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젓가락나물의 이름 유래기
[푸른솔의 식물생태] 말과 이름이 가지는 역사 찾기
    2018년 12월 12일 10: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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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곰취’라는 이름의 유래…’일제의 잔재? 근대적 조선식물 연구?”

1. 놋젓가락나물이란?

놋젓가락나물<Aconitum volubile var. pubescens Regel(1861)>은 미나리아재비과 투구꽃속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로 길이가 2m 되는 덩굴성 식물이다. 주로 중부지방 이북의 높은 산의 숲속 또는 숲 언저리에 자란다.

꽃은 연한 자주색으로 8~9월에 총상꽃차례를 이루며 핀다. 투구모양으로 생긴 꽃받침잎은 꽃의 외형을 이루며, 그 안에 꽃잎과 수술과 암술이 있다. 잎은 어긋나며 3~5갈래로 깊게 갈라진다. 줄기는 덩굴성을 이룬다. 열매는 5갈래이고 10~11월에 성숙한다. 열매의 각 부위마다 갈라지는 선(봉선)이 있으며 씨앗이 산포될 때 그 봉선이 갈라지면서 씨앗이 나온다(이런 열매를 골돌과라고 한다). 뿌리는 뾰족한 물체 모양의 덩어리를 형성한다. 이 뿌리를 한약명으로 초오(草烏) 또는 초오두(草烏頭)라 하며 중풍 등을 치료하는 약재로 사용하는데 강한 독성이 있으므로 전문가의 처방이 필요하다.

사진1. 놋젓가락나물의 전초; 2018/9/9/ 강원도 금대봉

사진2. 놋젓가락나물의 꽃; 2018/9/9/ 강원도 금대봉

놋젓가락나물은 ‘놋젓가락’+’나물’의 합성어로 문언대로 해석을 하면 놋젓가락을 닮았고 나물로 식용한다는 뜻이다. 뜻을 분석을 하고 나면 이름이 제대로 붙은 것인지 혼란스럽다. 덩굴성 식물인데 왜 직선의 쇠로 제작된 놋젓가락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독성이 강한 식물인데 왜 나물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을까?

놋젓가락나물이라는 이름에 대한 제대로 된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나는 식물명이 형성되어 발전해 온 역사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지식과 근대식물분류학이 결합되는 변곡점에 대한 이해이다.

식물명의 역사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식물 이름이 누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이름을 사용하자고 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여 삶을 영위한 사람들이 무수히 부르고 다듬어지고 상호 교감하여 온 것이며 식물과 맺어온 관계를 반영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한반도 분포 식물에 대한 전통지식과 근대식물분류학이 만나는 변곡점에는 수차례 언급한 바처럼 1937년에 저술된 ‘조선식물향명집’이 놓여 있다. 이것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면 독극성 식물을 나물로 식용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고, 나물이 나물이 아니라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실제로 그런 주장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놋젓가락나물은 놋으로 만든 젓가락을 닮았고 나물로 식용하였다. 그래서 놋젓가락나물이다.

2. 투구꽃과 놋젓가락나물의 구별

사진3. 투구꽃의 꽃; 2015/10/3/ 경기도 남한산성

사진4. 투구꽃의 전초; 2018/9/8/ 강원도 태백산

사진5. 투구꽃의 열매 및 열매자루의 털(퍼지고 곧은 털이 있음); 2017/10/15/ 경기도 남한산성

투구꽃<Aconitum jaluense Kom.(1901)>과 놋젓가락나물은 두 종 모두 미나리아재비과 투구꽃속(Aconitum)에 속하므로 그리 멀지 않은 근연관계에 있는 식물이다. 투구꽃은 놋젓가락나물에 비하여 분포지역이 넓기 때문에 경기도 인근의 야산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는 식물이다. 이 역시 뾰족한 모양의 덩이뿌리를 한약명으로 초오(草烏) 또는 초오두(草烏頭)라 하여 중풍 등을 치료하는 약재로 사용한다. 이 역시 강한 독성이 있다. 투구꽃은 꽃의 형태가 투구를 닮았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두 종의 꽃의 형태와 구조는 비슷하고 큰 차이가 없다. 꽃을 분해하여 보면 꽃잎처럼 생긴 것은 꽃받침이고, 그 안쪽에 꽃잎이 있다. 뒤영벌 같은 다소 큰 곤충이 꽃잎에 있는 꽃꿀(花蜜, nectar)을 먹기 위해서 꽃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꽃의 수정이 이루어진다.

