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곰취'라는 이름의 유래,
    일제의 잔재? 근대적 조선식물 연구?
    [푸른솔의 식물생태] 식물명에 대한 두 가지 해석
        2018년 11월 05일 11: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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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친숙한 산나물의 일종인 ‘곰취’를 살펴보면서, 그 이름의 유래 등에 대한 문제가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이전의 연재 글에서도 설명 분석하였듯이 두 가지의 시각, 즉 우리 식물의 이름에 일제 강점기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는 일각의 주장, 그리고 이와 반대로 우리 역사와 전통에 남아 있는 고유 언어의 복원과 근대적 조선식물 연구라는 주장 등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곰취라는 익숙한 이름에 얽힌 그 두 가지의 해석에 대해 살펴본다. 비교적 깊게 분석하고 있는 글이어서 분량이 다소 길지만 한번에 게재한다. 독자들의 관심을 부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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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 2015/9/17/ 한라산 정상 부근

    사진2. 2018/9/8/ 강원도 태백산 계곡가​

    1. 곰취란?

    곰취<Ligularia fischeri (Ledeb.) Turcz.(1838)>는 국화과 곰취속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전국의 깊은 산의 물기가 많은 습지에서 주로 자란다. 고산의 메마른 지역에서도 간혹 발견되지만 습기를 좋아하므로 아침 저녁의 안개 등을 통해서라도 충분한 수분이 공급될 수 있는 곳이 주된 분포지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몽고, 러시아 및 일본에 분포한다.

    ​둥근 잎의 향이 좋아 생채를 나물로 먹거나 묵나물이나 절여서 식용하기도 하며 이를 위해 인위적인 재배를 하기도 한다. 비슷한 식물로 곤달비<Ligularia stenocephala (Maxim.) Matsum. & Koidz.(1910)>가 있다. 곤달비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특징에 따라 곰취와 구별된다.

     ※ 곰취와 곤달비의 구별

    사진3. ​박재홍, “Ligularia(곰취속)”,『The Genera of Vascular Plants of Korea(곰취속)』(아카데미서적, 2007), 1033쪽 참조.

    2. 곰취의 형태와 꽃의 개화​

    사진4. 2018/9/8/ 강원도 태백산 계곡가; 총상꽃차례를 이룬 모양​

    사진5. 2015/9/17/ 한라산 중간 계곡가 : 꽃의 관찰

    사진6. 2015/9/17/ 한라산 중간 계곡가 ; 혀꽃(설상화)의 암꽃과 대롱꽃(통상화)의 수술이 자라는 모습

    ​사진7. 2015/9/17/ 한라산 중간 계곡가 ; 대롱꽃(통상화)에 암술이 자라는 모습

    ​사진8. 2015/9/17/ 한라산 중간 계곡가

    꽃은 늦여름에서 가을(8~10월)에 노란색으로 개화한다. 총상꽃차례를 이루지만, 하나의 꽃 내부에는 작은꽃(floret)이 모여 머리모양꽃차례를 이룬다. 머리모양꽃차례는 혀꽃(설상화)과 대롱꽃(통상화)으로 된 다수의 작은꽃으로 이루어져 있다. 혀꽃은 암꽃이고, 대롱꽃은 양성화로 수술이 먼저 성숙하며 다음으로 암술이 성숙하여 자가수정을 피한다. 식용하는 뿌리잎은 봄에 싹이 트는데 콩팥 모양으로 길이가 30cm에 달하기고 하며 가장자리에 규칙적인 거치가 있다. 잎에는 잎자루가 달리며 그 가운데는 홈처럼 파여 있다.

    ​3. ‘곰취’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1) 곰취라는 이름의 등장 및 관련 명칭의 의미

    사진9.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조선식물향명집』(조선박물연구회, 1937), 167쪽 참조.

    ​근대 식물분류학에 따른 종(species) 분류에 근거하여 ‘곰취’라는 이름이 확립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식물학을 연구한 정태현 외 3인에 의한 『조선식물향명집』에 의한 것이다. 당시에 학명을 Ligularia Sibirica Cassini(1823)로 기록하였으나 이후 한반도에 분포하는 종의 학명은 Ligularia fischeri (Ledeb.) Turcz.(1838)로 밝혀져 이것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국명은 여전히 ‘곰취’로 변하지 않은 채 계속 유지되어 현재에도 국가표준식물목록(2018) 등의 추천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속명 Ligularia는 혀(舌)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으로 잎의 모양을 혀에 비유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고, 종소명 fischeri는 러시아 식물학자인 F. E. von Fischer(178~1854)를 기리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식물지에 의한 중국명은 蹄叶橐吾(ti ye tuo wu)이다. 발굽 모양의 잎(蹄葉)를 가진 탁오(橐吾)라는 뜻인데, 탁오(橐吾)는 중국 옛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橐'(탁)이 주머니(袋子)를 의미하므로 줄기잎에서 나오는 꽃의 모양 또는 잎의 모양을 주머니에 비유한 것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론된다.

