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가지에서의 왈츠'
스페인 민중시인 로르카
[‘붉은오늘’ 사이드스토리] 내전
    2018년 07월 11일 10: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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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이 운영하는 팟캐스트 ‘양경규 정종권 심재옥의 붉은오늘’은 월 2회, 격주 간격으로 방송을 하고 있다. 2017년 9월에 시작했으니 거의 1년이 되어 간다. 최백순 기획위원이 붉은오늘 방송과 연계하여 방송에서 다루는 주제와 관련한 사이드스토리를 연재할 예정이다. 이번 방송이 ‘스페인 내전과 인민전선’ 1회분이었고, 이번 사이드스토리는 스페인내전에서 학살 당한 민중시인 로르카 이야기이다. 앞으로 관심 부탁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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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그라나다 근교 알파카르 숲속에는 스페인 국민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한 인물의 유해를 찾기 위한 발굴단의 일거수일투족은 연일 언론의 지면을 장식했다. 인물의 이름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72년 만에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민병대에 학살당한 민중시인 로르카의 유해 발굴이 시작된 것이다. 유족들은 유해 발굴에 부정적이라는 짤막한 코멘트만을 남겼다. 수천 명과 함께 학살당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로르카 발굴에만 집중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정부와 국민들의 요청으로 DNA는 제공했지만 겨울이 다가올 때까지 유해를 발굴되지 않았다. 로르카는 알파카르 숲속에서 계속 영면에 들었다.

로르카는 그라나다에서 반나절 떨어진 소도시 푸엔테 바케로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농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인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로르카의 삶은 평탄함, 자체였다. 넉넉한 경제력을 가진 부모들 덕분에 순조롭게 학업을 마치고 그라나다대학에 입학했다. 로르카의 삶에 전환점을 준 것은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지구를 보고난 후였다. 호화로운 알함브라궁전 아래에 자리 잡은 알바이신은 낡고, 쓸쓸하고, 가난함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훗날 로르카는 알바이신을 ‘무어인의 처절한 절규’라고 묘사했다.

음산한 그라나다가 젊은 그를 매료시키지 못했는지 이내 대학을 중퇴하고 마드리드로 떠났다. 전공도 부모님의 뜻과 달리 법학에서 문학으로 바꾸었다. 마드리드에서 로르카는 시집 《시의 책》으로 시인으로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전통시 기법을 그대로 살린 시집 《Romancero gitano》은 그에게 스페인뿐만 아니라 남미에서도 이름을 날릴 정도로 국민시인의 자리에 올랐다.

시인으로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에게는 알바이신 잔상이 계속 남았고,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농민들의 가난한 삶이 그를 괴롭혔다. 로르카에게 두 번째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여름별장 내에 있는 박물관. 로르카집안 여름별장.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8년간 독재정권을 이끌던 리베라 장군이 죽자 폐쇄된 국회와 지방의회가 다시 문을 열 채비를 서둘렀다. 1931년 선거에서 토지개혁을 전면에 내건 공화파들은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제2공화정이 들어섰지만 봉건영주와 교회들은 공화파들에게 격렬하게 대응했다. 특히 대규모 토지들을 소유한 교회들은 공화파들을 악마화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무기력한 공화파들의 개혁은 공전을 거듭했고 농민들은 공화파들에게서 멀어져갔다.

로르카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농민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로르카가 선택한 방법은 선전이나 선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자신이 가진 시를 무기로 대학생 극단 ‘바라카’를 조직하여 전국을 돌며 농민들의 마음을 얻는 것에 집중했다. 계급 기반이 없는 공화파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로르카는 ‘계급’의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33년 겨울 총선에서 봉건영주, 왕당파, 교회가 강력한 동맹을 맺고 스페인자치연합(CEDA)을 출범시켜 압승을 거두었다. 농민들이 공화파에게 등을 돌린 것이 치명적이었다.