두 종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구별된다고 한다(Chong-wook Park, “The Genera of Vascular Plants of Korea(초오속)”, 아카데미서적, 176면)

위와 같은 구별기준에 근거하면 야생에서 만나는 종은 대체로는 구별이 가능하지만, 투구꽃의 줄기 끝이 간혹 덩굴성을 이루는 경우가 있고 작은꽃자루(소화경)의 털이 사라지거나 누워 마치 굽은 털처럼 보이는 개체들도 상당히 있기 때문에 두 종의 구별이 쉽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경우에는 다 자란 식물의 줄기와 잎자루의 털을 살피면, 대개는 투구꽃이 털이 없이 맨듯한 반면에 놋젓가락나물은 줄기와 잎자루에 털이 많으므로 이것을 구별 지표로 사용할 수 있다.

사진6. 놋젓가락나물의 덩굴성 줄기의 모습; 2018/9/9/ 강원도 금대봉

사진7. 놋젓가락나물 줄기와 잎자루의 털(긴털이 밀생함) ; 2015/9/20/ 강원도 태백산(사진촬영 : 숲속여행)

사진8. 놋젓가락나물의 열매와 열매자루의 털(굽은털이 있음); 2017/10/14/ 강원도 금대봉

3. 놋젓가락나물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

(1) 한국 식물명의 역사성에 대한 고려

위에서 투구꽃과 놋젓가락나물을 구별하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위 설명은 하나의 정해진 인식의 틀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투구꽃과 놋젓가락나물을 서로 다른 종(種, species)으로 보는 것이다. 종의 개념은 식물을 분류하고 인식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분류학적 단위(taxonomic unit)인데, 이것은 칼 폰 린네(Carl von Linne, 1707~1778년)가 확립한 근대식물분류학의 방법에 따른 것이다. 흔히 종은 개체 사이에 교배가 가능한 무리의 생물로서 다른 생물군과는 생식적으로 격리된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투구꽃과 놋젓가락나물을 구별한다는 것은 인식의 틀을 린네의 식물분류학의 방법론에 근거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 린네의 근대식물분류학에 따른 종을 기본으로 한 분류방법과 각 종마다 부여된 학명을 다수의 사람들이 최초로 인식한 것은 대한제국의 말미인 1910년 5월 31일이었다. 이미 1905년에 이루어진 을사조약에 의하여 국권을 침탈한 일제는 산림국과 임업사무소가 사용하는 공문서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대한제국 농상공부대신 명의로 고시 제9호 ‘화한한명대조표(和韓漢名對照表)’를 공포하였다. 여기에 일제는 한반도 분포 주요 수목에 대한 일본명 ‘정명’과 ‘통속명’ 그리고 ‘한국명'(한글)과 ‘통속명’을 함께 기록하면서 더불어 각 종이 속하는 과명과 학명을 함께 실었다.

그렇다면 1910년 이전의 우리에게 식물을 분류하고 인식하는 틀이 없었을까? 오래전부터 식물은 먹을거리이자 병을 고치기 위한 약재이었고, 땔감이나 건축, 가구재, 악기를 만드는 중요한 소재이었으며, 때로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심미적 대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식물을 인식하는 틀과 분류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인식의 틀에 따라 식물을 분류하고 그에 따른 이름이 생겨났을 것이므로 식물명의 유래를 찾는다는 것은 그러한 식물명이 만들어진 시대를 확인하고, 그 당시의 인식의 틀을 추적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작업 없이 옛날부터 사용하였던 이름에 대하여 현재 남아 있는 말과 시각을 위주로 유래를 추적하게 되면 역사와 과학을 함께 잃어버리게 된다. 소위 민간어원설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2) 놋젓가락나물을 종으로 인식한 기록들

