 번 대구를 지켜 달라며 읍소하는 작전으로 나갔다. 특히 선거 중반에 접전 지역에서 많이 그랬다. 언론에서 민주당 바람 보도를 하면서 한국당 표가 결집됐다. 진보정당 후보들에게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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