    한편 조선식물향명집에 기록된 일본명 요타카라카우(ヲタカラカウ)에서 ‘타카라카우(タカラカウ)'[현대어로 ‘타카라코우(タカラコウ)’]의 의미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견해가 나뉜다. 일설은 중국명 ‘橐吾'(탁오)를 음독하였다고 하고, 다른 견해는 보배로운 향기라는 뜻의 ‘宝香'(보향)을 훈독한 것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요타카라카우(ヲタカラカウ)에서 ‘요(ヲ)'[현대어로는 ‘오(オ)’]는 수컷(雄)의 의미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견 없이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곤달비를 일본에서는 메타카라코우(メタカラカカウ, 雌-)라고 한다. 꽃과 크기가 상대적으로 왜소한 곤달비를 암컷으로, 꽃과 크기가 상대적으로 큰 곰취를 수컷으로 보아 서로 이름을 대칭시킨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곰취’라는 우리말 이름(조선명)은 ‘취’가 나물로 식용하는 식물에 대한 옛말이므로 곰(熊) + 취(菜)의 합성어이고,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중국명 ‘​橐吾’나 일본명의 ‘橐吾’ 또는 ‘宝香’과 의미가 같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2) 한국 식물명을 바라는 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관점

    ​곰취라는 식물명의 유래에 관한 논란을 살펴보기 전에, 한국 식물명의 유래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관점을 먼저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사진10.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조선식물향명집』(조선박물연구회, 1937), 序 4쪽 ‘사정요지’ 참조.​

    ​한자가 사용된 문장을 현대 한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과거 수십 년간 조선 각지에서 실지 조사 수집한 ​향명을 주로 하고 종래 문헌에 기재된 것을 참고로 하여 향명집을 출판하게 되었으나 교육상. 실용상 부득이한 것에 한하여는 다음 제점에 유의하여 학구적 태도로 정리 사정함.”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식물명(국명)의 토대를 형성한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은 스스로 “수십 년간 조선 각지에서 실지 조사 수집한 향명을 주로 하”여 식물명을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최근 한국 식물명의 유래에 대하여 해설하거나 이를 언급하는 일부 견해는 전혀 이러한 기록을 신뢰하지 않고 다른 관점의 주장을 설파하기도 한다.

    ​-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에 길들여진 식물학자들이 일제의 식민적 자원 착취를 등에 업고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을 위해 조선의 식물을 조사하면서 일본어로 지은 이름을 무비판적으로 번역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이윤옥, 『창씨개명된 우리풀꽃』 (인물과 사상사, 2015), 121쪽].

    – “우리나라 식물이름의 혼동과 정체성을 잃게 된 비탄은 20세기 초 일제의 조선식물명휘(朝鮮植物名彙)에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일본식 이름에 끼워 맞춘 식물명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형편이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1』 (자연과 생태, 2013), 785쪽].

    ​조선식물향명집이 저술되던 시기에서 실제로 사용한 이름을 채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에 따르면, 곰취는 ‘곰이 사는 심산에 나는 취’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거나[이우철, 『한국 식물명의 유래』(일조각, 2005), 80쪽], ‘둥근 잎이 곰발자국 같은 나물’ 또는 ‘곰이 뜯어 먹는 나물’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허북구·박석근, 『한국의 야생화 200』(중앙생활사, 2008), 32쪽].

    반면에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던 이름을 채록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명을 무비판적으로 번역하였다거나 일본식 이름에 끼워 맞춘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였다고 보는 입장은 다음과 같이 곰취의 유래를 보고 있다.

    “곰취라는 한글명은 1921년 「조선식물명휘」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제주도에서 백두산까지 분포한다는 정보와 함께 한글로 곰츄, 영어로 Komchui라 기재했다. 곰츄>곰취라는 명칭의 ‘곰’은 일본명에 잇닿아 있다. 일본명(雄宝香)에는 남성적이라는 뜻이 있는데, 여기서 남성을 뜻하는 수컷 웅(雄)자와 곰 웅(熊)자가 똑같은 한글 소리이고, 의미도 어상반하기 때문이다”[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2』(자연과 생태, 2016), 488쪽 참조].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의 위 관점에 대입하여 보면, 당시 한성고등학교 박물교사로서 이후 경성제대 예과 교수가 되는 모리 다메조(森爲三, 1884~1962)가 조선총독부의 의뢰를 받아 조선 분포 식물과 그 식물명 등을 조사한 것이 조선식물명휘(朝鮮植物名彙)이므로 모리 다메조가 일본식 이름인 ヲタカラカウ(雄宝香)에 雄(웅)과 熊(웅)이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끼워 맞추어 창출된 이름이 ‘곰취’이고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조선식물향명집에서 수용하여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 된다.