사진9.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조선식물향명집』(조선박물연구회, 1937), 64쪽

Aconitum volubile var. pubescens Regel(1861)이라는 특정한 종에 놋저까락나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저술한 조선식물향명집이 최초이다. 학명 중 속명 Aconitum은 어원이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미나리아재비과 투구꽃속 식물을 지칭하고, 종소명 volubile은 라틴어로 ‘감긴, 감겨 있는’이라는 뜻으로 줄기가 덩굴성을 이루고 있는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변종명 pubescens는 ‘잔털이 있는’이라는 뜻으로 작은꽃자루에 굽은 잔털이 조밀하게 분포하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놋젓가락나물에 대한 중국명 卷毛蔓乌头(juan mao man wu tou)는 곱슬곱슬한 털이 있는 덩굴성 烏頭(오두)라는 뜻이다. 烏頭(오두)는 뿌리에서 나온 줄기가 2~3갈래로 분기하는 모양이 까마귀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유래한 이름이다. 일본명 츠루우지(ツルウヅ, 蔓烏頭)는 덩굴로 자라는 우지(ウヅ, 烏頭)라는 뜻에서 붙은 명칭이다.

사진10. 모리 다메조(森爲三), 『조선식물명휘』(조선총독부, 1921), 151쪽.

사진11. 이시도야 츠토무(石戶谷勉), 『조선한방약료식물조사서』(조선총독부, 1917), 33쪽.

조선식물향명집 이전에 A. volubile var. pubescens 종에 대한 식물명을 기록한 것으로 경성제대 생물학 교수를 역임한 모리 다메조(森爲三, 1884~1962)의 조선식물명휘(1921)와 조선총독부산하의 임업시험장 소장과 경성제대 약학식물 교수를 역임한 이시도야 츠토무(石戶谷勉, 1891~1958)의 조선한방약료식물조사서(1917)가 있다. 모리 다메조는 일본명과 일본에서 사용하는 한자명만을 기록하였고 한글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조선명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이시도야 츠토무는 조선과 중국의 약학식물의 연구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허준이 저술한 동의보감(東醫, 1613))에서 ‘바곳’이라는 한글명을 찾아 기록하였다. 이시도야 츠토무는 위 책에서 A. volubile var. pubescens 종뿐만 아니라 당시 사용하였던 학명 A. triphyllum 종과 A. uchiyamai 종에도 동일하게 동의보감에 기재된 ‘바곳’이라는 한글명을 함께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동의보감에서 한자명 草烏(초오)라는 명칭에 대응하여 한글명 ‘바곳’을 기록한 것이 특정한 종의 식물이 아니라, 약성이 비슷한 여러 종의 식물을 포함하여 두루 불렀던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3) 놋젓가락나물을 기록한 옛 문헌

사진12. 유희(柳僖), 『물명고(物名考)』, 1824년 저술 추정(서울대규장각 보관 가람문고본), 草 16쪽.

놋젓가락나물에 대응하는 한글명을 기록한 옛문헌으로는 19세기 초엽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광재물보와 조선후기 실학파로 분류되는 유희(1773년∼1837년)가 1824년에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물명고가 있다.

