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청년당과 임시정부
[여운형 70주기②]상해와 동경에서
    2017년 07월 31일 12: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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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 70주기를 기억하며 ⓵- 세 개의 임시정부 링크

1916년 금릉대학 영문학과에서 학업을 마친 여운형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는 상해로 건너가 협화서국(協和書局)이라는 서점에 일자리를 얻었다. 기독교서적을 주로 취급하는 서점이었지만 여권 등 출입국 업무를 대행하는 곳이었다.

국내를 떠난 망명객들은 연해주보다 중국에 훨씬 더 많았다. 처음에는 간도지역에 주로 분포해 있었지만 일제가 중국의 혼란을 틈타 간도까지 군대를 진출하자 상해가 새로운 거점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상해에 망명객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청년들도 모여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주도적인 지도자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청년들을 자연스럽게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청년들의 좌장은 여운형이었다. 1918년 봄, 여운형은 이들 중에 신뢰하는 소수들을 모아 비밀스런 조직을 결성했다. 장덕수, 조동호, 한진교 등을 포함해 총 여섯 명으로 출범한 조직의 이름은 ‘신한청년당’이었다. 청년당이라는 독특한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여운형의 제안이었다. 영어에 뛰어났던 여운형은 국제도시인 상해에서 다양한 사람과 책들을 접하고 틈틈이 번역하는데 몰두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케말 파샤의 터키청년당이었다. 소집책에 해당하는 당수를 맡은 것은 여운형이었다.

몸양 여운형 기념관 모습(이하 사진은 기념관)

상해임시정부의 씨앗, 신한청년당의 탄생

그해 11월,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는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Charles Crane)이 상해를 방문하자 여운형은 단독면담을 갖는 데 성공했다. 이 자리에서 이듬해 파리에서 피압박민족의 자결권을 논의하는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이를 위해 조직을 확대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여운형을 대표로 파견하는 문제도 논의되었지만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에 따라 새로운 인물을 영입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대표로 파견할 인물로는 북경에 있는 김규식을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김규식의 영입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을 한 경력과 영어와 여러 나라 언어에 뛰어나다는 것이 우선적으로 고려됐다.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외교전을 하는 동시에 장덕수는 국내로 파견하고 이광수와 조소앙은 일본에 파견해 유학생을 조직하도록 하는 등 다방면으로 움직였다. 3.1운동보다 먼저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이 일어난 것은 신한청년당의 영향도 작용했던 것이다.

여운형 자신은 연해주로 건너가 사람들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이동녕과 일부 인물들이 신한청년당에 참여하면서 조직의 핵심인물로 급부상했다. 신민회에서 활동한 이력과 청년층에서는 다소 연배가 있는 이동녕은 단기간에 신한청년당의 좌장급 영입인물로 자리를 잡았다.

신한청년당은 새로운 인물들을 영입하는 동시에 조직을 전면 개편했다. 전위조직에 가깝던 당을 대중조직으로 개편하기 위해 잘 알려진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고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새로운 조직체제는 이사제였다. 여운형과 훗날 조선공산당 코민테른 전권대표를 맡은 조동호, 이광수와 김구가 이사로 선임됐다. 재정은 여운형과 사업체를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던 한진교가 책임을 지는 형식이었다. 부친이 장로교 최초의 7인 목사 중에 한명으로 유명하고 자신은 장로교 최초의 유아세례를 받은 종교계의 독립운동가인 서병호가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이사회 산하에는 재무부와 서무부, 출판부 등의 기구를 설치하고 책임자로 실무자들을 배치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사제는 의회, 기구들은 행정부나 마찬가지였다. 이사장은 명목상의 대통령에 해당하는 의원내각제 형태의 정부를 자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신한청년당이 내각제 성격의 맹아(萌芽)정부였다면 여운형은 총리가 아니었을까?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고 준 외교기관인 파리위원회의 설치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시영과 이동녕을 중심으로 연해주에서 북경으로 거점을 옮겨 활동하고 있던 인물들은 신한청년당에 참여하는 동시에 대거 상해로 넘어오기로 결정하자 상해에 당 공식사무소를 설치하는 것으로 논의가 확대됐다. 그때, 3·1운동의 소식이 상해에 전해지면서 논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급변했다. 4월 초, 사무소에 모인 상해와 북경그룹의 회동은 해외에 망명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모호한 지도부, 혼란의 연속, 상해임시정부

