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를 혹사하는 체제를 우습게 만들고 전복시키자
        2006년 05월 29일 08: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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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자는 프랑스 철학이 19세기까지 서양철학을 주도했던 독일을 누르고 인기를 얻게 된 이유를 프랑스 철학자들의 ‘실천’에 두기도 한다. 내용으로 봐서는 난해하기 이를 데 없지만 사르트르나 푸코가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이론을 사회운동의 실천을 통해 대중화하는 데 힘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소설이나 연극, 에세이나 언론매체 기고 등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파했고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시위에 동참했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 집필을 전후해 감옥의 현황을 조사하고 수감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감옥정보그룹(GIP), 수형자행동위원회(CAP), 수감자권리옹호연합(ADDD), 수용소정보그룹(GIA) 등의 조직을 직접 만들거나 가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지방도시 푸아티에에서 1926년 폴-미셸 푸코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푸코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외과의사였다. 푸코의 아버지는 푸코 역시 의사가 되기를 바랬지만 그는 열일곱살 때 결코 의사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푸코는 네살에 앙리4세 고교 유치부에 들어갔다. 학교에 가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누나와 떨어지기 싫어 떼를 썼기 때문이다. 2년 동안 교실 뒷편에서 연필을 쥐고 앉아 가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놀기만 했다.

    생-스타니슬라스 중학교에 다닐 무렵 그의 나이 열세살 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푸아티에는 곧 독일군에 점령됐다. 푸코는 학교 난방을 위해 동기들과 함께 독일군 나치군 부대에서 장작을 훔쳐오기도 했다.

    푸코는 푸아티에 고교, 파리의 앙리4세 고교 등으로 옮겨다니다 1946년 7월 파리의 명문 고등사범(Ecole Normale Superieure) 입학 시험에서 4등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푸코의 대학시절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이 시절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로 인해 점점 의기소침해진 것이다. 푸코는 점차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마침내 자살을 시도했다.

    푸코는 이후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게이(남성동성애자)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밝혔지만 커밍아웃을 하지는 않았으며 조용히 게이운동에 동참했다. 그가 1984년에 죽었을 때 가족들은 그가 에이즈 환자임을 부인했다.

    푸코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정신과 의사에게 동성에 대한 성적 관심을 털어놓았지만 당시만 해도 정신과 의사들은 동성애를 심각한 질병으로 취급했던 때라 푸코의 우울증은 치료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이후 그의 연구활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당시 치료과정에서 푸코는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병자들을 단순히 치료하는 일 이상의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즉 그들은 사회 안에서 한 인간이 무엇을 해야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정하는 ‘정신적 경찰관’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푸코는 정신분석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혼자 프로이드를 읽으며 공부를 했다. 당시 고등사범의 교수들은 학생들을 파리의 정신병원에 데리고 가 환자들을 직접 보여주었고 매년 한 주일은 오를레앙 근처의 다른 정신과 병원에서 의사의 치료과정을 견학시켰다. 이 과정을 통해 푸코는 정신분석학의 기초를 튼튼히 다졌다.

    1955년에 푸코는 불어 선생 자리를 하나 얻어 스웨덴의 웁살라로 갔다. 거기서 그는 16세기에서 20세기 사이의 의학 자료들을 모아 놓은 거대한 도서관을 접하고 몇년간 이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면서 연구를 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광기와 정신착란>, <진료소의 탄생>으로 결실을 맺었다.

    감옥 역사연구에 몰두

    스웨덴에 가기 전에 그는 1950년 프랑스공산당(PCF)에 가입했다. 전후 프랑스 전역에 몰아닥친 격렬한 파업 물결 속에서 프랑스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노동자의 편에 섰고 공산당은 25%대의 지지를 얻을 정도로 힘있는 정당이었다. 하지만 푸코는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1953년 당을 떠났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소련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문제삼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후 푸코는 사회정치적 이슈와 멀어진 채 학문연구에만 몰두했다. 게다가 푸코는 스웨덴, 폴란드, 독일 등지에서 교수직을 맡아 프랑스를 떠나 있는 기간이 길었다.

    1960년 프랑스로 되돌아온 그는 클레르몽-페랑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가르쳤고 1966년에 다시 프랑스를 떠나 튀니지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그는 1968년을 맞이하게 됐다.

    그는 파리의 격렬한 학생운동 현장에는 없었지만, 튀니지 역시 학생운동의 열기 속에 휩싸여 있었다. 좌파 학생들은 튀니지를 가능한 한 빨리 근대화시키려는 친미정권에 대항해 연일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학생들은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푸코가 가르치던 제자들도 몇명 투옥됐다. 그는 쫓기는 학생들을 자기 아파트에 숨겨 경찰에 체포되지 않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1968년말 서둘러 프랑스로 되돌아온 푸코는 본격적인 정치적 행동에 돌입했다. 새로 생긴 뱅센느 실험대학의 철학과장을 맡게 된 푸코는 급진적인 철학자들을 모으고 좌익 학생들과 행동을 함께 했으며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문제, 스페인, 이란, 폴란드 등의 정치문제에 일일이 개입하는 등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감옥수감자들의 인권에 각별한 관심을 쏟은 푸코는 1971년과 1972년에 감옥 안에서 일어난 일련의 폭동을 계기로 수감자들이 감옥의 극도로 가혹한 생활 조건을 책으로 쓰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때부터 푸코는 감옥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75년에 발간한 <감시와 처벌>은 처벌의 형식으로서 감옥의 기원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푸코는 프랑스 최고의 지성으로 여겨지는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임명된 이후에도 공개강좌를 통해 반체제운동에 힘을 쏟았다. 전 세대인 사르트르가 중요한 정치적, 도덕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철학을 적용했던 것과는 달리 푸코는 지식인 자신이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이 기자와 TV카메라의 시선을 감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단 언론의 시선이 감옥으로 돌려지고 나면 입을 다물었다.

    사르트르는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규정했다. 실존주의 철학과는 다르지만 구조주의 사상가들도 대부분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푸코는 마르크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이는 권력에 대한 그의 연구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푸코는 국가권력을 투쟁의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마르크스적 시각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가졌다.

       
    ▲노엄 촘스키(오른쪽)와 함께 TV토론에 출연한 푸코.
     

    "체제를 전복하라"

    푸코는 사회 곳곳에서 미시권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제시했다. 즉 권력은 정치권력뿐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힘의 관계를 뜻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인간들의 모든 관계 속에 내재돼 있으며 모세혈관과 같이 권력관계는 사회 구석구석까지 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푸코가 말하는 미시권력이다.

    푸코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의 권력분석이 그 어떤 정치적 행동의 가능성도 부인하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푸코는 정치적 저항은 당위라고 주장한다. 권력관계는 저항을 통해 변화되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푸코의 권력이론은 구조주의 및 후기 구조주의 이론, 페미니즘,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 등에 다각도로 영향을 끼쳤다. 1968년 이후의 사회를 분석하면서 푸코가 규정한 자신의 과제는 그의 실천적 지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조용히 혹사하는 체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실체를 폭로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고, 전복시켜야 한다. 내가 저술 작업에서 할 일도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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