– 광재물보(저자미상, 19세기 초엽) : 烏頭, 놋져나물, 바곳
– 물명고(유희, 1824) : ​草烏頭, 놋져나물, 바곳

옛문헌 구급방언해(1466)는 놋젓가락을 ‘놋졋, 銅筯’으로, 역어유해(1690)는 놋그릇을 ‘놋그ㄹ.ㅅ, 銅椀’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위 문헌의 ‘놋뎌’는 놋젓가락의 옛말이다. 따라서 광재물보와 물명고는 놋젓가락나물의 옛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광재물보는 한자명을 烏頭(오두)로 하는데 반하여 물명고는 초오두(草烏頭)로 기록한 것에서 차이가 있다. 광재물보와 물보에서 한글명 ‘바곳’에 대하여 명물기략(1870) 및 한불자전(1880)은 옛날에 사용한 송곳의 일종이라고 해설하고 있으므로, 식물명에 붙은 바곳이라는 이름은 약용하는 뿌리가 덩이를 형성하는데 그 모양이 송곳처럼 뾰족한 모양인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세기 이전에 광재물보에 기록된 오두와 초오두를 기록한 문헌 중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향약채취월령(유효통, 노중례, 박윤덕등, 1431) : 草烏頭, 波串-波串(파곳)은 이두식 차자 표기로 ‘바곳’을 표기한 것이다.
​- 구급간이방언해(윤호등, 1489) : 草烏, 바곳
– 동의보감(허준, 1613) : 草烏, 바곳

​광재물보와 물명고 이전의 문헌들은 草烏頭(초오두) 또는 草烏(초오)라는 명칭에 대하여 한글명을 모두 ‘바곳’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르러 같은 이름에 느닷없이 ‘놋져나물’이라는 이름을 추가하여 함께 기록하였던 것이다.

(4) ‘나물’이라는 이름의 유래

놋젓락나물의 유래를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먼저 놋젓가락나물에 ‘나물’이라는 이름이 왜 들어갔는지를 살펴보자. 현재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나물에 대하여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놋젓가락나물은 독성이 아주 강한 식물인데 왜 ‘나물’이라는 이름이 들어갔을까 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긴다. 과연 식용할 수 있는 식물이고 실제로 식용하였을까?

사진13. 유희(柳僖), 『물명고(物名考)』, 1824년 저술 추정(서울대규장각 보관 가람문고본), 草 1쪽.

​유희의 물명고 중 식물명을 기록하고 있는 무정류(無情類) 부분의 서두에서 초본성 식물을 초(草)로 칭하고 초본성 식물에 관한 중요 용어를 정의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한자 “菜”(채)에 대하여 “나물 草可食 蔬 蔌 仝”이라고 기록하였다. 번역하자면 “菜(채)는 ‘나물’이라고 하는데 먹을 수 있는 풀을 의미한다. 蔬(소)와 蔌(속)이 같은 뜻이다”이다.

나물은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으므로, 그 본문에 나오는 草烏頭(초오두)를 ‘놋뎌나물’이라고 한 것은 당연히 먹을 수 있는 식물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물명고는 구황식물을 기록한 자료가 아니므로 실제로 ‘놋뎌나물’을 식용하였는지 여부나 어떤 방법으로 식용하는지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았다.

사진14. 하야시 야스하루(林泰治), 『구황식물과 그 식용법(救荒植物と 其の 食用法』, 동도서적(1944).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의 소장으로서 조선식물향명집의 제1저자 정태현 박사(1882~1971)와 함께 ‘조선산야생약용식물'(1936)을 함께 저술하였던, 하야시 야스하루((林泰治, 생몰연도 미상)가 1944년 조선의 구황식물을 정리한 ‘구황식물과 그 식용법'(1944)은 일본명을 츠루우지(ツルウヅ, 蔓烏頭)라고 하고 조선명을 ‘ノッチイヨクカルナムル'(놋저까락나물)로 하였으며, 한자로는 草烏(초오)라고 하고서 “[식용법] 봄에 새싹을 데쳐서 말리거나 또는 갈무리했다가 뒤에 묵은 나물로 하여 먹을거리로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전초에는 독이 있어 잘못 식용하면 부작용이 생긴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즉, 전초와 뿌리에는 독이 있어 식용할 수 없으나 새싹은 독이 적어 나물로 시용할 수 있다는 식용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문헌은 일본인이 기록하였으나, 물명고 기록의 연장선에서 보자면, 조선에 분포하는 식물에 대한 조선의 구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식물 전체가 독성을 가지는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새싹에는 독성이 약하고 그 때 채취하고 데쳐서 독성을 제거하는 지혜는 순전히 조선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싹조차 독성을 제거해야 하는 정도로 여전히 독이 있는데 왜 이러한 식물을 먹거리로 해야 했을까? 이 이름을 기록한 19세기 초반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지배체제는 끊임없이 흔들려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상황에서 인구는 증가하는데 굶주려 끼니를 때우기 힘든 상황. 그 후 일제강점기는 국권이 상실되고 식민의 수탈이 더해져 독성이 있는 식물이라도 독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아서 먹어야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 동안 약용식물로 부르던 ‘바곳’이라는 이름에 먹는 식물이라는 뜻에서 ‘나물’이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그렇게 먹거리가 된 식물이 바로 ‘놋져나물’이었고 그 이름이 조선식물향명집의 ‘놋저까락나물’로 이어졌다는 것은 이름이 생기고 전승되어 온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약용식물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프지 않아도 약용보다는 하루의 먹거리를 앞서 생각해야 하는 시대 상황이 만들어 낸 이름이 놋져나물이기도 하였다.

