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는 ‘청결의 도시’?
근대도시와 오물 이야기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도시 위생
    2018년 02월 19일 10: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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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중국의 생태도시, 그 이후”

1890년대 초 한국과 일본을 방문한 새비지 랜도어(Arnold H. Savage Landor; 영국의 화가, 탐험가)는 한국의 도시는 불결한 반면, 일본의 도시는 청결하다며 한국과 일본의 인상을 비교하였다. 새비지 랜도어 외에도 양국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은 청결하고 화려한 도쿄의 거리와 오물이 넘치는 서울의 불결한 모습을 서술하곤 했다. 그렇다면 도쿄의 거리는 어떻게 청결할 수 있었을까?

도쿄는 19세기 말에 접어들어 일본의 심장부가 되었다. 1869년에 메이지 천황은 도쿄를 중심지로 삼아 근대화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이 도시는 행정상의 수도이자 상징적인 수도가 되면서 일본에서 가장 근대적인 도시로 변모하였다. 이와 맞물려 도쿄의 오물처리 체계 역시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 때의 체계로부터 서서히 근대적으로 변화하였으나 생각보다 그 과정이 수월했던 것은 아니었다.

에도시대 도쿄의 전통적 오물처리체계

에도시대에 일본의 권력이 통일되면서 17세기 이후 일본의 재정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농업경영도 안정되어 에도(도쿄) 정(町)의 인구가 증가하였다. 인구 증가로 작물 수요가 많아지자 주변 농촌은 주요 농작물 외에도 채소를 재배하여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주민들의 분뇨가 비료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소제인 (출처: 平沢政広, 2002 「資源・素材再生の条件-し尿リサイクル文化史試論(1)し尿処理の歴史-西洋と日本」『金屬』72, 91쪽.)

에도 주민들의 분뇨를 비료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분뇨를 변소에서 퍼내고 운반해야 했다. 이때 변소에서 분뇨를 퍼내는 일을 하소제(下掃除, しもそうじ 시모소우지: 변소청소)라고 하며, 변소청소를 하고 운반하는 사람은 하소제인(下掃除人, しもそうじにん 시모소우지닝)이라고 불렀다. 하소제인들 중 상당수는 에도 주변 농민이었으며 정인(町人)들과 개별적으로 계약을 맺고 일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계약을 근거로 하여 돈이나 물품을 지불하고 청소 권리를 획득하였다.

이 시기 비료 시장 규모는 개인 간의 거래이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략적으로 추정해보면, 당시 에도 인구가 약 100만이라는 가정 아래 1년 동안의 비료 가치 총액은 약 금 20,000냥(兩)으로 추산된다. 마찬가지로 1년의 비료 총량은 약 375만 짐(荷)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는 비교적 큰 시장 규모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해당 수치를 기반으로 에도주민 1인당 1년간의 분뇨 배출량을 추정해보면 3.75짐(약 270리터)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쓰레기 처리체계의 경우를 살펴보면, 에도시대를 걸쳐 명치 초기까지의 쓰레기 처리는 섞여 있는 유가물(有價物)을 선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비료가 될 수 있는 쓰레기(肥料芥)가 상당히 가치 있었다. 도쿄에서는 각 호(戶)에서 배출한 쓰레기를 진개옥(塵芥屋, ごみや 고미야)에 모아서 선별하였다. 타는 쓰레기는 공중목욕탕에서 연료로 이용되고, 다양한 종류의 쓰레기는 특정 종류의 쓰레기만 회수하는 회수업자가 가져갔다. 그리고 비료로 쓸 수 있는 쓰레기(生ごみ)는 각 지방으로 운반되었다.