    ​어느 쪽이 맞는 이야기이고, 한국명 곰취와 일본명 요타카라카우(ヲタカラカウ)가 잇닿아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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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e : 대학에서 식물학을 강의하는 저명한 교수이고 “日에 왜곡·각색된 고유 식물 이름 되찾기에 혼신”을 기울이시는 분이므로 아래에서는 한국식물생태보감 저자의 주장이 타당한 것으로 가정하고, 실제를 살펴보기로 하자[박진관, “日에 왜곡·각색된 고유 식물 이름 되찾기에 혼신”, 『영남일보』2016.9.26.자 기사 참조].

    (3) 조선식물향명집 저자들의 기록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 중의 한명인 이덕봉 교수는 조선식물향명집이 발표되기 직전인 1937.1.에 조선어학회가 발간한 잡지 ‘한글’에 조선식물향명집에 수록된 국화과 식물명에 대한 내력을 기록한 『조선산 식물의 조선명고』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곰취
    곰추” <이덕봉, “조선산 식물의 조선명고”, 『한글』(조선어학회, 1937.1.) 제5권 1호, 12~13쪽>

    한편 『조선산 식물의 조선명고』 ‘범례’에는 “처음 쓴 것이 표준명이고 한자 내려 쓴 것이 이명 혹은 지방명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에 따르면 ‘곰취’가 표준명이고 ‘곰추’가 이명 또는 지방명이다. 또한 조선식물향명집 사정요지는 “지방에 따라 동일 식물에 여러 가지 방언이 있는 것에는 가장 적합하고 보편성이 있는 것으로 대표로 채용”한다고 하였으므로, 실지 조사한 결과 당시 사용하는 이름으로 ‘곰취’와 ‘곰추’가 있었고 그 중 곰취를 적합성과 보편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대표(표준명)로 채용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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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e :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에 따르면, 일본인 모리 다메조가 일본명에 끼워 맞춘 이름이 곰츄이고 이를 무의식적으로 수용한 이름이 곰취인데 조선에서 실지 사용하였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은 일본식 이름에 끼워 맞춘 식물명을 채택한 것을 숨기기 위하여 거짓으로 논문을 작성하기라도 한 것일까?

    (4) 일제강점기에 일본 또는 일본인이 기록한 ‘곰취’에 대한 기록들

    사진11. 모리 다메조(森爲三), 『조선식물명휘』(조선총독부, 1921), 362쪽.

    조선식물명휘에 기록된 곰취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가 언급한 것과 같이 ‘곰츄’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구황식물(求)로 식용하였다는 점을 조사하여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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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e :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가 주장한 바와 같이 조선명의 ‘곰'(熊)과 일본명의 ‘ヲ'(雄)에 끼워 맞추어 서로 잇닿게 하였다면, 조선총독부(일제)의 의뢰를 받아 조선식물명휘를 작성한 사람은 모리 다메조이므로 그가 주범(?)일 것이다.

    ​사진12. 무라타 시게마로(村田懋麿, ?~1943), 『토명대조선만식물자휘』 (동경목백서원, 1932), 655쪽.

    무라타 시게마로(村田懋麿)는 식물학 전공자가 아니라 아마추어의 관점에서 조선과 만주의 문화, 식물, 동물 등에 관하여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한 일본인이다.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벼룩나물에 관한 식물명의 유래를 논하면서, 무라타 시게마로가 저술한 토명대조선만식물자휘에 기록된 “국슈쳥이’가 본래의 명칭이라며 이 저서를 아주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가![김종원,『한국식물생태보감1』(자연과 생태, 2013) 291쪽 참조] ; 물론 한국식물생태보감 저자의 이 주장은 전혀 진실이 아니다!(이에 대하여는 조현래, “벼룩나물, 식물명의 유래” ,『레디앙』2018.4.17.자 기사 참조].

