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무덤'
[붉은오늘] 전몰자의 계곡과 프랑코
    2018년 07월 23일 10: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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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이 운영하는 팟캐스트 ‘양경규 정종권 심재옥의 붉은오늘’과 맞물려 연재하는 ‘붉은오늘 사이드스토리’ 두번째 글이다. ‘스페인 내전과 인민전선’ 2회분이 본격적인 스페인 내전을 다루고 있고 이번 글에서는 프랑코의 무덤 이야기이다. 전 회의 글은 “스페인 민중시인 로르카”<편집자> ————————–

흠모하는 우상을 눈앞에서 직접 만난다는 것은 흔히 접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다. 십대 친구인 리카르도와 호르헤는 가르시아 로르카라는 시인에 흠뻑 빠져있었다.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국민시인 로르카에게 열광할 정도였으니 두 문학소년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 국민시인은 자신들의 고향인 그라나다 출신이었다. 둘은 짧은 일탈을 결심한다.

불가능한 것을 소망하는 인간, 신이 설정한 섭리, 이를 거스르려는 자유로운 영혼의 비극적인 결말. 로르카의 표현주의 연극 예르마(Yerma)를 보기 위해 호르헤와 마드리드로 향한 리카르도는 그곳에서 운명처럼 로르카와 마주친다. 그러나 얼마 후 리카르도의 우상 로르카는 소리 없이 그라나다에서 사라진다.

내전이 끝났지만 프랑코의 민병대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보복이 두려워 떠나고, 민병대에 가담했던 사람들도 고향을 떠났다. 부모를 따라 푸에리토리코에 온 리카르도는 대학에서 로르카의 시와 연극을 가르치며 안락한 삶을 이어간다. 그런 어느 날 로르카의 죽음에 숨겨진 의혹이 있다는 단서를 따라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년 전의 그라나다로 돌아온다.

엇갈리는 사람들의 대화에서 퍼즐을 맞춰 나가지만 진실이 가까워질수록 리카르도는 목숨마저 위협을 받는다. 마침내 진실과 마주쳤을 때 리카르도는 진실을 부정하며 절규한다.

엔디 가르시아가 로르카 배역을 자처해 더 유명해진 영화 <데스 인 그라나다>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일어난 로르카와 그라나다 학살을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내전 기간 동안 학살당한 사람들은 익명이 아닌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내전이 끝나고 집권한 프랑코는 ‘공포’를 심어주는 방법으로 사람들이 입을 막는 방법을 선택했다. 모든 언론들은 폐쇄되고 살아남은 사회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한밤중에 사라졌다. 프랑코는 스페인을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고, 그의 강력한 후원자는 스페인 전역에 퍼져있는 로마 가톨릭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수십만 명이 아무도 모르게 조국을 떠났다.

스페인을 거대한 감옥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프랑코는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의심스러운 인물을 소리 없이 제거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아를 납치하는 전대미문의 범죄를 자행했다. 스페인 전역에서 수만 명의 아이들이 무차별적으로 사라졌고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부모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아이들이 납치되지 않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닫았다.

이 추악한 범죄를 은밀하게 지원한 것도 역시 로마 가톨릭이었다. 2006년 추악한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설치된 위원회에 따르면 최하 3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납치되어 행방불명되었거나 살해된 것으로 드러났다.

프랑코 사후에도 유아 납치는 중단되지 않고 두 가지 형태로 진화하면서 계속됐다. 2009년 마드리드에 거주하던 한 남성은 다락방에서 아버지의 편지 한 통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자신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출생 신고는 허위로 위조되었고 자신은 어디에선가 입양되었던 것이다.

