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빗자루질 25년, 앞으로도 이걸로 먹고살게 해달라
    By tathata
        2006년 04월 24일 01: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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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곡에서 서른한 살부터 빗자루를 잡기 시작해 지난해로 꼬박 스물다섯 해를 환경미화원으로 일해 온 천정출 씨(56). “그저 먹고 살기위해” 환경미화원 일을 처음 시작하게 됐다는 그는 일이 고되고, 힘들어도 가족이 이 돈으로 먹고 산다는 사실 하나로 버텨냈다고 한다.

    여름에는 쓰레기의 악취가 땀과 함께 범벅이 되어 흘러내려도 꾹 참았다. 시일이 한참 지난 쓰레기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와 몸에 스멀스멀 스며들어도 참았다. 겨울에는 연탄재가 부서져 온몸이 온통 뿌옇게 덮어 쓴 채로 일해도 참았다.

    청소부는 청소만 하는 게 아니다

    지금처럼 청소차가 압착차가 아닌 예전에는 화물칸에 쓰레기를 실어야 했다. 오물과 악취 속에서 쓰레기를 차곡차곡 쌓아올리다 보면 때로 “내가 사람도 아니다”는 생각이 울컥 치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도 1남2녀의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그를 버텨내게 했다.

       
     
    ▲ 칠곡환경지회 천정출 조합원
     

    그의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어서, 봄이 다가오면 가로수의 가지치기를 하고, 잡초도 뽑고, 꽃도 심는다. 한 번은 가지치기를 하다가 나무에서 떨어진 적이 있는데, 그 때 부러진 뼈가 아직도 쑤시다.

    가끔씩 산이나 강, 혹은 여관에서 자살하거나 죽은 사람이 발견되어 경찰이 끝내 연고자를 찾지 못할 때에는 시신을 묻는 일도 그들의 몫이다.

    “피붙이도 아닌 사람을, 생전에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씻기고 삼베옷을 입혀 무덤을 파서 묻어야 하는데 그 일은 참말이지 제일 힘들다”고 그는 말했다.

    "무연고자 시신 묻는 것도 우리 일, 참 힘든 일입니다"

    힘든 일이었지만, 칠곡군청 ‘상용직 공무원’으로 그는 묵묵히 일했다. 새벽에 청소일을 끝내놓고 주위를 돌아볼 때 어느덧 환해진 거리를 보면서 가끔은 보람도 느끼며 23년을 일했다.

    그런데 2002년 7월 1일 ‘경북위생사’로 용역계약을 맺고 난 뒤부터 그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용역업체로 이전하는 것은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됐다. 칠곡군은 앞으로 5년동안 고용보장을 약속하고, 임금도 깎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일하는 시간은 늘어나는데 월급은 자꾸 줄어들었다.

    칠곡군에서 일할 때만 하더라도 20여년 근속년수의 그가 받는 월급은 하루 7시간 근무에 230만원이었다. 하지만 경북위생으로 직장이 바뀌고 나서는 오전 2시부터 9시까지 하던 업무에서 오후까지도 일이 이어지기가 다반사였다. 그러고도 월급은 첫 달 230만원에서 220만원, 210만원으로 차츰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190만원까지 내려갔다.

    축제 인생에 가려서 안 보이는 다른 인생들

    일은 더 늘어서 오전 일을 끝내고 졸린 눈을 붙이기가 무섭게 다시 오후에도 일을 나가야 했다. 정해진 일 이외에 수시로 사장에게서 전화가 와 “군청에서 전화가 왔는데 00에 쓰레기가 쌓였단다. 빨리 가서 치워라”고 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퇴근시간도 훌쩍 넘겼다.

    계절마다 돌아오는 관공서의 각종 행사 뒤치다꺼리도 이들의 몫이 됐다. 칠곡군의 아카시아축제나 군 체육대회 등의 행사에도 달려가야 했다. 축제처럼 먹고 마시고 놀다 돌아간 뒤에는 으레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잔업수당도, 특근수당도 없었다. 공휴일도, 명절도, 일요일에도 일했다.

    “첫째 딸 결혼식이 내일모레라 사장에게 하루만 빼줄 수 없냐고 했더니, 안된다고 하더라. 일 끝내놓고 가라는 거다. 할 수 없이 냄새 벤 옷만 겨우 갈아입고 결혼식에 갔다. 그리고 돌아와서 또 일했다. 때로는 전화로 ‘높은 사람’ 누구 집 앞의 쓰레기도 치우라고 하는 경우도 많았다. 몸이 부서지도록 아파도 일을 끝내놓고 죽어라는 식이었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만들게 됐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너무나 당연한 요구를 말하는 것이 평생을 바쳐 일해 온 직업을 잃게 되는 일이라고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요즘에는 아내가 직물공장에서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겨울에는 보일러의 기름값이 없어 두 달을 내내 냉방에서 보냈다는 그는 다시 그 때의 ‘악몽’이 떠오르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쉰다. 깊은 주름이 더욱 패인다. “힘든 일이지만, 평생 동안 청소일로 먹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 일로 힘이 닿는데 까지 먹고 살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지난 22일 토요일, 칠곡군청은 주5일제 시행으로 한산했다. 일요일에 쉬게 해달라는 이들의 외침이 마치 딴 세상 얘기인 것처럼. 지난해부터 군청 건물에 걸린 ‘직장폐쇄로 경북위생사가 해고한 조합원은 군민에게 불편 주는 시위 즉각 중단하라’는 현수막은 여전히 튼튼하게 걸려 있었고, 이날 아침 천막 농성장의 현수막은 지난 밤 누구의 소행인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천막 농성장 멀리 ‘2005년 살기 좋은 도시 교육부문 대상 수상’이라는 현수막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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