    ​어쨌든 토명대조선만식물자휘에도 ‘곰취’가 있고 ‘곰달내’라는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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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e(1) :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가 ‘본래의 명칭’ 운운하며 신뢰를 보내던 토명대조선만식물자휘의 저자 무라타 시게마로마저 “곰취”라는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모리 다메조의 조선명을 일본명과 잇닿아 있도록 하거나, 일본식 이름에 끼워 맞추는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곰 熊(웅)이 표시된 ‘熊蔬'(웅소)라는 한자명까지 기록하고 또 다른 곰이 들어간 “곰달내”라는 이름마저 끼워 맞추기 식(?)으로 창출하기까지 하였다. 무라타 시게마로도 모리 다메조와 공범(?)인가?

    ** Note(2) : 한국식물생태보감1, 2를 통틀어 지속적으로 ‘村川懋麿’으로 잘못 인용되고 있는 토명대조선만식물자휘 저자의 실제 이름은 ‘村田懋麿’이다. 오기도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오류가 된다. 한국식물생태보감은 본래의 명칭 운운하며 토명대조선만식물자휘에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토명대조선만식물자휘에 기재된 조선명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어사전(1920)과 꼼꼼히 대조하여 보면, 그 이름의 대부분은 조선어사전의 기록을 반복하고 있고, ‘곰취’에 대한 조선명의 기록도 그러하다. 1910년에서 1937년 이전의 조선 식물명을 포함한 일본 또는 일본인이 작성한 문헌의 대개는 식민지를 지배나 일본인이 조선에 정착함으로써 발생한 향토성 연구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실태조사의 성격이 가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 조사기록 자체를 일본명 또는 일본식 이름을 강제하기 위한 기록으로 보는 것은 문헌 작성의 목적이나 문헌의 실제 기록에 근거하여 볼 때 억측이거나 논리 비약이다. 조선어와 조선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선식물향명집의 서문에서 적절하게 지적되었듯이, 잘못된 인식에서 발생한 오류와 오기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따라서 일본 또는 일본인이 조선명을 기록한 문헌은 가능한 여러 문헌의 기록과 지역 방언 등 실제 사용되는 이름과 비교 대조하여 검토하여야 한다. 이런 작업 없이 어떤 문헌은 일본 제국주의가 관철된 식물명을 기록하였고 다른 어떤 문헌은 본래의 명칭을 기록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사진13. 경기도임업회, 『조선의 산과와 산채』(경기도임업회간, 1935), 63-64쪽

    ​재단법인 경기도임업회라는 곳에서 1935년에 기록한 ‘조선의 산과와 산채’라는 책자에도 “곰취”라는 한글 이름이 나온다. 게다가 그 해설의 중간 쯤에는 “コムチー”(곰취)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가정에 널리 알려져 있다는 취지의 문구가 나온다. 혹시 곰취는 당시 조선에서 널리 사용되던 이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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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e : 조선에서 널리 사용된 이름이 채록되었을 것이라는 느낌(?)은 가볍게 무시하도록 하자. 어차피 경기도임업회는 지역 단체에 불과하고, 모리 다메조라는 전문가를 넘어 설 수도 없고, 그 뒤에 있는 조선총독부를 이겨낼 수는 없었을 것이니 그냥 모리 다메조를 흉내 낸 것이라고 굳게 믿고(!) 넘어 가보기로 한다.

    이제 비슷한 이름이 여럿 등장했으니, 일제강점기에 곰취, 곰달내, 熊蔬(웅소)라는 식물명을 기록한 것이 더 있는지 살펴보자.

    – 곰달내(名) [植] 蔬菜の 一種. (熊蔬·곰취)
    – 곰취(名) [植] 「곰달내」同じ
    – 熊蔬(웅소)(名) [植]「곰달내」同じ[조선총독부, 『조선어사전』(조선총독부간, 1920), 76, 77 및 645쪽]

    아하! 토명대조선만식물자휘에 기록된 곰달내, 곰취 및 웅소라는 이름은 조선총독부가 일본인의 조선어 학습을 위해 편찬 발간한 조선어사전에 그대로 기록된 이름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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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e(1) :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는 입장을 바꾸어 일본식 이름에 끼워 맞춘 조선 식물명을 만든 것은 일제의 본체인 조선총독부이고 모리 다메조와 무라타 시게마로는 이를 따라 한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이러한 주장이 맞다고 굳게 믿고(!)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사전에서도 곰취, 곰달내, 웅소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또 넘어 가보자.