메이지시대(明治時代; 1868~1912) 오물 처리 규모의 성장

도쿄의 분뇨 처리방식은 메이지시대에 들어서도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는 도쿄가 근대 도시화로 변모하고 있었던 것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다만 도시화로 인해 규모는 점차 커졌다고 볼 수 있다. 메이지 40년(1907) 도쿄 분뇨 시장 규모는 1년에 64만엔(64만냥)을 넘었다. 이에 더해 분뇨 가격은 계속 상승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편 메이지 33년(1900)년에 시행된 ‘오물소제법시행규칙’에서는 오물 처리를 시의 책임으로 두면서 도시 위생환경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해당 규칙의 22조에서는 분뇨를 책임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분뇨가 경제적인 가치를 갖기 때문에 시에 책임을 부담하지 않고도 민간업자 선에서 처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메이지시대 도쿄의 쓰레기 처리체계를 살펴보면, 에도시대에 비해 민간 회수업자 규모가 상당히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지 17년(1884) 시기 도쿄 간다구(神田區)의 쓰레기 처리규모를 추정해 보면, 주민 104,838명이 한 달에 배출했던 쓰레기량은 200관(750키로그램)에 달한다. 이를 운반하는 비용은 연간 5844엔 16전(錢)이었으며, 매각대금은 5846엔 40전이었다. 수지는 비슷했지만 경우에 따라 약간의 이익이 발생했다.

한편 메이지 20년 (1887년) 아오모리현에는 회사조직 형태의 전문적인 청결회사가 탄생하여 계약을 통해 쓰레기와 하수 청소, 유가물 회수, 비료 판매를 하곤 했다.

근대적 오물 처리체계로의 이행– 분뇨 처리의 유료화와 쓰레기 소각법

에도-메이지시대에 원활하던 분뇨 처리는 다이쇼시대(大正時代; 1912~1926)에 접어들어 비료가치가 붕괴하여 정체하고 말았다. 가치가 하락했던 요인은 인구의 증가로 농지가 감소하였던 것이었다. 또한 위생관념의 발달로 인조비료 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그 원인이 되었다. 분뇨 비료로 재배한 농작물은 기생충 감염이 되기 쉬워 소화기 전염병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결국 비료 가치 하락으로 분뇨처리업자의 수익환경은 변화하고 분뇨처리업자의 수도 감소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분뇨처리업자들은 분뇨처리 유료화를 추진하였다. 다이쇼 7년(1917)에는 동경분뇨비료조합(東京糞屎肥料組合)이 결성되어 요금에 대한 총회가 열렸다. 지주들 역시도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유료화를 주장하였으며, 도쿄 당국도 분뇨 처리 유료화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도시화가 이루어질수록 분뇨 비료의 운송거리가 길어지고, 나날이 분뇨처리의 채산성(採算性)도 악화되어 갔다. 따라서 분뇨는 점차 유상으로 수거되었고, 처리 비용도 증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다이쇼시대 이후 분뇨 처리업은 유료화로도 지체 현상을 해결하지 못해 지방행정부가 개입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쓰레기 처리체계는 분뇨 처리체계보다 먼저 변화의 징조가 나타났다. 비교적 배출량이 일정한 분뇨에 비해 쓰레기의 양은 도시가 규모가 커지면서 증가하기 시작했다. 도시 자치체는 이를 처리하기 위해 많은 위생비를 써야 했다. 그들은 위생비용을 줄이기 위해 쓰레기를 처리하여 수입을 얻고자 하였다. 결국 오물소제법이 메이지 32년(1899년) 11월에 제국의회에 제출되면서 쓰레기 처리는 도시 자치체의 의무가 되었다. 그러나 도시 자치체의 의무가 되었다는 것이 곧 쓰레기 처리를 도시 자치체가 직접 운영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쓰레기 처리는 결국 민간업자에게 위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근본적인 변화는 위생관념의 발달에 따른 소각법의 도입으로 인해 나타났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쓰레기 처리방식으로 유용했던 유가물 회수는 이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도시 위생의 개선이라는 관점에서 인수한 쓰레기를 선별하는 사람의 위생악화라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계절에 따른 쓰레기 수집양의 변동으로 사업의 불안정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유가물 회수업자는 결국 시장가격의 변동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업을 축소하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도시 위생관념이 발달하면서 전염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대규모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는 소각법이 도입되어 시행되었다.

