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공산당 초대 비서 김재봉 생가
    [목수의 옛집 나들이] 안동 풍산읍 오미마을 학암고택
        2012년 08월 22일 02: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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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사회주의계열에서 활동하는 바람에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강제로 잊혀진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 조선공산당 초대 비서 김재봉이다.

    김재봉의 생가는 경북 안동시 풍천읍 오미마을에 있는 학암고택인데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179호)이다.

    오미마을

    오미(五美)라는 동네 이름의 유래는 마을 입구에 있는 표지석 뒷면에 자세히 나와 있다. 원래 이 마을은 다섯 봉우리가 마을을 말발굽처럼 둥글게 감싸고 있어 오릉촌(五陵村)이었다.

    유연당 김대현의 아들이 여덟인데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다섯 아들이 문과에 급제했는다. 인조 임금이 이를 알고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칭찬하면서 오미라는 이름을 내렸다 한다.

    근대에 이 마을에서 많은 인재가 나왔다.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김만수, 단식 순절한 김순흠, 임시정부와 만주에서 활약한 김응섭, 조산공산당 초대 비서 김재봉, 의열투쟁의 표상 김지섭 등이 있다.

    화수당 – 오릉학습강술소…. 그리고 경로당

    마을을 들어서면 오래된 기와집이 십여 채 보인다. 동네 가운데로 난 길을 가다 보면 오른쪽에 담장도 없는 기와집 한 채가 외로이 있다.오미1리 경로당이란 현판이 있는데 경로당 치고는 참 고풍스런 건물이다.

    호기심에 자세히 알아보니 건물의 당호는 화수당(花樹堂)인데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얼마 전 7월 중순에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목판” 전시회를 다녀 온 적이 있는데 그 때 본 추사의 현판이 이 건물의 것일 줄이야…

    다행이 그때 찍어놓은 사진이 있어 여기에 싣는다.

    화수당 현판 김정희의 글씨. 호는 완옹(阮翁). 이 현판은 도난 방지와 보존을 위해 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2012년 상반기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목판”전에 전시되었다

     

    화수당(花樹堂) "화수"는 꽃과 나무가 가지를 치며 무성하듯 자식이 많고 문중의 번성함을 의미한다. 원래는 풍산김씨 동족들의 모임 장소였으나 일제 강점기때는 오릉학습강술소로, 지금은 오미1리 경로당으로 사용된다

    화수당은 풍산 김씨 동족들의 회합 장소였다. 화수당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서당으로, 일제 강점기엔 오릉학습강술소로, 지금은 마을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김재봉, 김병택, 김이섭, 김희섭, 김주섭, 문중직 등이 새로운 시대의 지성을 길러내기 위해 오릉강습소를 열었는데 초기에는 죽암서실에 교사를 마련하였다가 도림강당으로 옮기기고, 다시 화수당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일제는 ‘사립학교규칙’을 내세워 민족교육기관인 오릉학술강습회를 폐지시켰다. 오릉학술강습회는 1926년 풍북사립보통학교로 이어진다.

    경로당 바로 위에 위엄 있는 기와집 두 채가 있는데 오른쪽이 김재봉 선생이 태어난 학암고택이고, 왼쪽이 김정섭, 김이섭, 김응섭이 태어난 영감댁이다.

    영감댁 사랑채 누마루에 동네 할아버지들은 모여 계신다. 그 곳이 여름철 할아버지들의 경로당이더라. 동네 어르신들께 인사를 하고 영감댁을 잠시 둘러본다.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 – 김재봉

    영감댁을 뒤로 하고 바로 옆의 학암고택으로 발길을 돌린다. 대문 앞에 너른 공터가 있는데 오른쪽에 김재봉 어록비가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항일애국지사 근전 김재봉 선생 어록비’에는 “朝鮮獨立을 目的하고”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김재봉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며 쓴 조사표에 나오는 것이다.

    원문을 보면 ‘목적과 희망’이라는 항목에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한반도 남쪽에서는 차마 전체를 옮겨 쓰지는 못한 것이다.

