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로부터의
    실질적 ‘창당 경험’ 만들자
    [진보정치 공동연재2-2] 새롭게 진보정당파를 만들어야
        2017년 04월 28일 01:4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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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레디앙, 민플러스 공동연재 글이다. 촛불운동과 박근혜 파면을 거치며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대안체제를 앞장서서 주장해온 진보정치는 불신의 장벽에 갇혀 연대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향후 진보정치운동의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냉정한 분석과 평가, 소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진보정치를 연구했거나 진보정당에서 활동한 세 명의 1기 진보정치의 평가와 제언을 6차례에 걸쳐 싣는다. – 글쓴이(정경윤, 김상철, 손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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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정치 공동연재 2-1] ‘정당-사회운동-대중’의 유대관계에 대해

    진보신당이 만들어지고 2008년 촛불 정국을 거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진보신당에서 첫 정당 경험을 하는 이들이 당원의 과반수를 점했던 점이다. 내가 알기론 이는 지금의 정의당도 마찬가지다. 진보정당의 분열로 진보정치가 매우 쪼글어 들었다고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지는 정당마다 반수 이상의 당원들이 해당 정당에서 처음 정당 활동을 경험하는 이들로 채워진다. 그렇게 본다면 진보정당의 당원으로서 진보정치를 경험한 사람들은 지속해서 늘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진보정당은, 진보정치는 위기다. 총량적으로 보면 분명 당원이었거나 당원인 수가 늘어났는데도 말이다. 이 역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진보정치의 위기를 진단하고 해법을 찾을 수 있는 방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진보정치에 진입하고 누가 이탈하고 있나

    우선 진입이 아니라 이탈에 초점을 둬보자. 그러니까 새롭게 진보정당의 당원으로 등장하는 이들이 아니라 기존에 당원이었다가 당원이 아니게 된 이들 역시 적지 않다. 대개 당적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 새롭게 당적을 갖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여전히 진보정당에 대한 유권자로서의 지지를 접지 않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진보정당 혹은 진보정치에 대한 관심이나 신뢰를 하지 않게 된 경우다. 여러 유형이 있겠지만 최근 진행되는 대선만큼 이를 다이내믹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 싶다. 실제로 민주노동당의 당 대표자를 역임했던 이가 보수정당에 입당한 것은 물론이고 보수 후보의 선거운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더불어민주당 내부 경선 당시 각 예비후보자의 캠프마다 진보정당에 이름을 올렸던 이들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당원들이 늘어난 것을 물리적 변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기존 진보정당의 주요 명망가들이 보수정당에 맡기는 것은 화학적 변화라 할 만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진보정당에서 이탈한 기존 당원 중 많은 수 역시 ‘탈정치’의 경향성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보면 새롭게 진보정당에 참가하는 당원과 당원에서 벗어난 이들의 ‘자리바꿈’이라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진보정당이 가지고 있던 구심력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새롭게 진보정당을 경험하는 이들은 어떤 ‘당 경험’을 하고 있는가. 형식적으로는 진보정당의 당원이지만 실제 삶이 바뀌거나 혹은 진보정당이 가지고 있는 ‘사회 변혁적 지향’에 동의하기보다는 굉장히 휘발성이 강한 계기를 가지고 함께할 뿐이다. 진보정당의 지도력은 소수의 그룹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반면, 다수의 신규 진보정당 당원들은 관객 당원으로 머문다. 많은 경우 진보정당의 핵심에는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로 채워지고 다수의 당원은 새로운 집단적 경험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통상 경험의 차이는 당내 다양한 이질감을 만들지만, 그것은 논쟁거리가 되기보다는 침묵 등으로 우회된다. 진보정당의 권력구조 혹은 운영방식이 이중화되었다. 이 때문에 진보정당의 당원임에도 불구하고 타 정당의 후보자를 지지하는 일이 발생한다. 당의 강령이나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 사회문제에 대한 당의 입장을 학습하는 대신 매월 회비를 내는 후원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과거 강력한 경험의 공동체인 민주노동당의 당원들은 이후 진보정당들에서 이탈해 탈정치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새롭게 진입한 진보정당의 당원들은 진보정당답게 훈련되거나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지지’를 표명하는 관객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진보정당 운동의 위기는 바로 이런 내재적인 원인에서 심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진보정당은 낡은 정당이 되어가는가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진보정당은 새로운 정치 문법을 만들기보다는 변화된 당원들의 정서에 맞춰 진보정당의 가치를 탈색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특히 선거를 치를 때마다 유권자들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최대한의 득표를 위해 노력했다. 이것이 유연성이려면, 중심이 되는 가치가 튼튼해야 했다. 고정점이 굳건하면 아무리 유연해도 구심력이 생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험은 개량화로 나타났다. ‘중심 없음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사실 이런 구조가 제한된 경험의 강한 공동체로서 현재 진보정당의 지도력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진보정당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대의’하는 정치가 강화된다. 엄밀하게 보면 현재 진보정당은 소수의 특별한 경험공동체가 변하지 않는 중심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움직임이 없다. 새로운 지도력이 끼어들 틈이 없고 그럴 필요가 생기지도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보수정치에 보아왔던 인물 중심의 계파가 생겨난다. 분명 퇴행이다. 현재의 진보정당이 오른쪽으로 이동한 것은 분명하지만 사회가 더 빠르게 오른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여전히 왼쪽에 있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이를 정당화해준 것이 소위 ‘정치의 자율성’이라는 태도다.