    ** Note(2) : 다만, 여기에서 한국식물생태보감 저자의 주장과 다르게 “곰취라는 한글명은 1921년 「조선식물명휘」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식물생태보감은 자료에 대한 턱 없이 부족한 조사와 관찰로 쉬이 우리 식물명이 일본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14. 우에키 호미키(植木秀幹, 1882~1976),『조선의 구황식물』(조선농회, 1919), 30쪽

    그런데 조선어사전에 앞서 수원농림전문학교(현 서울대학 농과대학의 전신)의 교수로 조림학을 가르쳤던 우에키 호미키가 저술한 ‘조선의 구황식물’에 “곰취”라는 이름이 구황식물의 목록으로 버젓이 등재가 되어 있다. 우에키 호미키는 일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학생을 차별하지 않고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고 1945년에는 학생들에게 “조선의 독립을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있기도 하다[박성래, “국내에 리기다소나무를 보급한 임학자 植木秀幹”, 『과학과 기술』452(2007), 106~107쪽 참조].

    ​그런 그가 일본식 이름에 끼워 맞추어 “곰취”라는 이름을 만들었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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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e : 또 다시 조선식물명휘에 앞서서 곰취를 기록한 문헌이 발견되므로 의심이 계속 솟아 오르지만, 일단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의 주장이 여전히 맞다고 믿고(!) 이제는 우에키 호미키를 일본명과 잇닿게 한 주범(?)으로 생각하여 보자.

    사진15.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지리산식물조사보고서』(조선총독부, 1914), 47쪽

    동경제대의 식물학부의 교수이자 조선총독부의 촉탁을 받아 조선식물의 조사작업을 벌였던 나카이 다케노신이 1914년에 저술한 ‘지리산식물조사보고서’에 일본 히라가나(ひらがな)로 표기로, 조선식물향명집에 기록된 것과 같은 학명에 대하여 “こんだんび”(곤달비)라는 조선명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어 “こんだんび”가 왜 ‘곤달비’로 발음되는지는 뒤에서 고찰하고, 일단 여기서는 발생한 문제점을 살펴보자.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에 의하면, 일본명의 수컷 웅(雄)자와 한굴명의 곰 웅(熊)자가 똑같은 한글 소리이고 의미도 어상반하기 때문이라는데 왜 갑자기 곰이 아닌 “곤”이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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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e : 이제는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를 믿기로(!) 했으니 끝까지 가보자. 나카이 다케노신은 조선어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가 우리말을 잘못 듣고 ‘곰’을 오기한 것으로 일단 우기고(!) 넘어 가도록 하자.

    ​(5) 곰취에 대한 최근 방언 조사

    ​국립수목원은 2005년부터 근 10여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전국에서 사용하는 식물명에 대한 방언 조사를 실시한 바가 있다. 그 방언 조사 결과 기록된 “곰취”와 “곤달비”에 대한 방언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793. 곰취<Ligularia fischeri (Ledib.) Turcz.>

    ♣ 지방명

    제주도 곰취

    전라도 곰취(구례군, 남원시, 담양군), 호무취(광양시), 홈취(순천시, 화순군)

    경상도 고무달리(영덕군), 고무달비(청도군), 곤달래(영덕군, 울진군), 곤달비(거창군, 성주군, 하동군, 합천군), 곰추(문경시), 곰취(거제시, 거창군, 고성군, 봉화군, 산청군, 안동시, 양산시, 영덕군, 영양군, 영천시, 울진군, 의성군, 청도군, 청송군, 포항시, 하동군), 곰치(진주시), 구목서(합천군), 나물취(여천군), 민나물(영천시), 밥취(봉화군, 영주시, 예천군), 촌취나물(포항시)

    충청도 곰달래(보은군), 곰추(음성군), 곰취(공주시, 보령시, 옥천군, 천안시, 충주시), 곰치(서산시, 제천시)

    경기도 곤달채(여주군), 곰취(가평군, 고양시, 군포시, 여주군, 연천군, 이천시, 인천시, 포천시), 취나물(남양주시, 양주시, 인천시, 파주시)

    강원도 곤추(평창군), 곰추(동해시, 삼척시), 곰취(고성군, 동해시, 삼척시, 양양군, 영월군, 인제군, 정선군, 철원군, 태백시, 평창군, 횡성군), 나물추(강릉시, 삼척시, 정선군), 나물취(동해시, 정선군)

    함경북도 곰취

    [국립수목원, 『한국의 민속식물; 전통지식과 이용』(국립수목원간, 2013), 977쪽 참조]

    794. 곤달비<Ligularia stenocephala (Maxim.) Matsum. & Koidz.>

    ♣ 지방명

    경상도 곤달비(영천시, 예천군, 울산시, 울진군), 곤달피(거제시)

    충청도 곤달비(옥천군)

    강원도 곤달비(인제군, 평창군, 횡성군)

    [국립수목원, 『한국의 민속식물; 전통지식과 이용』(국립수목원간, 2013), 980쪽 참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오래 전에 고착된 이름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전국의 곳곳의 방언에 곰취라는 이름이 남아 있고, 심지어는 다른 이름들도 대개는 곰취와 발음이 유사하다. 게다가 경상도의 지리산에 인접한 곳에는 곰취의 방언으로 나카이 다케노신이 1914년 지리산식물 조사 당시 채록하였던 “こんだんび”와 동일한 “곤달비”라는 이름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카이 다케노신이 지리산식물조사보고서에 기록된 히라가나는 “곤달비”의 표기가 된다.

