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파 갈등과 민족혁명당으로의 길
    [여운형 70주기③]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반목
        2017년 08월 09일 11: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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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회의 글 [여운형 70주기②]상해와 동경에서

    여운형은 이동휘의 한인사회당그룹과 결별한 이후 이르쿠츠크파 상해지부에 참여했지만 임시정부를 바로 세우기 위한 고민을 놓지 않았다. 코민테른이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통해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우선적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하자 상해지부도 임시정부를 적대시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를 아래로부터 다시 건설하기 위한 국민대표자회의 소집을 주장하고 나섰다. 여운형의 주장은 신랄했다. 임시정부가 계통도 없고, 전략도 없으며, 국제기구에 독립을 호소하는 데 급급해왔다고 비판했다. 의정원에서 몇 가지 제도와 사람들을 교체하면 문제가 해결할 수 있다는 이른바 ‘개조론’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상해시절의 여운형(앞줄 가운데. 사진=보훈처 블로그)

    1921년 6월, 국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기 위한 준비기관으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조직하고 여운형은 임시의장을 맡았다. 기성회에는 임시정부의 안창호와 이르쿠츠크파의 여운형과 김규식, 이들의 대립에 비판적인 박은식그룹이 참여했다. 여운형의 ‘창조론’에 대해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기본형태를 유지하면서 각 그룹들이 문제가 되는 부분을 혁신하자는 ‘개조론’을 주장하면서 기성회의 논의는 공전됐다.

    이동녕과 의정원은 임시정부를 파괴하려는 술책이라며 기성회를 공격했고, 식민지 국가의 자주권을 논의하는 워싱턴회의에 전폭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여운형은 워싱턴회의를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기)모순을 조정하고, 약탈품(식민지)의 분배를 논의하는 회합”이라고 힐난했다. 임시정부의 공격으로 기성회가 좌초되자 여운형은 코민테른이 주도하는 극동민족대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극동민족대회를 향하는 두 여정

    여권 등을 발급하는 협화서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던 여운형은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할 사람들의 서류들을 정리하느라 김규식과 마지막으로 출발해 천진에 도착한 것은 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천진에서 기차에 올랐지만 밀정이 따라붙어 몇 정거장만에 내려 천진으로 돌아와야 했다. 며칠 후 다시 기차에 올랐지만 다시 그 밀정과 마주쳤다. 여운형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려는 계획을 취소하고 북경에서 몽골을 가로지르기로 결정했다. 밀정의 위협은 피할 수 있었지만 고통의 연속인 장정이었다.

    여운형은 장자구에서 출발해 외몽고의 사막으로 향했다. 이때 외몽고 지역은 볼셰비키 혁명에 저항하던 운게르 남작의 반혁명군이 기승을 부리다 막 적군에 의해 진압되었을 때였다. 그것은 거꾸로 무정부 상태라는 의미였고 사막에는 마적들의 땅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이불(침낭)과 권총이었다. 여운형은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에서 침낭으로 노숙하며 권총을 손에 쥔 채 잠을 청해야 했다.

    목숨을 건 여정 끝에 고륜(울란바토르)에 도착하자 코민테른 연락관이 여운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운형은 연락관이 제공하는 숙소에 묵지 않았다. 천진에 있는 무역회사의 고륜지점에 묵으며 중국인 행세를 했다. 사전에 준비된 치밀한 행보였다. 숙소에서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동안 연락관을 통해 어느 부부의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남자는 부리아트 출신으로 이제 막 탄생한 외몽고 정부의 간부였고, 아내는 이르쿠츠크파의 지도자 남만춘의 친척이었다.

    여운형의 회고에 따르면 여성은 만찬 후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동해와 백두산을 말하는 우리 노래와 잘 알려진 코사크노래(아마도 스텐카 라친)을 불렀다. 며칠 후 연락관은 여운형에게 외몽고인들이 추앙하는 조선인 의사의 무덤을 소개했다. 이태준의 무덤이었다.

    (이태준. 세브란스의학교 4회 졸업생. 재학 중 안창호를 만나 신민회 산하조직인 청년학우회에 참여했다. 졸업 후 김규식과 중국으로 망명했다. 몽골로 망명한 1회 졸업생이자 스승인 김필순을 만나려고 했지만 연락두절로 실패했다. 고륜(울란바토르)에 의원을 열고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중 탁월한 의술로 몽고 보그드 칸(Bogd Khan)의 어의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참여해 코민테른 자금의 운송을 돕는 등 몽고지역 포스트로 활동했다. 의열단에 참여해 폭탄제조기술을 배워 고륜으로 돌아온 직후, 운게른의 반혁명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1921년 6월 하순 코민테른 3차대회가 개최되었다. 조선을 대표해 연설한 사람은 이르쿠츠크파의 남만춘이었다. 3주간의 대회가 끝나고 집해위원회는 50여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2/3는 의결권을 가진 위원이었고 나머지는 심의권을 가진 위원이었다.