물질적으로 풍부해지고 독이 있는 식물을 먹어야 했던 상황이 나아지면서 놋젓가락나물이나 기타 투구꽃속 식물을 식용하는 습관은 없어졌거나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식물명에 남은 그 강한 기억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우리에게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상황이 나아졌다고, ‘나물’이 과연 먹을 수 있는 의미로만 사용되었을까 하는 데는 의문이 들고 그래서 나물이 나물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한 지적 인식은 역사가 사라진 오히려 더 빈곤해지고 있는 아닌가?

(5) ‘놋저가락’이라는 이름의 유래

사진15. 놋젓가락<사진 : 서울역사박물관>

​놋젓가락도 놋쇠로 만든 것이고, 곧게 뻗은 놋젓가락이 왜 덩굴성 식물의 이름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놋져나물’을 기록한 물명고(1824)에 있다.

물명고는 물명(物名) 즉, 물건의 이름들을 기록하고 해설한 자전류(字典類)의 문헌이다. 현대로 치면 사전인 셈이다. 물명고는 물명을 크게 유정류(有情類), 무정류(無情類), 부동류(不動類)와 부정류(不精類)로 나누었다. 유정류와 무정류는 살아 있는 생물에 관한 내용이고, 부동류와 부정류는 살아 있지 않은 무생물에 관한 내용이다. 유정류는 살아 있는 생물로서 정(情) 즉 반응이 있는 동물에 관한 내용이고, 무정류는 생물로서 반응이 없는 식물에 관한 내용이며, 부동류는 무생물로 움직이는 않는 것으로 쇠와 돌에 관한 내용이고, 부정류는 무생물로 멈추어 있지 않는 물과 불에 관한 내용이다.

무정류는 다시 초본류를 의미하는 草(초)와 목본류를 의미하는 木(목)으로 구분하였다. 초(草)에 속하는 식물로 여러 식물을 기록한 뒤에 <사진12>에 나타난 것처럼 白頭翁(백두옹; 현재의 할미꽃 종류), 毛茛(모간; 현재의 미나리아재비와 그와 유사한 식물)을 기록한 후 현재의 투구꽃속(Aconitum)에 속하는 식물로 秦芁(진규), 草烏頭(초오두), 烏頭(오두), 白附子(백부자)를 구별하여 이름을 달고 그 내용을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草烏頭(초오두)와 烏頭(오두)에 대하여 중국의 본초강목(1596)은 같은 식물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하였으나, 우리의 동의보감(1613)과 물명고는 이 둘을 서로 다른 식물로 보았다. 그러나 동의보감이나 물명고에서 오두(烏頭)를 별도 식물로 분류하면서도 달리 한글명을 남기지 않았고 현대 한의학에서도 다른 식물로 보고 있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별도 식물로 보지 않기로 한다.