파시스트 정권은 공화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민중들의 입을 막았다.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서려고 한 것은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이었다. 사회노동당(PSOE)와 노동자총동맹(UGT)의 지도자인 라르고 카바예로는 노동자들과 함께 총파업으로 맞섰지만 군대를 동원한 정권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됐다. 우회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노동자들은 그동안 대립하고 있었던 노동자총동맹과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한 노동자국민동맹(CNT)의 동맹을 촉구했다. 선거를 통해 노동자정부 수립을 위한 인민전선(Frente Popular)이 탄생했다.

1936년 선거에서 인민전선은 다수당을 차지하며 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인민정부는 노동자와 농민들을 위한 급진정책을 주도했고, 위협적인 존재인 프랑코 장군을 카나리아제도로 내쫓았다. 자본가와 왕당파들은 지켜만 보지 않았다. 인민정부가 노동자임금을 올리는 정책을 시행하자 자본가들은 스스로 ‘자본파업’을 일으켜 공장 문을 닫아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왕당파들이 사주한 자객들이 사회주의자들을 테러하며 신변을 위협했다. 자본가와 왕당파의 격렬한 저항은 정국을 혼란으로 빠트렸다. 변방으로 보낸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1936년 7월 모로코로 건너간 프랑코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프랑코 장군의 민병대는 모로코를 출발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세비야와 그라나다로 향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마드리드로 후퇴해 후일을 도모하거나 허약한 전력으로 맞서 싸우거나. 인민정부는 후자를 선택했다.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그때 로르카는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로 향했다.

그의 시 낭송에 수천 명이 몰려드는 것을 잘 아는 민병대는 총보다 로르카의 목소리를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8월 19일, 무장 해제를 당한 로르카와 수천 명의 민중들은 알파카르 숲속으로 끌려가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로르카는 사회주의와 거리가 있었지만 언제나 민중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 대가로 죽음을 선택했다.

로르카와 살바도르 달리는 우정 이상의 관계를 나누었다. 마드리드대학 기숙사에서 처음 만난 로르카와 달리는 서로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곧바로 친해졌다. 달리의 그림에 매혹된 로르카는 한동안 시 쓰기를 뒷전으로 미룬 채 그림그리기에 몰두했다. 빈말을 할 줄 모르는 달리는 로르카의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평가했고 작품집을 내보라고 부추겼다. 로르카는 ‘달리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시로 화답했다.

동성애자인 로르카와 달리가 연인관계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달리는 소문을 단호히 부정했다. 파시스트 정권에게 동성애는 죄악이었고 로르카와 친분이 있다는 것은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달리가 디자인한 추파춥스 글씨 로고도 로르카의 필체를 흉내 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어떤 답변도 하지 않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만년에 달리는 로르카와 ‘특별한 관계’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라나다 대성당 앞에 위치한 이자벨광장에서 서남쪽으로 20여분 정도 걸어가면 아담하고 아름다운 공원이 나타난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공원이다. 단지 로르카를 추모해 공원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다. 공원 끝자락에는 소박한 2층 건물이 나타난다. 로르카 집안의 별장이다. 로르카가 그라나다에 머물 때는 언제나 이 별장을 이용했고, 남매들도 종종 모여 여름휴가를 즐기곤 했다. 여름 별장이라고 부리는 이유다.

별장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지만 문 앞에는 2019년까지 리모델링으로 이용할 수 없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실망감을 안고 돌아오다 선한 얼굴의 중년신사와 마주쳤다. 표지판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신사에게 화장실을 묻자 자기를 따라오라고 친절을 베풀어준다. 신사가 멈춘 곳은 로르카의 별장 앞이었다. 관리인은 자그마한 박물관을 둘러보게 해주며 로르카를 찾아 온 동양인을 격려했다.

국내에 출판되지 않은 시집과 달리가 칭찬했던 그림엽서 몇 장을 사고 로르카의 여름별장을 나섰다. 관리인이 하루에 한번 별장을 방문하지만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고 한다. 그라나다공항의 정식명칭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공항이다. ‘나뭇가지에서의 왈츠’는 그의 아름다운 시 중의 하나이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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