    ​혹시 곰취는 일본명과 전혀 관련이 없는 우리말 이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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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e : 한국식물생태보감은 저자의 주장과 같이 말 그대로 보감(寶鑑)이 아니던가! 이 지점에서도 국립수목원이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무지한 촌로(村老)들이 아직도 일제가 퍼트린 이름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믿기로(!) 하자.

    (6) 곰취에 대한 옛 문헌 조사

    이제까지 등장한 곰취와 그 관련 이름들이 옛 문헌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살펴 보면 아래와 같다.

    – 馬蹄菜, 곰ㄷ.ㄹ외[현대어; 곰달외](훈몽자회, 1527) ​
    – 馬蹄菜, 곰ㄷ.ㄹㄹ.ㅣ[현대어 : 곰달래](역어유해, 1690)
    – 熊蔬, 곰ㄷ.ㄹㄴ.ㅣ[현대어 : 곰달내](산림경제, 18세기 초엽)
    – 馬蹄菜, 곰ㄷ.ㄹ.ㅣ[현대어 : 곰다래](동문유해, 1748)
    – 馬蹄菜, 곰ㄷ.ㄹㄹ.ㅣ[현대어 : 곰달래](방언집석, 1778)
    – 馬蹄菜(청장관전서, 1795)
    – 곰취, 馬蹄香[현대어 : 곰취](광재물보, 19세기 초엽)
    – 곰달늬, 馬蹄菜[현대어 : 곰달늬](몽유편, 1810)
    – 橐吾(율곡전서, 1814)
    – 곰취, 杜蘅, 馬蹄菜[현대어: 곰취](물명고, 1824)
    – 馬蹄菜, 熊蔬, 곰ㄷ.ㄹㄹ.ㅣ[현대어 : 곰달래](오주연문장전산고, 19세기 중엽)
    ​- 곰달늬, 馬蹄菜[현대어 : 곰달늬](박물신서, 19세기)
    – 곰취, 杜葵[현대어 : 곰취](총방, 19세기 추정)[박재연·이현희 주편, 『고어대사전2』(선문대학교 중한번역문헌연구소, 2016), 374쪽에서 재인용]
    ​- 馬蹄菜, 熊蔬, 곰달ㄹ.ㅣ[현대어 : 곰달래](명물기략, 1870)
    – 곰츄ㅣ, 香蔬[현대어 : 곰취](한불자전, 1880)
    – 곰츄ㅣ, 香蔬[현대어 : 곰취](국한회어, 1895)

    위 명칭 중에 훈몽자회의 “곰ㄷ.ㄹ외[현대어; 곰달외]”는 羊蹄菜(양제채; 현재의 소리쟁이)의 명칭과 논란이 있고, 물명고의 “곰취”는 細辛(세신 : 현재의 족도리풀)과 사이에 정확히 어떤 식물을 지칭하는지 불명확하게 보이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국립수목원에서 조사한 방언에서 곰달래라는 이름과 곰취와 비슷한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현재의 곰취와 관련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자어로 중국에서 유래된 橐吾(탁오)는 아주 드물게 사용되었고, 말발굽을 닮은 채소라는 뜻의 馬蹄菜(마제채)는 雄蔬(웅소)라는 한자 표현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곰을 닮은 채소라는 뜻의 熊蔬(웅소)와 향이 있는 채소라는 뜻의 香蔬(향소)라는 이름도 19세기에 이르러 종종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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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e : 옛 문헌을 두고서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의 주장대로 따라 가자니, 15~16세기의 언어학자로 훈몽자회를 저술한 최세진(崔世珍, 1468∼1542)과 18~19세기 초반 실학자로 낙향하여 경기도 용인에서 저술활동으로 평생을 보내면서 물명고를 저술한 유희(柳僖, 1773년∼1837년)가 당시 일본명을 찾아 일본식 이름에 끼워 맞추거나 일본명에 남성을 뜻하는 수컷 웅(雄)이 있는데 그 발음이 곰 웅(熊)과 어상반하다는 것을 알고서 곰달외와 곰취라는 이름을 만든 주범(?)이고, 그 즈음의 각 문헌들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여 우리에게 곰취라는 이름이 계속되도록 하였다고 해야 할 판이다.