현재 국가표준식물목록(2018)의 독자적인 번식을 하는 종을 분류의 최소 단위로 하여 25종 내외의 투구꽃속(Aconitum) 식물을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물명고는 크게 (i) 잎이 넓고 뿌리에 덩이가 없고 수염 모양을 한 秦芁(진규), 한글명으로 망초, (ii) 덩이뿌리가 토론(芋)을 닮고 잎이 긴 모양을 草烏頭(초오두), 한글명으로는 놋져나물/바곳, (iii) 잎은 가늘게 갈라지고 뿌리는 흰색으로 큰 모양을 한 白附子(백부자), 한글명으로 괴망이/흰바곳, 이렇게 3가지로 분류하였다. 물명고의 이러한 분류는 앞선 시대에 저술된 동의보감 등의 분류방법을 계승한 것으로 약성(藥性)을 우선적 기준으로 하고 식물의 형태를 부분적으로 보충한 것이다.

물명고의 위 분류 중 백부자는 다른 투구꽃속(Aconitum) 식물과 잎, 꽃의 모양과 뿌리 모양 등 형태적 특징이 명확하게 다르고 달리 이와 유사한 종의 식물이 없어 현재의 백부자<Aconitum koreanum R.Raymund>와 종으로도 일치한다. 그러나 秦芁(진규)는 그 형태에 대한 물명고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의 진범<Aconitum pseudolaeve Nakai>, 흰진범<Aconitum longecassidatum Nakai>과 날개진범<Aconitum pteropus Nakai>등을 함께 지칭하는 이름이고, 초오두(草烏頭) 또는 초오(草烏)는 그 형태에 대한 물명고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의 각시투구꽃<Aconitum monanthum Nakai>, 이삭바꽃<Aconitum kusnezoffii Rchb.>, 투구꽃<Aconitum jaluense Kom. subsp. jaluense>과 놋젓가락나물<Aconitum ciliare DC.> 등을 함께 아우르는 이름이다.

즉, 물명고의 ‘초오두(草烏頭)’와 그에 대한 한글명 ‘놋져나물’과 ‘바곳’은 현재의 투구꽃과 놋젓가락나물을 함께 지칭하는 이름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곧추서서 자라는 식물이고 다른 하나는 덩굴성 식물로 서로 번식을 달리하기 때문에 투구꽃과 놋젓가락나물을 별도의 종으로 보고 후자에 대해서만 ‘놋져나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두 종 모두를 포함하는 이름으로 ‘놋져나물’이고 ‘바곳’이었다는 것이다.

사진16. 투구꽃; 2013/3/31/ 경기도 예봉산(사진촬영자 : 금강성/들꽃카페)

​놋져나물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시대의 인식의 틀을 이해하고 나면, 놋젓가락나물이라는 이름은 투구꽃과 놋젓가락나물이 종으로서 구별하는 시기에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므로 그 구별점에 주안점을 두어 이해할 것이 아니라 두 식물을 포함한 여러 종의 공통적인 특징에서 그 유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놋져나물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약용식물이자 19세기 즈음에 이르러서는 식용식물이었으므로 선조들이 그 용도로 놋젓가락나물을 만날 때 인식하였을 관점에서 이를 살펴보아야 한다.

​약용식물로 이용한 것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 세종의 명에 의하여 1431년에 저술된 향약채취월령은 草烏頭(波串-바곳)의 뿌리를 음력 2월에 채취한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식용식물로 사용한 것과 관련하여, 앞서 살핀 것처럼 식용법을 소개한 ‘구황식물과 그 식용법'(1944)은 새싹을 채취하여 데쳐서 묵나물로 사용한다고 하였는데 새싹이 돋는 시기도 음력 2월경이다. <사진16>은 음력 2월경의 투구꽃의 모습이다. 이 모습일 때에 투구꽃과 놋젓가락나물은 형태적으로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잎이 막 돋았을 이 시기에는 전년도에 올렸던 줄기의 가운데가 긴 겨울 동안 잘라지고 생명이 사라진 회갈색의 색깔로 곧게 서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전년도 줄기는 아예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새싹이 돋은 후에 줄기가 직선으로 뻗어 올라가면서 갈색으로 곧추선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놋젓가락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4. 글을 마치며

