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촌사람 시베리아를 거닐다
    [참새의 러시아 여행기③] 북풍한설
        2018년 10월 18일 03: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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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나폴레옹과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역에 도착했다. 동트기 전에 도착했기에 아침까지 기다려야 한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러시아TV를 지켜보다 역사 밖으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공기가 짱짱하게 차다. 시베리아의 첫 느낌이다.

    이 곳은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린다. 연원은 이들이 ‘조국 전쟁’이라 부르는 대 나폴레옹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틸지트 조약으로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의 기세는 천하무적처럼 보였다. 남은 적수는 영국과 러시아뿐이었다. 1812년 나폴레옹은 힘없는 동맹국들을 쥐어짜서 60만 대군을 만들어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천재 전략가께서 러시아를 우습게 본 게 탈이었다. 홈그라운드의 장점을 활용한 러시아군의 ‘치고 빠지기’ 전술로 나폴레옹은 먹을 것도 없는 모스크바에 잠시 머물다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공수(攻守)의 양상이 바뀐 전쟁은 러시아군의 파리 입성으로 끝났다.

    짜르 알렉산드르 1세를 따라 서유럽에 종군했던 청년귀족들은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자유의 숨소리를 들려주고자 했던 이들은 무력행동을 계획했다. 1825년 12월에 궐기했기에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 등극한 니콜라이 1세에게 계획이 누설되어 장교들의 열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5명이 처형당했고 많은 수가 시베리아 유형(流刑)에 처해졌다. 또한 황실 권력은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에게 반역자 남편을 버리고 귀족 신분으로 재가를 하든지, 모든 특권을 버리고 유형을 가든지 하나를 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시베리아로 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부인들은 혁명가인 남편을 찾아 북풍한설의 얼음길을 1년 넘게 걸어 시베리아로 갔다. (남편과 재회하지 못하고 도중에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유배자들은 처음에는 강제노동을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현지에 정착하여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졌다. 이들에 의해 이르쿠츠크는 유럽의 귀족문화가 꽃피는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도시는 이르쿠츠크 주의 주도(州都)를 겸하는데 과거에는 알래스카까지 주의 영역이었다니 그 광활한 강역(疆域)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면(面)이 있는데 넓이가 사방 십 리에 이르지 못한다)

    조선공산당의 뿌리 이르쿠츠크

    우리 근대의 붉은 이야기는 시베리아에서 시작된다. 1919년 1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하기 위한 회합을 가졌다. 이 그룹의 지도자는 김철훈, 오하묵, 남만춘, 조훈 등인데 러시아 이주 2세대가 주축이며 후일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라고 불리게 된다. 1925년 4월 ‘창당’된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 및 이르쿠츠크파와 긴밀한 연계하에 있던 청년들이 주도했다. 예를 들어 공산당 산하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를 만든 박헌영은 상하이 체류 시절 이르쿠츠크파의 사회주의 연구소에서 활동했다. 경성에서 만 리 떨어진 이르쿠츠크가 좌파들의 근대사에서 ‘상석’을 차지하는 까닭이 이러하다.

    불행하게도 전위당은 지배기구의 집요하고도 성실(?)한 탄압과 내부 역량의 한계로 붕괴와 재건을 되풀이하다 사라졌다. 식민지배가 지나간 후 공산당이 재등장하였으나 남에서는 물리적 탄압이, 북에서는 정파적 권력 대립이 그들에게 역사 내부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80년대 이후 복원된 좌파 정치가 이들을 어떻게 예우할 것인지는 많은 공론이 필요할 것이고, 다만 나는 가을바람 부는 도시에서 지나간 열정에 바치는 술 한 잔을 생각한다.

    바이칼 호수를 향하여

    아침이 밝아 역을 나서 전차에 올랐다. 1969년 서울에서 사라졌다는 궤도전차다. 중년의 차장이 요금을 받고 영수증을 준다. 창밖의 풍경 중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유럽풍의 건물 사이에서 퇴락해가는 목조주택들이다. (역관 선생 이야기로는 가난한 집주인들이 어찌할 수 없어 방치하기 때문이란다) 오전 10시에 터미널에서 알혼 섬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이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호수까지면 우리네 춘천에서 소양호 가는 정도에 비할 수 있을 것인데 5시간을 넘게 달려야 한단다.(이 놈의 스케일!) 러시아는 기온의 연교차가 심해 노면의 상태가 좋지 않은 구간이 많다. 두 시간을 달려 휴게소에 정차했다. 러시아 차(茶)와 달디 단 케이크의 조합은 훌륭했다. 정차 시간도 통 크게 30분이라는데 역관 선생이 어리버리하다 낙오할 수도 있다고 겁을 줘 버스 곁에 껌딱지 신세였다.