    (7) 소결론

    일본인 학자들은 모두 일본인일 뿐이니,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가 주장한 바와 다르게 조선식물명휘를 저술한 모리 다메조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계속 주범(?)이 바뀌더라도 차치해 두자. 한국식물생태보감 저자가 주장한 바대로 우리가 부르는 곰취라는 이름이 일본명 요타카라카우(ヲタカラカウ)와 잇닿아 있다고 믿고 그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자학(自虐)하여야 할까?

    ​1937년 중일전쟁과 그 이후의 제2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참전하면서 우리말조차 없애고자 했을 때 조선의 식물명을 정리하고 기록하여 오늘에까지 이어지게 했던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 뒤늦기는 했지만 10여년의 세월에 걸쳐 1,000여종을 헤아리는 식물명 방언을 조사하여 기록을 남긴 국립수목원, 옛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부르고 있는 이름 없는 촌로들, 옛 문헌에서 식물의 내역을 기록하고 남기고자 하였던 무수한 선대의 학자들. 그 모두가 한자가 동일한 것도 아니고, 한자 곰의 熊(웅)과 수컷의 雄(웅)이 한글 발음이 같기 때문에 일본명에 잇닿아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래서 일본식 이름에 끼워 맞춘 만들어진 이름을 기억하고 불렀으며 그렇게 기록한 것인가?

    진달래에 관한 국어학의 논의를 살펴보면, 진달래의 중세 어형은 진ㄷ.ㄹ외(또는 진ㄷ.ㄹㅂ.ㅣ)이고, 이는 진(眞)+ ㄷ.ㄹ외(들꽃)의 합성어로 이해된다고 한다[이에 대하여는 백문식, 『우리말 어원사전』(박이정, 2014), 458쪽].

    이에 비추어 보면 훈몽자회의 ‘곰ㄷ.ㄹ외'(곰달외)는 곰(熊)+ㄷ.ㄹ외(들꽃)의 합성어이고, 이에 대한 한자어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馬蹄菜(마제채)가 말의 발굽을 닮은 채소라는 뜻으로 잎의 모양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결국 곰달외(곰달뵈)는 잎이 곰의 발처럼 생긴 들꽃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론된다. 그러한 곰달외가 곰달래로 변화하였고 19세기에 이르러 먹는 나물이라는 뜻을 강조한 ‘곰취’로 전화하여 곰달래와 혼재되어 사용되었으므로 ‘곰취’ 역시 잎의 모양이 곰의 발바닥을 닮은 식용 식물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옛말 곰ㄷ.ㄹ외'(또는 곰ㄷ.ㄹㅂ.ㅣ)는 지역에 따라서 ‘고무달리’, ‘곤달래’ 또는 ‘곤달비’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근대 식물분류학의 종분류가 정착되면서 Ligularia fischeri (Ledeb.) Turcz.(1838)라는 종은 조선식물향명집(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1937)에 의하여 ‘곰취’라는 이름으로 정착이 되었고, Ligularia stenocephala (Maxim.) Matsum. & Koidz.(1910)라는 종은 조선식물명집(정태현·도봉섭·심학진, 1949)에 의하여 ‘곤달비’로 정착된 것이 문헌의 기록이나 방언 조사에 부합하는 합리적 해석이고 추론이 아닌가?

    조선식물향명집의 사정요지에서 “과거 수십 년간 조선 각지에서 실지 조사 수집한 ​향명을 주로 하고 종래 문헌에 기재된 것을 참고로 하여 향명집을 출판하게 되었”다는 것은 실제의 사실에 기초한 것이고, 곰취는 바로 문헌에 기록된 이름이자 무수한 일제강점기의 문헌과 최근의 방언조사에서도 확인되는 실제로 조선 각지에서 사용되는 이름으로 보는 것이 조사된 다수의 사실에 기초하여 귀납적으로 도출되는 과학적 해석이고 추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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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e : 한국식물생태보감이 보감(寶鑑)임을 굳게 믿는(!) 누군가가 ‘잇닿아’ 있다는 것은 서로 접한다는 단순한(?) 의미이므로 한국명과 일본명이 잇닿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나에게 되물었다. 곰취는 한중일 삼국에 모두 자생하는 식물이지만, 식물의 형태에서 ‘곰’을 연상하여 식물명을 형성한 것은 한국이 독특하다. 그 이름은 16세기 이래로 현재까지 계속되어 불리는 것이 확인되는 이름이고, 일본인 모리 다메조가 저술한 조선식물명휘에 최초로 등장하는 이름이 결코 아니다. 일본은 곰취와 곤달비를 수컷과 암컷으로 대비한 반면에 우리는 노란 들꽃이라는 뜻으로 추정되는 곰달외(곰달배)라는 같은 뿌리의 이름에서 곰취와 곤달비가 파생되어 나왔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가 16세기의 최세진과 19세기의 유희에게 일본명을 주입한 게 아니라면, 수컷을 뜻하는 웅(雄)과 곰을 뜻하는 웅(熊)의 한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이 한국명 곰취가 형성되고 불리우며 기록되는 것에 아무런 영향이 주지 못하였다. 곰취와 곤달비라는 이름은 곰 웅(雄)이 포함된 한자 표현이 등장하기도 이전에 ‘곰'(또는 그 변형인 ‘곤’)이라는 한글이 그대로 박혀서 전승된 이름이므로, 결단코 일본 이름에 끼워 맞추어 형성된 것이 아니며, 일본명과 전혀 잇닿아(!) 있지도 않다.