북경그룹의 임시정부 주장에 대해 여운형은 ‘시기상조론’과 당을 강화한 이후 체계적으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여운형의 주장으로 논의는 교착상태에 빠지는 듯했지만 경성에서 시작된 3·1운동의 불길이 꺼지기는커녕 전국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속속 전해지자 임시정부 주장은 순식간에 대세론으로 바뀌었다. 이시영과 이동녕은 신민회 간부 출신이라는 후광과 여운형 등 신한청년당의 청년 주도세력보다 위 세대인 장년층의 대표 인물들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상해임시정부는 내각제에 가까운 정부였다. 불과 몇 개월 전의 신한청년당의 조직방식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의도한 것이 분명한 정부 형태였다. 의정원과 내각 구성에 대한 논의를 거듭하던 중, 뜻밖의 인물들의 망명으로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국내에서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한 홍진 등 지도부가 상해로 넘어왔기 때문이었다. 한성임시정부는 조각 명단뿐 아니라 헌법에 해당하는 약법까지 제정했다고 설명하자, 상해·북경그룹은 두 개의 정부를 하나로 통합해야 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다행인 것은 조각에 이름이 오른 인물들이 상당수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1919년 4월 11일, 한성임시정부 지도부를 포함해 각 도를 대표하는 30명으로 국회에 해당하는 의정원을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의정원장은 이동녕으로 추대됐다. 정부에 해당하는 내각은 국무총리 이승만, 군무총장 이동휘, 내무총장 안창호,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교통총장 문창범, 외교총장 김규식을 선출했다. 이시영과 이동녕은 북경그룹, 최재형과 문창범은 대한국민의회, 이동휘는 한인사회당, 이승만과 안창호는 북미위원회를 대표하는 성격이었다. 여운형은 외무차장에 선출되었고 상해운동을 이끌던 신한청년당의 핵심인물들도 주로 실무를 총괄하는 차장을 맡았다. 김규식이 외무총장으로 선임된 것은 파리강화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정부를 대표하는 직책이 필요하다는 요청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체류 중이었고, 4월 13일부터 필라델피아에서 3일간 열린 제1차 한인대회에 참석 중에 소식을 들은 안창호가 상해로 들어온 것은 5월 말이었다. 대한국민의회와 한인사회당은 각 조직의 총회를 열어 해산 등의 절차를 마무리한 후 빨라야 여름이나 돼서 상해로 거점을 옮길 예정이었다. 실무는 신한청년당이 장악했지만 의정원과 정부의 주도권은 신민회 출신의 북경그룹의 영향력이 막강하게 작용했다. 상해임시정부가 연착륙하기 위해서는 화학적 결합과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한인사회당의 이동휘와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이 상해로 향하던 그때, 신뢰는 시작부터 커다랗게 균열이 일어났다.

세 개의 임시정부의 합의로 출발한 상해임시정부 체계를 의정원을 장악하고 있던 이동녕이 아무런 통보 없이 변경하는 안건을 처리하는 일이 발생했다. 임시라는 단서조항을 달기는 했지만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변경하는 직제개편을 의결한 것이다. 상해에 도착한 이동휘는 격분해 취임을 거부했고, 문창범은 대한국민의회를 재건한다고 선언하며 연해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사이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에 구미위원회를 설치하자 정부는 상해에, 대통령 집무실은 워싱턴에 있는 기묘한 정부가 탄생했다.

여운형과 상해 공산주의그룹

대한국민의회의 철수 후 안창호의 계속된 설득으로 이동휘가 국무총리직을 수락하면서 상해임시정부는 정식으로 출범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해 겨울, 여운형은 외무차장과 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장덕수와 함께 동경으로 향했다. 여운형의 사임은 이미 예고된 행보였다. 재출범하던 임시정부는 헌법 일부를 보완했다. 그런데 4월 출범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던 “대한제국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이 다시 삽입되자, 신한청년당과 청년그룹은 격렬히 반대했다. 특히 여운형은 조항이 통과될 경우 “임시정부의 어떤 직책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배수진을 쳤지만 의정원에서 다수를 획득하는데 실패했다.

여운형의 동경 행은 하라 내각의 정식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하라 총리는 임시정부의 청년층을 대표하는 여운형을 초청해 회유를 통해 분열을 시도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를 우려한 이동휘는 국무총리 포고령 1호를 발표하고 여운형의 동경 행은 개인행동이며 임시정부는 반대한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안창호는 여운형을 신뢰한다며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안창호의 신뢰는 적중했다. 여운형은 제국호텔에서 열린 연설에서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타이타닉도 작은 빙산에 의해 침몰했다”며 일제의 침략을 경고하자 참석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운형의 연설이 신문에 대서특필되자 열도는 쏟아지는 비난 속에 하라 내각은 붕괴했다.