언론에 이 남성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유사 사례가 쇄도했다. 이들은 단체를 조직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나섰고, 그 막다른 골목에 로마 가톨릭의 한 수녀가 이 모든 일을 관장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프랑코 집권 기간에도 유아납치에 간여했던 수녀는 그의 사후에도 수도원 운영의 재정적인 이유로 일을 계속했고, 90살인 수녀가 감옥에서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아 그 숫자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같은 에스파니아어를 쓰는 남미에서는 70년대 독재정권들이 이를 차용했다. 프랑코의 추종자들인 이들은 유아 납치를 그대로 차용했다. 아르헨티나 엘리트 군인의 아들은 성인이 되면서 하나의 의문을 품게 됐다. 자신이 아버지 외모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 줄곧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독재정권이 와해되자 의문을 따라간 아들은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쳤다. 자신은 친아들이 아닐뿐더러 친부모를 살해하고 자신을 데려와 길러준 것은 (양)아버지라는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마드리드에서 서북쪽 세고비아 방향으로 30여분을 가다보면 바위산 위로 커다란 십자가가 한눈에 보인다. 대중교통수단으로 갈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지만 무려 10킬로나 떨어진 도로에서 보아도 한 눈에 보이는 크기다. 알려진 것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큰 십자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공식명칭은 ‘전몰자의 계곡(Basílica Menor de la Santa Cruzdel Valle de los Caídos)’이다. 스페인의 국립기념물이기도 하다.

전몰자의 계곡(사진=위키피디아)

내전이 끝난 후 프랑코는 사회통합과 화합을 도모한다면서 민병대와 인민전선 전사자들의 무덤이자 성당을 함께 건설한다고 발표한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전몰자의 계곡을 짓는데 동원된 사람들은 모두 정치범과 인민전선의 포로들이었다. 중세처럼 경건한 방식으로 지어져야 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주문에 따라 일체의 기계를 배제하고 수작업으로 진행됐다. 2만 여명의 정치범과 포로들이 만든 152미터 크기의 화강암 십자가 역시 수작업이었다.

그런데 거대한 바위산을 뚫어 축구장 크기의 지하성당을 건설하고 4백 평방미터가 넘는 전몰자의 계곡이 수작업으로 건설되는 데는 18년의 시간이 걸렸다. 화합은 고사하고 마치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짓는 노예처럼 정치범과 포로들을 수작업으로 ‘전몰자의 계곡’을 짓는데 몰아넣었다. 2만 여명이 동원된 그곳에서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또 얼마나 죽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살아남았지, 그 증언은 있지만 민주화가 된 오늘도 스페인에서 구체적인 조사는 진행하지 않고 있다.

내전 동안에 죽은 민병대와 인민전선 4만여 명 전사자를 묻은 ‘전몰자의 계곡’에는 프랑코의 유언에 따라 자신이 그 어디엔가 묻히면서 민주화 이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프랑코 무덤을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끓었지만 한동안 집권한 중도좌파 사회노동당(PSOE)은 구조개혁의 범위를 놓고 논쟁을 거듭하다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 되었다. 이어 집권한 중도우파 국민당은 태생적인 한계 탓에 프랑코 무덤의 이전을 다른 방향으로 시간을 끌며 소모했다.

전몰자의 계곡이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내면서 또 다른 소문들이 돌았다. 이 계곡이 사후 프랑코의 (거대한) 무덤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프랑코는 이런 소문들에 민감할 정도 이상으로 대응했다. 전몰자의 계곡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은 체포되고 사라졌다. 18년 동안 계속된 이 잔인한 ‘스페인 피라미드’는 스페인 국민은 누구도 알지 못했고 알아서도 안됐다. 프랑코는 자신의 유언대로 1975년 전몰자의 계곡에 묻혔다.

2018년 6월, 부패 스캔들도 실각한 국민당의 라호이 총리를 대신해 집권한 사회노동당의 산체스 총리는 전몰자의 계곡에서 프랑코의 무덤을 옮긴다는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유족들과 국민들은 이장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극우세력이 전몰자의 계곡에서 집회를 열면서 반발하고 있다. 사회노동당이 소수정부라는 것과 조기총선에서 다수당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도 진행과정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

대전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청소년수련원을 가다보면 광역시에 소속되었다고는 보기 힘들 정도의 한적한 시골이 계속된다. 그 산내면 골령골에도 피의 역사가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전형무소의 수감자와 보도연맹 관련자들이 한밤중에 끌려가 골령골에서 모두 잔인하게 학살당한 것이다. 그 숫자는 7천여 명에 이른다는 알려져 있다. 이재유와 함께 경성트로이카의 한축을 이끌던 이관술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탓에 골령골에서 함께 학살을 당했고 그의 시신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전몰자의 계속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무덤이라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남아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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