    심의권을 가진 집행위원에 조선인 한 명이 선출됐다. 남만춘이었다. 극동민족대회를 주도하는 것도, 코민테른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것도 이르쿠츠파였다. 함께 열린 2차 국제공청의 조선 대표자도 이르쿠츠크파의 조훈이었다. 조훈은 의결권을 가진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게다가 국제공청의 한국(조선)지부 즉,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을 설치하는 권한은 조훈에게 위임됐다. 이르쿠츠크파 상해지부의 계획은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국제혁명조직의 조선 대표자는 박헌영으로 이미 내정된 셈이었다.

    1921년 5월,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급조한 이동휘의 계획은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대립으로 이른바 자유시참변이 일어나면서 시베리아를 횡단하려는 계획은 신변문제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이 코민테른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다소 늦게 도착하더라도 혁명의 지도자 레닌과 단독면담을 통해 전세를 역전하기로 결정했다.

    상해에서 배를 타고 마르세이유로 간 다음 리옹을 거쳐 알자스 지역을 관통해 프랑크푸르트 옆 도시인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상해파 포스트에 머물다 베를린으로 이동해 독일공산당의 지원으로 모스크바로 들어가는 것이 이동휘의 계획이었다. 조선 최초의 코민테른 상근자 박진순을 대동하고 출발했지만 일제는 싱가포르 등 국외지역에서 두 차례에 걸쳐 체포를 시도했다. 국제선 여객선은 오늘로 치면 항공기나 마찬가지였고, 선장이 일제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르세이유에 내려주는 선장으로서도 부담이었다. 선장의 호의는 이집트까지였다. 혁명 여정을 떠난 이동휘의 일정은 풍물기행이 되어버렸다.

    동행한 독일 유학을 계획하고 있던 이극로(한글학자)의 후일 기록(고투 사십년)에 의하면, 이동휘 일행은 이집트를 가로질러, 피라미드를 구경하고(최초의 조선인은 아니었을까?), 시칠리아, 나폴리, 로마, 밀라노를 거쳐, 스위스 베른에 도착했다. 이동휘는 며칠 짬을 내 스위스의 국제도시인 제네바에도 며칠 다녀오는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동휘가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베를린에서 독일공산당의 도움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코민테른의 대회가 이미 끝나고 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극동민족대회와 베르흐네우딘스크 통합당대회

    여운형 일행은 손도끼로 잘라먹어야만 하는 흑빵과 영하 30도의 혹한을 뚫고 부리야트자치공화국의 우딘스크에 도착했다. 그제야 난방과 먹을거리가 준비되어 있는 시베리아횡단열차로 갈아탈 수 있었다. 여운형은 극동민족대회의 개최지인 이르쿠츠크에 도착해 미리 도착해있던 대표단들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원동부장 슈마스키를 면담하고 분과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선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보고서 작성에 몰두하던 대표단에게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뜻밖의 요청을 보내왔다. 스보보드니(자유시)참변으로 체포된 조선인들 재판에 대표단이 배심원을 선정해달고 요청한 것이다.

    재판장으로 내정된 인물은 홍범도였고, 체포된 인물들은 거의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배심원으로 참여한 여운형은 스보보드니에서 일어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을 비교적 상세하게 접할 수 있었다.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신임장에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 당원이라고 기록했지만 두 분파의 극단적인 대립이 독립운동을 위기로 빠트리고 있다고 한탄했다.

    대표들의 도착이 계속 지연되면서 대회 개최 일시를 넘겨버리자 레닌은 대회 장소를 모스크바로 변경하라는 지시를 동양비서부에 통보했다. 모스크바로 가는 10여 일 동안 대표단을 태운 특급열차에서는 저녁마다 회의가 개최됐다. 대회를 사전에 준비하기 위한 회의는 계속됐고 대표단의 단장에는 김규식을 선임했다. 여운형은 뛰어난 연설능력과 영어실력을 감안해 대표연설을 하기로 결정됐다. 1922년 1월 7일 아침, 모스크바에 도착한 일행을 맞이한 것은 수만 명이 넘는 노동자와 민중들의 함성이었다. 영하 30도의 날씨에 단상에 오른 여운형은 온몸이 땀에 젖도록 감사의 인사말을 전하며 포효했다.