    다시 두 시간을 달려 바이칼 호수에 도착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넜다. 지역버스로 갈아타고 비포장 도로를 한 시간 가량 달리는데 가방은 요동치고 바닥에서 먼지는 올라오고 차창 밖으로는 목동이 말을 몰고 지나간다. (1950년대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포장마차를 탄 듯하다) 어쨌든 서울을 떠난 지 닷새 만에 드디어 바이칼 호수 알혼 섬 후지르 마을에 도착했다.

    옴(om), 영험이 깃든 곳에서

    아주 옛적부터 시베리아에서는 망아(忘我) 상태 중에 주술을 행하는 능력자를 ‘사만(saman)’이라 불렀다. 바이칼 일대는 유라시아 무속의 고향이자 샤머니즘의 어원이 되는 곳이다. 경건하게 신령한 대지에 발을 디뎠는데 (앗!) 길은 비포장 진창길이고 곳곳에 소와 말의 배설물로 지뢰(?)밭이 형성된 것이 우리네 70년대 시골길과 닮았다.

    ‘세르게’는 신령한 기둥으로 소원을 비는 색색의 천이 둘러져 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부르한 바위를 찾았다. 바이칼 호수 주변은 몽골계 부리야트 사람들의 영역인데 부르한 바위는 ‘샤먼 바위’(부르한은 땅이름)라 불리기도 하며 여러 전설에 겹치기로 등장하는 귀하신 암석이다. 우선 현지 부족의 탄생설화에 등장하는데 이들은 우리와 어순이 같은 알타이어를 사용하고 풍습도 비슷하다. 그리고 몽골계의 아이콘 ‘칭기스칸’이 묻혀있는 성소이며 우리네 조상인 환웅이 형제들과 하늘에서 하강기류를 타고 착륙한 곳이 또한 이 곳이란다. (바이칼 호수를 한민족의 시원으로 보는 설도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기가 센 곳으로 미국의 셰도나(애리조나 주에 있으며 강한 영(靈)적 에너지로 유명한 곳)에 비견되며 아시아에서 아홉 군데의 신령한 공간 중 하나다. (이쯤 되면 호수 어딘가에 태권V를 감추고 있는 김박사의 연구소 정도 된다!) 우리의 당산(堂山)나무 격인 ‘세르게’를 둘러보고 숙소에서 제공되는 저녁밥을 먹었다. 러시아 음식이 입에 맞아 다행이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뒹굴며 전화기로 동네방네 자랑질까지 마쳤다. 촌사람 나들이에서 더 구할 것이 남았을까.

    부르한 바위는 샤먼들이 기를 받기 위해 찾는 명소다

    푸르공과 롤러코스터 투어

    처음부터 바이칼 호수에서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따윈 없었다. 낮에는 호수에서 멍하게 있으며 지나는 러시아 제부시카(아가씨)를 곁눈질하고 석양이 지면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돌아와 보드카 한 잔을 폼 잡고 마시는 정도였을까. 하지만 성실한 여행 설계자(역관 겸임)께서 이 곳까지 왔으니 투어를 경험해야 한다고 강추를 해서 알혼 섬 북부투어에 나섰다.

    일단 차량이 묘하게 생겼다. 푸르공(Furgon)이라 부르는 미니버스다. 구 소련에서 시베리아의 ‘길 없는 지형’을 달리게 만든 군용차량을 개량한 버전이란다. “사람이 타는 차가 맞나?” 란 생각이 들 정도로 탑승자에 대한 배려 없이 내부가 썰렁하다. (손잡이도 없다!)