    김재봉 선생 어록비 -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고 썼는데 차마 뒤편의 글씨는 새기지 못했더라.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그렘린궁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김재봉 뿐만 아니라 김규식, 여운형, 라용균 등 한국대표가 56명이나 참가했다. 이 때의 기록이 있는데 여운형이 1935년에 월간잡지 “중앙”에 쓴 “모스코바 여행기”가 그것이다.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한 고난의 여정을 혼자서 모스크바를 다녀온 것으로 바꾸어 여행기를 남긴 여운형의 배포가 놀랍기도 하다.

    학암고택

    학암고택은 1800년경 김재봉의 현조인 김중휴가 분가할 때 지은 집이다. ‘ㅁ’자형 집으로, 중문을 기준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나뉘어 있다. 약간 경사진 터에 토담을 두르고 다섯 칸 행랑채에 솟을대문이 있다.

    학암고택 전경

    대문칸을 들어서면 안사랑채가 정면으로 보인다. 이동 통로는 안사랑을 향해 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한번 꺾여서 중문칸으로 향한다.

    너른 터에 나지막한 석축이 한 단 있다. 건물과 잔디를 비롯한 정원이 너무나 잘 가꾸어져 있다. 후손들이 정성을 다해 고택을 가꾸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사람들의 손길이 닿을 때 고택이 살아있는 문화재가 된다.

    원래는 중문 밖에 사랑채, 행랑채, 초당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터만 있다.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었고, 오른쪽에 곳간이, 왼쪽에 방앗간채가 있다. 마당 동쪽에는 바깥사랑채가 서향으로 있고 아래에 근래에 신축한 화장실이 한 채 있다.

    대문채

    행랑채를 겸하고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본채까지 넓은 마당이 있다. 대문간의 좌우에는 행랑방이 있는데 대문간 방향으로 작은문이 있다. 행랑방에 있는 사람이 집에 누가 출입하는지를 쉽게 볼 수 있게 한 구조이다.

    학암고택 대문채, 앞 너른 터에 김재봉 생가 기념비가 있다

    대문칸에서 보면 안사랑채가 정면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동선은 안사랑을 향해 직선으로 나지 않고 마당 중간 석축 앞에서 꺾여 중문으로 이어진다. 실생활에서는 중문을 통해 안채로 가야하고 또한 오른편에 치우쳐 있는 바깥사랑채도 고려해야만 하기에 만들어진 동선으로 생각된다.

    본채

    본채는 ‘ㅁ’자 형태로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시선을 완전하게 차단하여 내외법을 지켰다.

    중문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세 칸 대청이 널찍하게 있다. 19세기 초반에 지은 이 지역 안채는 기둥이 매우 높은 편인데 학암고택은 그렇지 않고 단정하다.

    안채 대청마루. 뒤로 난 판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가운데칸의 문지방이 양 옆보다 낮아 뒤안으로 출입이 용이하게 했다

    안채가 앉아 있는 대지도 거의 평편하기에 기단도 낮다. 대청마루 뒤편 세 칸에는 각각 두 짝 판문을 내었는데 가운데의 것은 문턱을 낮추어 뒤안 출입이 용이하게 하였다. 판문을 모두 열어 놓으니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온다.

    안채 오른쪽에는 곳간이 있는 광채가, 왼쪽에는 방앗간채가 있다. 일하는 사람들의 동선을 생각하면 곳간과 부엌, 방앗간채는 인접해야만 한다. 하지만 집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일하는 사람들의 편리성보다 중요했을 시기의 건축물이기에 안채의 좌우에 나뉘어 있다.

    4칸 ‘ㅡ’자형 광채는 판벽에 널문을 달았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방앗간채 바닥은 흙바닥 그대로다. 고택의 모든 건물이 기와로 지붕을 덮었는데 방앗간채만은 초가로 지붕을 이었다.