    대회의 개막을 앞두고 여운형은 대극장에서 열린 한 행사에 초청됐다. 외몽고공화국이 소비에트 적군에게 보내는 군기를 전달하는 행사였다. 전달받는 책임자는 트로츠키였다. 간단한 의식이 끝나자 트로츠키는 시작부터 열변을 토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여운형은 이 사자후가 5분 혹은 10분 안에 끝날 줄 알았지만 연설은 무려 3시간이나 계속됐다. 훗날 여운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비운의 혁명가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극동민족대회 전후 레닌과 면담을 한 사람들은 네 부류였다. 대회를 주도하던 이르쿠츠크파 지도부, 상해파의 이동휘, 레닌이 직접 요청한 홍범도였다. 여운형도 조선대표단의 일원으로 레닌과 면담할 기회를 얻었다. 대회 장소가 모스크바로 변경되었을 때 여운형은 “혁명의 지도자 레닌을 만날 수 있을까?”하고 들떠 있었다. 신한청년당부터 임시정부의 파국까지 여운형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의문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격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레닌은 조선의 많은 보고서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하지만 주요 보고서로 판단할 때, 조선의 현 상태는 사회주의혁명(소비에트)로 나아가기 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1차적으로 쟁취하는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레닌은 제국주의에 맞서 통일전선을 조직하는 것이 조선혁명의 현 단계 임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극동민족대회의 주도권을 이르쿠츠크파가 완전히 장악하자 이동휘는 대회에 개입하기보다는 이르쿠츠크파가 분파적으로 활동하면서 통일당 건설을 저해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조선 최초의 코민테른 상근자 박진순은 고려공산당(상해파) 대표비서 명의로 레닌과의 면담을 요구하는 한편, 레닌과 면담을 통해 조선의 사회주의정당들이 적대적인 이견이 있음을 강조했다. 30분으로 예정되어 있는 레닌과 이동휘의 면담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비서가 예정된 시간이 되었다고 재차 확인해주었지만 레닌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면담을 계속했다.

    대회가 끝난 후 통일전선론을 전면화하던 코민테른은 조선의 제 그룹들이 적대적인 이견이 심각하다는 것에 주목했다. 코민테른은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가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에서 국내 대표자를 포함한 통합당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정했다. 이르쿠츠크파는 충격을 받았지만 대회를 주도한 탓에 뒤처리를 해야만 했다. 그 사이, 상해파는 상해에 급보를 보내 즉각 국내 대표자를 선임하라는 지침을 하달했다.

    1922년 가을에 열린 통합당대회는 파국으로 시작해 파국으로 끝났다. 대표권을 가진 다수파는 상해파였다. 국내에서 온 (상해파) 대표자들은 자신이 어느 지역을 대표하는지, 어느 조직을 대표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이동휘는 대회를 시작부터 다수결로 처리하며 통합대회의 정신을 무력화시켰다. 이르쿠츠크파는 대회를 이탈해 치타에서 독자적인 당대회를 열고 조선혁명을 대표하는 통일당임을 선언했다. 트로츠키가 양파 지도부를 설득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코민테른 의장인 지노비예프는 조선을 대표하는 혁명당이 없음을 선언하고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해산을 통보했다.

    여운형의 통일전선과 민족혁명당

    극동민족대회가 끝나자 여운형은 이르쿠츠파와 상해파 모두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통합당대회의 주도권을 놓고 모두가 모스크바를 떠나 움직이고 있을 때, 여운형은 곧장 상해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922년 봄, 상해로 돌아온 여운형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명패뿐인 국민대표회의에 힘을 실어주자고 주장하는 동시에 자신의 노선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통일전선론이었다.

    상해임시정부는 무기력했지만 통일정부라는 가장 큰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과 상해에서 각개약진하고 있는 조직들이 볼 때는 알량한 명패에 불과했지만, 국내에 남아있는 독립운동세력들에게는 강력한 대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국내에서 망명하는 새로운 인물들은 과거처럼 연해주로 넘어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대다수는 중국 즉, 상해였다. 물론 간도지역으로 망명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상해로 건너오는 망명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불어났다. 또 하나는 자금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승만이 미주지역의 독립자금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국내의 자금은 상해로 답지했다.

    1922년 여름, 여운형은 일단의 사람들과 조직을 형성하면서 대외적으로 ‘민족혁명당’의 건설을 주장했다. 여운형의 주장은 단순한 새로운 결사체가 아니었다. 당명에 노선이 담겨 있었다. 여운형이 생각할 때, 이전의 독립운동조직과 당들은 하나의 공통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과 유사한 단어를 사용할 때는 민족주의자들의 결사체인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공산당 혹은 사회(주의)당을 사용하는 그룹들은 분명한 노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배타적이거나 분파적이었다.

    여운형이 주장한 민족혁명당은 특정한 당명이 아니었다. 통일전선당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 전제 조건은 기존의 조직 혹은 당을 해체하고 하나로 모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여운형은 상해임시정부도 (해체해야 할) 하나의 조직은 혹은 세력에 해당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계속)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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