    푸르공을 타고 섬의 북쪽으로 달려가는 길은 지표면에 설치된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다

    투어를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해안가(바이칼은 그냥 짜지 않은 바다다!) 휴게소에 정차했다. 20루블(340원)을 내고 중국여성들 뒤에 줄을 섰다. 화장실은 한 칸이고 재래식이다. 나오면서 뜬금없이 ‘새마을운동’이 생각났다. 몸이 가벼워지길 기다린 듯 노면은 지상 최장의 롤러코스터 레일처럼 극강의 역동성을 띄었다. 투어는 사진 찍기 좋은 절경에 사람들을 풀어놓고 다시 모이면 북쪽의 다음 포인트로 이동해서 섬의 극북(極北)까지 진행된다.

    하보이 곶 – 알혼 섬의 북쪽 끝이다

    투어의 마무리는 푸르공의 쥔장께서 바구니에 담아와 차려주시는 점심밥이다. 보슬비가 내려 차 안에 밥상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유라시아 각지에서 온 아홉 명이 생선 국(바이칼의 명물 ‘오물’은 아니란다), 빵, 샐러드, 차를 함께 나누는데 생선 국이 일품이다. 우리가 탑승한 푸르공의 쥔장은 선한 눈매의 부리야트 사람이다. 이 곳의 풍광에 취하다 보면 부리야트 사람들은 전생에 지구를 구한 공덕으로 텡그리 신(몽골계의 천신)으로부터 순일무잡(純一無雜)의 낙토를 하사받았다는 공상이 든다.

    유람선, 깊은 산속 옹달샘, 은하수

    오프로드 투어를 한 다음 날은 배를 타고 물살을 가르는 체험에 나섰다. 첫 기항지에선 이 곳의 종교 시설물을 둘러보았다. 언덕 위에서 타루초가 펄럭이고 나는 길손들과 함께 초루텐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연로하신 부모님의 무강함을 빌었다. 타루초는 불경 구절이 적힌 색색의 천인데 하늘과 인간의 전령사 역할이다. 또한 초루텐은 불탑이다. (티벳 불교용어를 빌려 썼지만 부리야트 사람들이 뭐라 칭하는지는 모른다) 일찍이 티벳에서 현지의 무속신앙과 융합되어 주술적 요소가 입혀진 불교는 중앙아시아와 몽골을 거쳐 이 곳까지 전해졌다. 여기는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의 북방한계선이다.

    초루텐은 반드시 오른쪽 방향으로 돈다

    두 번째 기항지에선 산에 오르는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여기까지 와서 “고작 등산이라니” 라는 기분으로 올랐는데 길 끝에서 맛 본 샘물은 감로(甘露)라는 찬탄으로도 미안함이 느껴지는 별유천지 맛이다. 투어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초대로 보드카를 함께 마셨다. 잘나가는 IT 청년들의 고민은 ‘주거’문제였다. 우리는 은하수 밑에서 담배를 피우며 크고 작은 분노를 공유했다. 이것으로 여행은 마무리 되었다.

    북풍한설과 따뜻한 남쪽 나라

    이제 돌아가는 장정(長征)이 시작되었다. 아침 8시 출발. 한 시간의 오프로드 초원 질주 후 도로 휴게소에서 첫 눈을 만났다. (9월에 함박눈이라…) 이르쿠츠크에 도착해 아파트를 빌려 일박했다. 현지 중산층들이 사는 곳이라니 나름 ‘스몰 럭셔리’ 체험인 셈이다. 다음 날 공항에서 너무 높은 곳에 달려있는 소변기를 보고 좌절했다. (이 나라 화장실은 끝까지!!) 그래도 떠나니 즐거웠고 돌아가니 또한 즐겁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바이칼 호수와 시베리아의 눈 덮인 산하

    나이 오십이 넘었으니 한 번 여행에 깨달음을 구한다면 어리석은 소망이다. 다만 만리 이역의 여정이 생각 어딘가에서 쉬고 있다가 늙어감이 권태로울 때 나를 실없이 웃게 만들기를 바란다. (옴!)

    공덕시장에서 족발과 소주를 나누며 우리 일정은 모두 끝났다. 역관 선생은 내년 겨울에 시베리아의 북풍한설을 느끼러 다시 간단다. 늙고 쇠약한 나는 남쪽 나라로 호치민 주석을 배알하러 갈 거다. <끝>

    필자소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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