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산에 오르는 방법
[철도이야기] 칙칙헉헉-2 인클라인
By 유균
    2017년 06월 06일 10: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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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기차가 산에 오르는 방법-1 링크

우리나라에서는 1939-1963년 5월까지 통리-심포리 간 사용했었습니다. 거리는 1.1㎞, 구배가 265/1000, 운행시간은 15분 정도, 권양기는 450, 750마력의 전동기 2대를 사용하여 30톤짜리 화차를 1량씩 운행하였습니다.

때문에, 여객들은 열차에서 내려 30-60분 정도 비탈길을 걸어 다른 열차로 갈아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올라오는 여객을 확인하고 열차를 출발시켰습니다. 짐이 있는 손님들은 이를 운반해 주는 지게꾼이 등장했고, 식당도 성업을 이루었습니다. 여객열차는 왕복 4회 아침, 저녁으로 운행하였으며 승무원은 열차를 갈아타지 않고, 철암-통리, 심포리-동해 간 각각의 열차를 운행하였습니다.

인클라인 모습

여객들이 환승하기 위하여 비탈길을 걷는 모습. 통리역 액자에 있는 사진을 다시 찍음.

6.25 전쟁 때는 북한군이 인클라인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미군 비행기가 폭파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산이 높아 낮은 비행을 못 하고 위에서만 폭탄을 투하하여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 원형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랬던 인클라인은 1961년부터 시작한 2년간의 공사로 선로를 8.5㎞를 연장하고 11개의 굴을 뚫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30/1000의 구배로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동서를 처음으로 연결시킨 인클라인 철길은 막을 내립니다.

인클라인과 스위치백이 위치한 지도

인터넷에서 인클라인에 대한 자료를 찾던 중 ‘1935년 삼척개발회사에 의하여 광업개발을 목적으로’(중략) 라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탄전 개발, 탄광 개발, 무연탄 개발 등 단어만 달랐지 모두 개발이 목적이라는 내용으로 적었습니다. 마치 일본 교과서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사용한 포장지를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옮기는 것은 좀 문제가 있네요. ‘무연탄을 일본으로 공출할 목적으로’ 이렇게 적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인클라인을 설명하면서 ‘비효율적’이다.’ 라고 평가한 글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기술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좀 무리인 듯합니다. 오히려 그 당시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동서로 끊어진 철길을 잇는데 커다란 발전’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합니다.

좌우지간 삼척개발회사는 질 좋은 무연탄을 캐내는 것이 임무였고, 운송은 자매회사인 삼척철도의 몫이었습니다. 삼척철도는 철암선(철암-묵호)과 삼척선(동해-삼척)을 부설하며 본격적인 무연탄 착취가 시작되었고, 이때 태어난 것이 인클라인입니다.

인클라인이 설치되기 전, 일 년 정도는 ‘소리개차(솔개차)’라고 지금의 리프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1톤짜리 철바가지를 100-150m 간격으로 통리-나한정까지 운반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연탄은 삽과 질통을 이용하여 화차에 옮겨 실었습니다.

그 당시는 인클라인, 마끼선, 강삭선 등을 혼용해서 사용했고, 30톤짜리 홉파카(타시)와 무개차(무오)를 사용하였는데 주로 홉파카를 사용하였습니다. 운송량은 왕복 8개 열차로 ‘미카’라는 증기기관차는  10량을 ‘푸러’라는 증기기관차는 5량을 견인하였는데 영차는 심포리로 내리고 공차는 통리로 올려 하루 40량 정도가 묵호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심포리역 직원은 20명 정도로 운수직원이고 마끼장은 7명 정도로 차량 직원인 듯합니다.

화차 앞에는 권양차라고 화차를 제어하는 일종의 차장차 같은 것이 있었고, 그것을 마끼운전실이라 불렀습니다. 마끼운전수는 맥주병 뚜껑 굵기의 와이어를 화차와 연결했습니다. 연결기(가뿌라)에 ‘ㄷ‘자 형의 특수 연결기를 덧대고 핀으로 고정시킨 다음 와이어를 팽팽하게 감고 준비가 끝나면 벨을 누릅니다. 그러면 마끼장에서 캔맥주 굵기의 와이어를 권양기로 당깁니다. 마끼운전수는 화차를 타고 같이 올라가서 화차를 분리합니다.