    안사랑채

    안사랑채는 ‘ㅁ’자형 안채의 왼쪽 끝에 있다. 안사랑채는 몸채와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별도의 독립 건물이다. 몸채와 따로 만든 이유는 지붕을 더 높게 하여 위엄을 주기 위함으로 보여진다. 사랑채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지붕이 다른 건물보다 더 높다. 본채와 붙어있기는 하나 구조적으로 별개의 건물이다

    안사랑채

    안사랑채는 중문간 좌측의 툇마루 뒤에 사랑방을 배치하고 좌측으로 1칸을 돌출시켜 사랑마루를 꾸몄다. 마루에는 지금은 벽이나 머름이 없지만 기둥의 홈을 보아서는 측면에는 머름과 판벽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깥사랑채

    안채를 나와 바깥사랑채로 발길은 돌린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누구나 한번 쯤 꿈꾸는 단아하고 기품있는 집이다. 좌측 마루에는 학암정이란 편액이 있고 아래로는 근전 김재봉을 기리는 펼침막이 걸려있다. 이곳 바깥사랑채가 김재봉이 주로 머물렀던 곳이다.

    바깥사랑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니 바로 망와다. 망와란 용마루나 내림마루 추녀마루 끝에 올려놓은 장식기와를 말한다.

    학암정. 바깥사랑채 마루에 학암정이란 현판과 김재봉을 소개하는 펼침막이 있다.

     

    바깥사랑채의 망와. 특이하게 벼이삭이 양각되어 있다. 양반가문이지만 기반산업인 농업을 중시한다는 뜻을 알 수 있다.

    망와는 보통 사악한 기운을 쫓기 위한 귀면형, 집의 내력을 알려주는 기록형, 복을 기원하는 길상형, 아름다운 문양을 넣은 장식형 등이 있는데 학암정의 특이하게도 벼이삭을 양각해 놓았다.

    조선시대 양반은 기반산업인 농업을 말로만 중시하고 실제로는 하찮게 여겼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먹거리의 가장 기본인 벼농사를 상징하는 벼이삭을 망와에 넣은 것을 보아 김재봉의 가풍을 짐작 할 수 있다.

    오미마을 독립공원에서

    김재봉 선생의 집을 나와 동네 서쪽 언덕에 있는 오미마을 독립공원으로 향한다. 일왕의 거처에 폭탄을 던졌던 김지섭 선생을 비롯한 오미마을 독립운동가의 약력과 활동이 소개되어 있다.

    오미마을 독립공원 전경. 오미마을이 배출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소개되어 있다

    경북 안동에는 옛집이 많다. 또한 안동은 독립운동가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그분들은 근대기 이전 문화유산이 많은 안동에 또 다른 자취를 남겼다. 문화유산의 가치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켜가 쌓이며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 세대는 어떤 흔적을 더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본다.

    김재봉 선생의 간략한 연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주서(周瑞), 호는 근전(槿田)이다.

    – 1891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 1908년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 1909년 경성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염직과를 3년간 수학

    – 1917년 풍산 오미동에 오릉강습소를 개설하여 계몽운동을 전개

    – 1919년 9월경 『만주일보』 경성지사 기자가 되었다가 1920년 말 퇴직.

    – 1920년경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북교통부장으로 임명

    – 국내로 파견된 안상길(安相吉)로부터 받은 『독립신문』을 비롯한 문서들을 대구 지역에 보급시키려다 체포, 징역 6월형

    – 1921년 9월에 출옥, 만주로 망명

    –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조선노동대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 동년 11월에는 베르흐네우친스크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 참석, 대회 결렬 이후 치타에서 소집된 고려공산당(이르크츠크파) 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

    –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 꼬르뷰로(고려공산당 중앙총국)에 참가. 5월에는 꼬르뷰로 국내 파견원으로 선임되어 신사상연구회 조직에 참여하고, 코민테른의 지도하에 꼬르뷰로 국내부를 설치한 후 책임비서가 됨.

    – 1925년 4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창립대회 개최를 주도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동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1931년 11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으며, 1944년 3월 3일 운명.

    필자소개
    진정추와 민주노동당 활동을 했고, 지금은 사찰과 옛집, 문화재 보수 복원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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