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숙, 강금실로는 정치 새로 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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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4월 03일 12: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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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여성정치인은 김옥선이다. 내가 그분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인데, 어머니가 당신의 ‘여고’ 선배라고 우기시는(?) 그 분이 내 눈에는 분명히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김옥선의 ‘남장(男裝)’을 이해하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이다. 여학생이 아주 적었던 남녀공학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나는 새내기 여대생답게 예쁜 치마를 펄럭거리면서 학교에 다녔는데, 그렇게 치마를 펄럭거리고 다녀서야 남자아이들의 진정한 동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내 진정성 표현 위해 ‘남자 애들’처럼 살던 시절

    남자아이들과 함께 사회와 민족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소외와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동참하겠다는 나의 진정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남자 아이들처럼 밤늦도록 술을 마셔야하고, 필요하다면 외박도, 거친 말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을 나의 생존본능은 곧바로 터득했던 것이다.

    그들의 동료가 되기 위해 나는 곧바로 치마를 벗어 던지고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바지와 남방을 ‘의식적으로’ 골라 입고 머리도 아주 짧게 커트를 했다. 그게 어느 정도였나 하면, 친구와 함께 걸어가는 나를 본 어느 남자 선배가 “저 남자아이는 뒤태가 꼭 여자애 같네”라고 말을 했었을 정도로 나는 내가 ‘중성’으로 보이길 원했었다.

    근대 이후 남성이 지배하는 공적영역에 여성이 진출하기 시작했지만 여성들은 한참동안이나 자신의 공적생활의 문법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 몰라 헤맸었다. 많은 여성들이 공적영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김옥선처럼, 혹은 대학시절의 나처럼 자신의 여성성을 억압하는 것조차 불사해야했던, 정말로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가장 남성적인 공적 영역인 정치판에서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오히려 장점이 되어 총리가 되기도 하고, 보랏빛 스카프와 귀걸이로 상징되는 ‘리버럴’이 정치적 인기요인이 되기도 하는 현재의 정치지형은 내게 낯설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다.

    정치 위기를 비껴나가기 위해 ‘여성’ 정치인이 소비되고 있다

    ‘여성’ 정치인이 늘어나고, ‘여성’ 정치인이 대중적으로 더 많은 인기를 누린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건 마냥 좋기만 한 문제일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여성성’이나 ‘여성’ 정치가 ‘정치’의 위기를 비껴나가기 위한 전술로 소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온갖 협잡과 술수, 그 지긋지긋한 상투성에 진저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기존의 정치와 거리가 먼 ‘이미지’들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부드러움’, ‘포용’, ‘리버럴’ ‘쿨’ ‘솔직함’ 등이고 이런 이미지를 가진 ‘여성’정치(인)의 확장·확대를 통해 ‘정치’의 위기를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여성’ 정치의 확대는 ‘정치’를 위해서도 ‘여성’을 위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초점을 ‘여성’이 아니라 ‘정치’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늘 ‘정치’였다. 현실정치의 이러저러한 행태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정치’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이나 상상력이 문제였다.

    최연희 문제 하나 해결 못하는, 문제는 늘 ‘정치’였다

    최연희 문제 하나 해결 못하는 ‘정치’, 아니 언제든지 최연희 문제가 재발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는 기존의 정치행태를 그냥 두고 멀쩡한 술잔을 깨는 퍼포먼스나 하는 그 한심한 수준의 ‘정치’가 문제이다. 소위 진보정당의 대표가 동아일보 기자실에 장미꽃이나 보내는 그 빈곤한 여성주의적 상상력의 진보 ‘정치’가 문제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성’ 정치가 아니라 여성 ‘정치’ 혹은 ‘여성주의 정치’이다.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 정치’란 여성정치인이 늘어나는 것, 여성정치인이 상임위 의장도 되고, 대변인도 되고, 당대표도 되고, 총리도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성=부드러움의 이미지를 통해 정치를 연성화 하는 것은 더욱 더 아니다.

    그것은 정치를 다시 쓰는 것이다. 정치의 문법을 다시 만들고 정치의 개념을 여성주의적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여성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슈화하고, 여성과 다른 소수자들의 연대를 이루어내고,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투쟁들’ 속에 엄연히 잔존하는 남성중심성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를 나의 문제로 만드는 것, 즉 ‘정치’를 ‘정치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여기에서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성주의 정치’를 고민하자

    주목받는 ‘여성’ 정치인이 확대되고 ‘여성’ 정치가 확산되는 지금이야말로, 다시 한번 ‘여성주의 정치’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한명숙도, 강금실도 아닌 우리 각자가 ‘여성주의 정치’의 주체로 변모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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