    4. 결론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 정태현과 도봉섭이 수행한 근대 식물학 연구에 대하여 최근의 과학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근대 식물학의 보편어인 라틴어로 연구된 조선식물에, 향명 즉 한글 이름을 부여하여 조선의 전통 지식과 근대 식물학의 연결고리를 되살리는 작업이 이들의 첫 작업이었다. 피지배민의 언어와 전통을 복원함으로써, 근대적 연구로 대체되면서 사라져가던 조선식물의 조선적 성격을 살려내려는 시도였다. 일본인들과 협력 하에 지역 식물학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조선 지식전통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강화시킴으로써, 조선인 연구자들은 인접한 제국 일본에 포섭될 수 없는 조선의 독자성, 조선인에 의한 근대적 조선식물 연구의 차별성을 드러내려 했다.”[이 정, 『식민지 조선의 식물연구(1919~1945); 조일 연구자의 상호 작용을 통한 상인한 근대 식물학의 형성』(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250쪽].

    또한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술과 관련하여 “내선일체로 일본과 조선이 한 나라인데 조선명을 새로 만들 필요가 어디 있느냐 하며 당국의 심한 제재가 있었으나 당시 농촌에서는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를 교육하기 위하여 일본명을 번역하는 것이라고 무마시켰다고 한다”라는 일화는 식물학이라는 과학의 중립적 외피를 가진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국권이 찬탈된 상황에서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음을 알게 한다[이우철, “하은 정태현 박사 전기(霞隱 鄭台鉉 博士 傳記)”, 『하은생물학상 25주년』 (하은생물학상이사회, 1994), 81쪽].

    일본이 우리에게 전파하여 우리의 정신에 심어 놓고자 했던 식민사관에는 중심 내용으로, 한국은 역사를 스스로의 주체적인 역량으로 전개시키지 못하고 주변 외부의 간섭과 힘에 좌우되어 왔다는 타율성의 논리가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상황에서 조선에서 사용하고 조선어로 된 식물명을 기록하고자 하였던 조선인 스스로의 주체적인 노력에 대한 성찰이 사라진 채 조선식물향명집에 기록된 조선명을 일본명의 번역이라거나 일본식 이름에 짜맞춘 결과로 이해하는 관점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우리는 일본이 강제하면 강제한 대로 무의식 상태에서조차 일본이 심어 놓은 것을 되풀이하는 꼭두각시인가? 16세기부터 문헌에 줄기차게 기록되어 있고 일본 총독부와 일본인 학자들조차 너무나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에 그들의 문헌에 조차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이 왜 일본명과 잇닿아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 풀꽃의 일제의 잔재의 청산을 외치고, 일제에 의하여 왜곡·각색된 고유 식물 이름 되찾기에 혼신을 다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이름의 형성에 대한 주체적 고찰이 사라진 그 주장들은, 오히려 일본명을 제대로 번역하여 그것을 우리 식물명으로 사용하자는 취지의 주장으로 귀결되고[우리 옛 문헌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금낭화’라는 식물이 佛具(불구)에서 유래된 일본명 ケマンサウ(華鬘草)의 장엄한 불구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것이 특히 그러하다], 조선에서 실제 사용한 이름에서 유래한 ‘광대나물’, ‘벼룩나물’, ‘벼룩이자리’, ‘호랑버들’, ‘쑥부쟁이’. ‘망초’. ‘담배풀’, ‘곰취’ 등을 제대로 된 자료에 대한 구체적 조사도 없이 일본명에 잇닿아 있다며 일본명으로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이러한 현실은 아이러니함을 넘어 그러한 주장의 실체가 무엇인지 넉넉하게 짐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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