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파티비> 유튜브 -       ▒       붉은오늘 팟캐스트 -       ▒      


  •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참새의 러시아 여행기②] 3일 여정
        2018년 10월 12일 10:23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철길이 아닌 역사 자체

    새벽 1시 기차가 출발했다.

    제정 러시아가 국운을 걸고 1891년에 착공한 이 철도는 25년이란 오랜 시간을 거쳐 1916년에야 완공되었다.

    블라디보스톡 역 구내에 들어서면 ‘시베리아 횡단철도 9288km’라는 글귀가 새겨진 기념탑이 서 있는데, 당시 23세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횡단철도의 기공식을 주관한 자리라고 한다. 짜르 알렉산드르 3세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 사업을 황태자에게 일임하여 후일의 니콜라이 2세는 철도 건설을 비롯하여 시베리아 개발에 관한 전권을 행사하였다. 횡단철도 건설 사업은 그의 재위 기간 내내 진행되었으며 완공된 지 4개월 후 2월 혁명으로 폐위되어 짜르는 철길과 운명을 함께 했다.

    또한 시베리아 철길에 얽힌 한인(韓人)들의 자취를 살펴보면 횡단철도의 개통과 함께 철도 연변의 주요 도시들로 한인들의 생활영역이 확장되어 곳곳에 한인 정치조직들이 생겨났다. 최초의 볼셰비키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을 비롯한 혁명가들이 등장했고 한인사회당과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가 도처에서 대립하였다.

    조봉암과 풍운아들 그리고 고려인

    1925년 6월 조선공산당 전권대표 보좌이자 고려공산청년회 대표인 청년 조봉암은 이 길을 따라 모스크바로 향했다. 두 해가 지나 재건된 당의 승인을 받으려는 김철수와 그를 반대하던 김찬도 횡단열차에 올라 같은 길을 각자의 염원대로 갔다. 비단 좌파뿐만 아니라 우사 김규식 같은 우파 지사들도 독립의 염원을 안고 이 길을 지났다. 우리가 이름과 기록을 남긴 이들만을 기억해야 하는가. 이 길은 ‘모양을 꾸미지도 이름이 빛나지도 않았던’ 순수의 염원들이 자욱자욱 새겨진 길이기도 하다.

    1937년 11월 17만 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태워졌다.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며 적성국으로 부상하는 일본의 극동지역 스파이 활동을 방지한다는 당과 스탈린의 예방억제정책으로 고려인들은 하루아침에 ‘디아스포라’의 주인공이 되었다. 슬픔조차 만리 밖까지 지고가야 하는 여정에서 4만 명이 희생되었다. 봉오동과 청산리의 영웅 홍범도 역시 강제이주 후 쓸쓸한 노년을 카자흐스탄에서 보냈다. (자신의 무용담을 공연하는 극장의 수위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달리는 파노라마에서 74시간

    횡단열차의 3등 객차는 여섯 개의 침대 사이에 이동통로가 놓인 개방형 공간이다. 혼성 4인으로 이르쿠츠크 원정대를 구성할 때는 4인실 이등 객차를 점거할 예정이었으나 단출하게 두 사람만 남아 공간 이동을 했다.

    열차에 올라 번호를 확인하고 침대 밑의 빈 공간에 트렁크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역관 선생을 따라서 지급받은 베개 및 침대의 커버를 씌웠다. 신발은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침대의 배정은 국적과 남녀노소를 불문한단다.

    내 위칸의 우락부락한 러시아 아제는 하바롭스크에서 중앙아시아계 여성으로 바뀌었다. 맞은편 역관 선생의 위는 조용한 러시아 남성에서 몽골계 아제로 울란우데에서는 러시아 아가씨로 변화무쌍했다. 우리를 포함해 대부분의 승객들이 열차에서 지내는 동안 식사를 스스로 해결하며 한 조각의 가림막도 없는 공간에서 날것의 일상을 함께 한다. 불편하고 생경하며 흥미로운 시공간이다.