차량에 문제가 생기거나 가끔 사람이 화차에 매달리면 쇠꼽쟁이로 옆에 있는 전기선을 합선시켜 정지시켰습니다. 이때 와이어가 갑자기 팽팽해지면서 그 힘이 마끼운전수를 쳐 사고가 나기도 했고 또 줄이 끊어지기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그 사고는 심포리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유창광업소에서 무연탄의 수송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역과 로비하여 공차로 올라가는 화차에 탄을 실은 것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끊어졌고, 그 때문에 정전사태가 벌어졌다는 에피소드도 있었습니다.

또 여객의 짐을 운반하기 위해서 짐꾼(지게꾼)이 생겼는데 그 당시는 일거리가 없고, 어느 집이나 지게는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게꾼 자청했었습니다. 그래서 여객보다 지게꾼의 숫자가 더 많은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었습니다. 때문에, 역에서는 지게꾼의 숫자를 30-40명으로 제한하고 완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허가를 받은 지게꾼만 영업할 수 있었고 그 대가로 역의 잡일을 하기도 했고, 또 지게꾼 반장을 통해서 수입의 약간을 역에 상납하기도 했습니다. 무허가 지게꾼이 짐을 날라주다 발각되면 지게를 부러뜨리기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새끼나 사갈(아이젠)을 빌려주었는데 사갈의 대여료가 짐을 운반해 주는 가격과 같았으며 지게꾼은 짐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갈을 되돌려 받기 위하여 따라갔습니다. 짐삯은 200환 정도인데 그 돈이면 보리쌀로 가족 하루분의 양식을 샀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짐은 동해 부근에서 나오는 해산물로 철암에다 팔았습니다.

통리역 주변에는 인클라인을 설치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부역을 하게 된 사람들로 서서히 많아지기 시작했으며 인클라인 완성 후에는 돌아가기도 했고, 남은 사람들은 광산으로 갔습니다. 그러다 다시 철길 개량이 완성될 1962년 즈음 최고의 수치로 1500여 호 정도였고 심포국민학교 학생 수는 350명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철길이 서울로 이어지고, 인클라인 폐쇄로 많은 사람들이 광산으로 흡수되며 대거 빠져나간 결과 심포초등학교는 폐교되었고, 현재는 70여 호정도의 오지(奧地) 촌동네가 되었습니다.

당시 교통은 영암선(영주-철암)이 개통되기 전에는 철암에서 길이 끊겼다고 해도 그리 틀린 표현은 아닌 듯합니다. 정부에서 후생사업으로 지원한 교통편이 5톤짜리 제무시, 쓰리코다(5인승), 카바이트 차 정도였습니다. 또 장성지구는 도로가 없어 탄광의 출구를 모두 철암역으로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철암은 탄광보다 저탄장이 발달한 것입니다.

또한 흥전-나한정의 스위치백 구간은 그 당시에도 사용을 했습니다. 선로가 연장, 개량되면서 위치가 조금 변했지만 적어도 20여 년 같이 공존했었습니다. 심포리역의 위치는 도계 방향으로 100m 정도 들어갔고, 20m 정도 아래로 조금 내려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흥전에서 3터널을 지나 심포리로 연결된 선로는 폐쇄되어 걷었고 약간 밑으로 피난선을 깔았습니다. 그래도 폐쇄된 3터널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현재 인클라인의 흔적은 거의 지워졌지만, 통리역에 있었던 저탄장에서 안심포리 마을회관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쓰레기장

인클라인을 철도사(鐵道史)로 보면 대단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런데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물은 고사하고 그 당시 철도에 관한 기록물조차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남은 흔적인 ‘마끼다리’마저도 쓰레기장을 방불케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동영상 설명 : 위의 동영상은 국가기록영상관에서 구매하였고 사용 허락을 받은 자료입니다. 미국인이 촬영하여 영어로 나오는데 한글을 입힐 실력은 없으니 그러려니 하고 보세요.

필자소개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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