놋젓가락나물이라는 이름이 형성된 시대와 그 인식의 틀에 따라 그 유래를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19세기 기록된 ‘놋져나물’이 현재의 투구꽃과 놋젓가락나물을 포함하여 여러 식물을 총칭하는 이름이었다면, 두 종의 꽃의 형태는 별 차이가 없으므로, 왜 줄기가 주로 곧추서서 자라는 Aconitum jaluense Kom.(1901) 종을 놋젓가락나물로 하고 줄기가 덩굴로 자라는 Aconitum volubile var. pubescens Regel(1861) 종을 투구꽃으로 하지 않았는지 그것이 오히려 식물의 형태에 더 적합한 이름이 아닌지하는 의문 말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Aconitum volubile var. pubescens Regel(1861) 종에 대하여 ‘놋젓까락나물’이라는 이름을 최초 기록한 조선식물향명집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 이름을 기록한 원리를 설명한 조선식물향명집의 사정요지는 “과거 수십 년간 조선 각지에서 실지 수집한 향명을 주로 하고 종래문헌에 기재된 것을 참고로 하여 향명집을 상재(출판-편자 주)하”였다고 하였다.

18세기 초엽 저술된 광재물보와 물명고는 모두 출판물로 인쇄한 것이 아니라 필사본으로 돌려 읽었던 문헌이어서 그 유통 범위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조선식물향명집(1937) 서문과 조선식물향명집 저자 중의 1인인 이덕봉(1898~1987) 교수가 저술하였던 ‘조선산 식물의 조선명고'(1937)에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술을 위하여 참고 문헌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참고문헌에 광재물보와 물명고를 기재하지는 않았다. 즉, 놋젓가락나물은 광재물보와 물명고라는 문헌을 통해 조선식물향명집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은 낮으며, 조선식물향명집의 사정요지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실제 놋젓가락나물이 자생하는 현지에서 그 식물을 접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실제 사용한 이름을 채록함으로써 조선식물향명집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조선식물향명집은 나라를 빼앗기고 모국어를 상실해 가던 시대에 일본으로부터 전래된 근대 식물분류학을 배우고 이에 근거하여 조선의 식물명을 기록하기 위하여 저술한 문헌이다. 그 문헌에서 그들이 조선 식물명을 사용하는 주체로서 현실의 조선인을 설정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조선말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보아, “1.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조선명은 그대로 채용함”을 식물명 사정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누가 그것을 탓할 수 있을 것인가?

식물학에 대한 체계적 이론과 내용을 배운 바 없었고 오로지 일본인의 어깨 너머로 식물을 관찰하고 익혀야만 했던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에 비하여, 일본인 모리 다메조(森爲三)와 이시도야 츠토무(石戶谷勉)는 일본에서 식물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였고 조선에서 채집과 식물조사를 먼저 실행하였으며 그들의 뒤에는 조선총독부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총독부의 의뢰 또는 지원을 받아 조사 작업을 했지만 실제 조선인이 사용하는 조선명 ‘놋젓까락나물’을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은 실제 수십 년간 전국을 돌아 다니면서 조선인이 부르는 조선명을 모아 정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렇게 찾아낸 이름이 ‘놋젓까락나물’이었다.

문제는 우리들의 게으름과 그것이 낳은 무지이다. 선학들이 인식한 틀과 원리를 이해하고 하나의 말과 이름이 가지는 역사를 찾아가면 놋젓가락나물의 유래와 그를 둘러싼 생태적 모습을 얼개라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대들이 만들어 놓은 터전을 향유하면서도 오로지 현재의 관점에서만 놋젓가락이 어떤지 나물이라는 용어가 어떠니 논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물이 나물이 아니라거나, 선학들의 수고를 낮잡아 보거나, 그것만을 이용하면서 그 자리에 맴도는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이야말로 물질적으로 풍부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더욱 빈곤해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우리의 모습을 만드는 주범은 아닌가? (2018/12/4/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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