    날이 밝자 러시아의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책에서만 존재하던 자작나무 숲이다. 조봉암이 젊은 날의 어느 해 겨울에 눈 덮인 숲에서 길을 잃어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삼일 밤낮을 걸어 생명을 구한 적이 있었다는 그 자작나무 숲이다.

    시베리아의 광활함은 전화기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역사의 도시 하바롭스크와 자유시

    대지에 놓인 철도가 선이라면 흩어져 있는 도시들은 점에 비유할 수 있다. 한나절을 달려 하바롭스크에 진입했다. 도시 이름은 시베리아를 탐험했던 개척자 하바로프에서 유래되었다. 이 도시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1917년의 혁명에서 볼셰비키들과 함께 백군에 대항해 싸웠다. 당시를 기념해 중심가에 ‘김유천 거리’라 불리는 지명이 있다. 또한 이동휘와 일군의 활동가들이 1918년 여름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도시이기도 하다. 남한 좌파의 발상지 중 한 곳에서 쉬어가게 되었다.

    마땅히 경건한 상념에 젖어 있어야 하건만 전화기가 먹통 상태로 잠자는 바람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TSR(Trans Siberian Railway :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달리는 중에는 와이파이도 데이터도 사용할 수 없다. 시가지에 진입해야 기지국을 찾아 바탕화면의 안테나 눈금이 올라가는데 고대하던 대도시 한복판에서 멍하게 있어야 하다니 급 실망이다.

    은빛 자작나무의 끝없는 행렬이 권태로 다가오자 책이 생각났다

    열차는 다시 해가 지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애초에 부피가 두꺼운 두 권의 책을 준비했으나 트렁크가 작아 한 권은 얇은 책으로 바꿨다. 몽양 여운형(1886~1947)에 관한 소책자는 두 시간 후 <조선공산당 평전>으로 교체되었으나 반나절 만에 모두 완독해 버렸다. (읽던 책이 아닌 신간을 가져왔어야 했다)

    오전 2시 열차는 자유시를 지났다. 자유시는 1921년 6월 27일 유혈참변이 벌어졌던 도시 스보보드니를 말한다. (역관 선생은 스바보드니가 맞는 표기란다)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소비에트 적군과 한인 자유대대(이르쿠츠크파)가 사할린 의용대(한인사회당계) 및 대한독립군단을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독립운동사의 비극이다. 붉은 군대와 비(非)좌파계 무장조직까지 얽혀있지만 좌파세력 간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기원을 찾는 연구자가 많다.

    오버랩, 다툼을 기억하다

    1987년 여름이 끝나가던 8월 말에 연대 노천극장에서 전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전해투) 결성식이 열렸다. 행사장을 메운 참가자들 중엔 수백 명의 CPC(헌법제정 민중회의 소집파)와 천 명이 넘는 CA(제헌의회 소집파)가 있었다. 집회가 끝날 무렵 ‘교문 박치기’(가두 진출을 막는 전경들과 벌이는 공방전)를 예정했던 주최 측과 정치토론을 요구하던 CA는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활극을 만여 명에 가까운 참가자들 앞에서 보여 주었다. 정치적 견해나 노선이 다르면 술자리 대화도 원만하기 힘들었다. 좌파에게는 “주둥이만 놀리고 싸가지가 없다”는 비난이 주사NL(민족해방)은 “머리가 빈 유사종교” 집단이라 했다. 무지개를 찾아 떠났던 길에서 어떤 이는 조금 변했고 누군가는 많이 변했다. ‘괴물이 아닌 사람’이 되기는 동서고금을 일관되게 어렵고도 어렵다.

    극동 공화국, 거란족, 인민주의자

    끝이 보이지 않던 자작나무 숲도 몽골에 가까운 국경에서 타이가 침엽수림으로 변했다. 치타 역에 정차했을 때 처음으로 열차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치타는 과거 극동공화국의 수도였다. 치타 역에 정차 중인 횡단열차

    10월 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의 소비에트는 외국의 간섭 군대와 내부의 반혁명군에 의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권력이었다. 그들은 극동 방면의 외국 군대와 소비에트 연방 사이에 완충지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극동 공화국을 만들었다. 소련판 ‘만주국’이다. 수도는 처음에는 베르흐네우딘스크였는데 후에 치타로 옮겼다. 내전이 승리로 끝난 후에 소명을 다한 괴뢰국은 스펀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에 흡수되었다.

