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한다, 고로 무지하다'
    [서평]『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저/ 한길사)
        2012년 08월 18일 03: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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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저지른 악한 행동에 대해서 ‘그 사람이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전 한창 이슈가 되었던 사이코패스 사건을 봐도 그렇다. 사람들은 ‘강호순’이라는 특별한 사람이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론의 대부분은 강호순이 얼마나, 어떻게 특별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만 중점을 맞춘다.

    하지만 이 책은 놀랍게도 악이 ‘평범하게’ 저질러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이히만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계획을 짰으며, 결과적으로는 ‘열심히’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데에 기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열심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가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목적으로 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일을 ‘열심히’하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는 뜻이다.

    그가 이처럼 평범하게 악행을 저지른 이유로 아렌트는 첫째, 그가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 둘째, 그가 ‘관용어(cliche)’를 사용함으로써 자기기만을 했다는 것을 원인으로 들었다. 첫번째의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은 그가 정신이상자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그가 정신이상자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남들처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지도 못했고, 그의 정신구조를 지배하던 독일제국에서 벗어난 뒤에, 즉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 도중에 그가 한 잘못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것을 단순한 하나의 언어 규칙으로 취급했다.

    이는 우리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자신이 한 잘못을 ‘하나의 언어규칙’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는 아렌트가 지적한 두 번째 이유와도 관련이 있으며, 첫 번째 이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Cliche는 ‘진부한 어구’등으로 해석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cliche는 본질을 호도하여 그 본래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끔 하는 고도의 언어적 장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 멸절 계획을 ‘최종 해결책’(더 이상 유대인을 이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죽여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언어의 사용은 아이히만뿐만 아니라 같은 독일 군대의 지휘관 계층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유대인을 죽이는 것에 대한(혹은 그를 도운) 죄책감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시온주의자였던 아이히만은 cliche의 사용으로 자신이 그들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그들을 도왔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언어가 그 사용자들의 생각을 좌우하는 상황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은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은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범죄적 행위를 숨기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부적절한(예를 들어 성행위에 관한 언급) 일을 언급하려고 할 때에도 사용된다.

    그런데 은어가 사용되는 이유들을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은어가 대체하는 일반어들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일들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담배를 야리라고 부른다거나, 성행위를 빠구리라고 부른다거나 하는 등의 은어가 그렇다.

    일반어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은어로 부르는 이유는 그것을 쓰는 편이 보다 ‘쉽게’ 그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아이들은 담배를 ‘이미지’라고 불렀다. 학교에서 담배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면 그들은 선생님에게 걸려 그에 합당한 사회적 제재를 받았겠지만 ‘이미지’라는 표현이 있었기에 그들은 쉽게 원하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고(심지어 교사의 앞에서라도) 주변 사람들도 그에 쉽게 참여할 수 있었다.

    cliche의 활용은 앞서의 아이히만처럼 학생들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부담감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쉽고 열심히’ 또래 집단으로부터 부과되는 일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즉 언어의 조작을 통해 그들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난 개념화를 해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언어의 조작은 재판의 외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물론 cliche의 개념과는 다르기는 하다.) 검사와 법무장관은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유대인으로서 당한 피해를 유대인의 입장에서 처벌하는’ 재판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당한 피해를 세계적인 입장에서 처벌하는’ 재판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다양한 어휘를 동원하고 있다.

    ‘우리가 어떠한 인종차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p.53)이 이와 같은 어휘인데, 이는 피해받은 유대인으로서 가해자인 독일인을 심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로서 가해자를 심판하겠다는 의지를 ‘명목상으로는’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재판이 실제로 새로 건설된 유대인의 국가에서, 즉 대내외적인 합심점이 필요한 나라에서 유대인 재판관과 검사의 손에 의해, 그리고 유대인 총리의 계획아래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 재판이 가지는 의미를 잘 보여준다. 결국 그들은 언어 조작을 통해서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변환하려고 한 것이다.

    이같은 사례에서, 언어가 사회에 가지는 힘은 막대하다는 것을 나는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언어의 사용은 독일군이 ‘열심히’ 유대인을 죽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책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지만, 그 개념을 발동하게 하는 중요한 기제로서의 언어의 사용도 분명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이다. 데카르트의 말을 빌려서, 나는 이렇게 글을 끝맺어보고 싶다.

    ‘말한다, 고로 나는 무지하다.’

    필자소개
    학생.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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