매립법과 소각법

전국적으로 소각법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가 쓰레기 소각법을 채택한 시기는 다른 지역보다 늦었다. 도쿄에서 최초로 쓰레기 소각장이 출현한 것은 다이쇼시대 말이었다. 다른 지역보다 소각법 도입이 늦었던 것은 도쿄가 주로 쓰레기 매립방식을 택하였기 때문이었다. 도쿄 만(灣)은 수심이 얕아 도시계획의 일환에서 매립이 자주 이루어졌다. 매립은 토사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 매립 방식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용되고 있는 동경의 전통적인 쓰레기 처리 방식이었다.

하지만 매립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도쿄에서는 비료로 쓸 쓰레기와 버리는 쓰레기를 배로 운반하여 전자는 다른 지방으로 운송하고 버리는 쓰레기는 매립할 장소로 운반하였다. 그런데 업자들이 버리는 쓰레기를 운송하는 도중에 불법으로 투기하는 일이 잇따랐다.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해 메이지 43년(1910년) 후카가와구(深川區)에서는 노천 소각을 개시하였다. 노천 소각이라는 것은 쓰레기를 지면에 쌓아두고 불을 지르는 것으로, 태우고 남는 재는 매립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도쿄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소각법이었다.

도쿄의 메이지 이후의 쓰레기 매립지 1~11 (溝入茂, 1988 『ごみの百年史 : 処理技術の移りかわり』, 學藝書林, 177쪽.)

그러나 소각법은 또 다른 사회적 문제를 불러왔다. 전국적으로 쓰레기 소각으로 발생되는 연기로 인한 사회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근교에 설치한 쓰레기 소각장에는 굴뚝을 높게 설치하였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이후 쓰레기 소각장은 인가로부터 떨어진 곳으로 건설하고자 했지만 대신 운송경비가 높아져 처리 비용이 상승하였다. 안정적인 쓰레기 처리사업을 위해 부지를 선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소각법의 간편함 때문에 도쿄에서는 메이지 43년(1910년)부터 쇼와 37년(1962)까지 50여년에 걸쳐 실시하였다.

소각법이 발생시키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는 매일매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다이쇼 5년 (1916) 중앙신문(中央新聞)에 따르면 도쿄 15구에서 배출된 쓰레기는 한 달 동안 약 56만관(2만1000톤)에 이르렀다. 이 도시는 이것을 마차 750대, 손수레 7만880대, 선박 1389척, 인부 2만 명으로 처리하였다.

도쿄가 청결하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메이지시기부터 다이쇼시대에 걸친 도쿄의 쓰레기 처리체계의 이면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다가 다이쇼 10년에 도쿄시 임시 오물처분조사회(汚物處分照査會)가 발족되면서 변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처럼 도시화 근대화가 진전되면서 이전사회에서 이루어졌던 분뇨와 쓰레기의 유가물로서의 순환은 서서히 단절되었다. 또한 오물 처리체계가 근대적 형태로 변화하면서 분뇨와 쓰레기 처리사업은 시가 직접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참고문헌>

김백영, 박삼현, 박진한 외 7명 저, 2011 『도시는 역사다』,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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溝入茂, 1988 『ごみの百年史 : 処理技術の移りかわり』, 學藝書林.

溝入茂, 2006 「明治前期の廃棄物規制と「汚物掃除法」の成立」, 早稲田大学大学院政治学研究科 박사학위논문.

平沢政広, 2002 「資源・素材再生の条件-し尿リサイクル文化史試論(1)し尿処理の歴史-西洋と日本」『金屬』72.

星野高德, 2007 「明治期東京における塵芥處理の市直營化」『三田商學硏究』 50

필자소개
가톨릭대 일반대학원 국사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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