    횡단열차에 동행하게 된 러시아 사람들은 종종 우리에게 중국인이냐는 질문을 했다. 러시아어로 중국을 뜻하는 ‘키타이’는 거란(契丹)족에서 유래되었다. 요(遼)나라의 전성기인 성종 때 거란(Kitai)이란 명칭이 서방에 알려졌다고 한다. 여진족에게 요나라가 멸망당한 뒤 야율대석이 이끄는 무리가 중앙 아시아로 이동해 서요(西遼)를 건국했으나 80년 만에 멸망했고 거란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키타이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로 지금의 존재를 대변하는 역설의 단어인 셈이다.

    시베리아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는 원시림이 많다. 그러나 우리네 심산유곡과 다른 점은 오염원이라고는 없는 대지를 흐르는 물빛이 맑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많이 의아했는데 문득 ‘볼셰비키와 러시아 혁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들은 “브나로드(인민 속으로)”를 슬로건으로 한 농촌 계몽운동이 실패한 후 테러를 중시하는 ‘인민의 의지’파와 토지문제에 집중하는 ‘흑토 재분배’당으로 분열하였다는 내용이다. 우리네 농토를 황토라 부르듯 이들의 대지는 검은 색의 흑토인데 땅의 어두운 빛깔이 물빛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믿거나 말거나!!)

    울란우데 또는 베르흐네우딘스크

    울란우데는 ‘붉은 우데강’이란 뜻이며 옛 이름은 베르흐네우딘스크이다. 1922년 11월 고려공산당 통합 당대회가 열린 곳이다. 당시 이동휘의 상해파와 러시아 한인2세 출신이 주력인 이르쿠츠크파의 극심한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코민테른(국제 공산당)의 중재로 대회가 개최되었다. 조봉암을 비롯한 국내의 사회주의자들도 (제3지대 성격의) 대의원으로 참가한 통합대회는 극강의 분열상을 보여주며 막을 내렸다.

    코민테른은 최후 조정을 시도했다. 상해파의 이동휘와 이르쿠츠크파의 김만겸, 국내파의 조봉암 등이 모스크바로 불려갔다. 조봉암의 1957년 회고에 의하면 “각 파의 대표들은 부하린에게 매달렸고, 부하린은 당신들은 모두 같다. 그저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을 뿐이다. 차이점을 스스로 조정하여 통합하라”고 권고했다 한다. (이역만리에서 파란 눈의 대동단결 이라니..)

    울란우데 중심가에는 혁명기에 희생된 한인들을 기리는 한글 기념비가 있다는데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볼 수 없었다.

    횡단열차에서 시간은 지루하면서 흥미롭게 지나간다

    시베리아의 파리에 도착하다

    몽골계 부리야트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를 떠나면 바이칼 호수변을 따라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환바이칼 구간이다. 9288km 이만 삼천리가 넘는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철길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통과했다. (전생에 나라를 팔았는지..)

    이제 짐을 다시 꾸려야 한다. 열차 승무원에게 지급 받았거나 빌린 물품들은 돌려줘야 한다. 3일간 머리를 감지 못했고 화장실은 많이 불편했다. (객차 한 량의 탑승 인원에 비해 화장실 두 칸은 심하다는 느낌이다) 풍경은 생경하지만 빛났고 이역의 삶들은 흥미로웠다.

    러시아 속담에 ‘시베리아에서 400킬로는 거리도 아니다, 영하 40도는 추위도 아니다, 그리고 보드카 4병은 술도 아니다’는 이야기가 있다. 징하게 넓고 큰 땅을 침대 한 칸에 갇혀 잘도 달려왔다. 새벽 3시 기차가 도착했다.

    필자소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이사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