제국호텔에서의 여운형 연설을 재현한 모습

예상치 못한 여운형의 쾌거를 접한 이동휘는 포고령 2호를 발표하고 그의 활동을 극찬했다. 여운형이 상해로 돌아오자 이동휘는 외무총장 보좌역을 신설해 소비에트와 접촉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했다. 이승만이 상해로 부임하지 않아 형식상으로는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대표하고 있었지만 의정원에서는 여전히 소수파였고, 러시아와의 협력을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해 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전권대표인 보이틴스키가 보과관 겸 통역으로 김만겸을 대동하고 상해에 들어왔다. 연해주에서 이동휘의 활동을 익히 알고 있던 김만겸은 보이틴스키와 이동휘의 회동을 주선했다. 이 자리에서 보이틴스키는 이동휘에게 지원을 재차 약속하며 상해에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전위조직을 건설할 것을 조언했다. 김만겸은 또 한 사람, 여운형에게도 참가할 것을 제안했다.

1920년 봄 상해에 비밀리에 등장한 한인공산당-한국공산당이라는 주장도 있다-은 이동휘의 한인사회당그룹과 여운형, 조동호, 김만겸 등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탄생했다. 형식적이었지만 당 중앙(위원)을 구성하고 임시정부 내에 전위정당을 자임했다. 하지만 한인공산당은 코민테른 자금 문제로 불과 몇 개월 만에 좌초했다. 코민테른의 자금은 한인사회당에 제공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이동휘는 한인공산당 중앙에서 공유하기는커녕 논의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김만겸이 중재에 나섰지만 이동휘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 상해지부의 탄생

김만겸의 보고를 접한 보이틴스키는 극단적인 선택을 결정했다. 이르쿠츠크파의 강력한 옹호자인 보이틴스키는 여운형, 조동호, 김만겸, 안병춘 등을 중심으로 이르쿠츠크파의 상해지부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 형식은 제안이었지만 이들이 선택할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코민테른과 소비에트의 지원이라는 커다란 배경도 단안을 내리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상해지부는 사회주의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회주의 연구와 강좌를 개최하면서 청년들을 끌어 모았다. 자금줄을 확보한 연구소는 여운형과 3명의 상근자를 두고 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3명의 젊은 상근자는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이었다. 여운형은 연구소에서 「공산당 선언」, 박헌영은 부하린의 「공산주의 ABC」를 번역해 상해와 북경에 배포했다.

조직을 확대하던 상해지부의 다음 단계는 보이틴스키의 지원을 배경으로 국제공청의 산하지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 지부를 건설하는 것은 모든 사회주의 조직이 참여하는 통일당이 존재해야 하지만 국제공청의 지부를 설립하고 승인을 받는 것은 느슨했던 허점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소규모의 청년조직들을 조금씩 규합한 후 고려공산청년회 상해지회를 건설하고 1921년 봄, 박헌영이 비서로 선임됐다. 북경과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방식의 시도가 계속되었고 그해 여름, 북경에서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이 결성되었다. 중앙총국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된 박헌영은 얼마 후 책임비서로 선출됐다. 모두가 코민테른에만 신경을 집중하는 사이 상급당이 없는 공청이 국제공청의 지부로 승인받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극동민족대회에서의 여운형(왼쪽에서 두번째)

상해지부가 고려공산청년회의 설립에 몰두하고 있을 때, 코민테른은 동양비서부가 위치한 이르쿠츠크에서 ‘극동민족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1921년 5월, 대회 참가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이동휘는 옛 한인사회당의 간부들을 중심으로 상해에서 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고려공산당(상해파)를 결성했다. 같은 달 이르쿠츠크에서도 대표자대회가 열려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가 결성됐다. 보이틴스키의 지원으로 극동민족대회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르쿠츠크파는 상해지부에 연해주와 중국, 그리고 국내에서 대표를 선발하라고 통보했다.

파리에서 돌아온 김규식은 민족주의자들의 분파로 전락한 임시정부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극동민족대회에 참여를 결정했다. 여운형은 위임장의 직업란에 ‘혁명사업’, 할 줄 아는 외국어로는 ‘영어와 중국어’, 소속단체로는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라고 작성했다. 1921년 가을, 김규식, 여운형, 조동호, 김단야, 임원근 등은 북경에 도착해 마차로 갈아타고 몽골의 초원과 사막을 질주하며 이르쿠츠크로 향했다. (계속)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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