    책임윤리, 능력주의라는 이름 하에 보수정치의 문법 체득

    진보정당의 위기가 회자하였던 2010년 전후 갑자기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진보정당 활동가들 손에 쥐어졌다. 그러면서 책임 윤리가 전면에 등장했다. 과거 운동권적 신념윤리는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치인으로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책임 윤리에 기반을 둔 정치를 해야 한다는 주자이다. 이런 책임 윤리는 ‘당심과 민심이 다를 땐 민심을 따르는 것이 맞다’라는 주장이나 ‘정치와 운동은 다르다’는 표현으로 적나라하게 등장했다. 그리고 이런 말들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된다.

    하지만 베버의 책임 윤리가 바이마르 공화국이 등장하게 된 배경인 독일혁명 당시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그것도 진보적인 대학생 단체를 대상으로 한 연설이 혁명은커녕 반공주의와 기업주의가 판을 치는 한국의 상황에서 등장한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로써 진보정당의 성장경로는 보수정당의 성장경로를 쫓아가게 된다. 보수적 대리주의에서 진보적 대리주의로 말이다. 물론 현재 상황에서 힘이 있는 진보적 대리주의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제도정치의 스펙트럼에서 쐐기의 역할을 하면서 우경화를 저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현재 대선국면은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훈련된 개인이 주목받는 대선과 다수의 개인이 등장하는 지방선거나 총선은 이와 다르다. 실제로 지난 총선에서 지역구의 당선을 위해 무리한 개발공약을 담는 사례가 나타났다.

    이는 책임 윤리가 사실은 ‘일단 책임을 질 수 있는 자리로 어떻게 해서든 가야 한다는 논리로, 즉 ‘옳은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정치적 세속주의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민주노동당을 창당한 1세대 진보정치 활동가들은 너무 빠르게 진보정치의 자산을 탕진했다. 대표적으로는 정치의 윤리성이다. 진성 당원제를 강조하면서도 대의원대회의 결정 사항을 당의 지도부가 부정하고 탈당하는 사례나, 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제명하는 ‘셀프제명’의 사례, 당내 경선의 승리를 위해 당원들의 주소지를 변경해 투표인단을 늘리는 사례, 후보의 상징성이 아니라 자정파의 후보를 위해 묻지마 투표를 하는 사례 등 그나마 진보정당이 기존의 기득권 정당보다 상대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도덕성을 파괴했다. 아마 이후의 어떤 진보정당도 민주노동당처럼 높은 윤리를 자산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진보정당다움에서 태도나 자세에 대한 자산을 빼버리면 유일하게 남는 것은 능력주의다. 그렇다고 당이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당 외부에서 능력 있는 이들을 초빙하는 방식으로 변질한다. 이런 능력주의가 민중들이 가지고 있는 날 것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사용하면 좋은데, 많은 경우 날것의 요구가 넘어야 하는 문턱이 되어서 문제다. 소위 현실주의라 부르는 태도는, 어떻게 해서든 될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해도 안 되는 것들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능력으로 비친다. 이런 경향성은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이미 그와 같은 논리로 직업이 정치인인 이들이 양산되었고 소위 현대 정당의 가장 공통적인 특징인 카르텔 정당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직업적 정치인들과 직업적 정당인들은 진보정당의 문법을 보수정당의 그것과 비교하며 성장시키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진보정당이 보수정당의 낡은 정치 문법을 체득해나가는 과정이 곧 진보정당이 제도 정치 내에서 생존하는 유일한 경로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진보정당은 늘 새로울 수밖에 없다.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익숙한 답보다는 새로운 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뻔한 주장을 한다면 구태여 진보정당을 지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저 새로운 것뿐이라면 그 역시 듣기에만 좋은 이야기로 치부된다. 따라서 진보정당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해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어야 하는 것과 동시에 기존 보수 정당들이 취해왔던 경로에서 벗어난 새로움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과정은 당연히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가 참조하는 서구의 진보정당들이 한 두 번의 선거로, 일이 년의 실험으로 살아남았던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이를 진보정당의 성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이후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힘을 만들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힘을 만드는 조건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현장성이다. 진보정당이 구체적인 갈등의 현장에 참여하는 이유는 관념적인 당파성이 아니라 현실적인 당파성을 만들기 위해서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주력사업이 민생사업이었던 데에는 중립적인 심판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기 위해서였고 구체적인 진보정당의 지지층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진보정당의 현장은 대중조직이 되고 말았다. 대중조직이 처해있는 갈등에 개입하기보다는 대중조직 내에서 권력의 지분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됐다. 진보정치의 당파성이 정치권력의 강화를 위한 동원수단이 된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 현실에서 벌어지는 날 것의 갈등을 함께 경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연대가 곧 진보정치의 논리를 만드는 과정이어야 하고 진보정당의 배타적인 지지층을 확보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보수정당이 보여주는 동원형 정치에서 벗어난 새로운 정치 문법을 만들어야 한다. 제도적 전술과 함께 비제도적 전술을 통해 제도 밖에서 형성되는 힘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현행 법제도 내에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는 쉽다. 하지만 진보정당 운동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제도 내에서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그에 앞서는 배제와 고통이다.

    실제로 다양한 현안에 대해 개입을 하다 보면 현행 제도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집회나 점거의 방식을 써서 현행 제도 너머를 위한 ‘정치적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국회의원이냐 아니냐(당연히 더 수월한 측면이 있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가능성을 어디까지 볼 것인가의 문제다. 따라서 처음에 거론한 현장성은 단순히 대중조직 내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공통적으로 살고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실제로 민주노동당 초기에 진보정당의 현장은 광장에서의 집회에 머무르지 않았다. 지역 내 문제가 있는 곳이면 찾아가 개입하려고 했고 의지가 있음에도 항의하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정당의 외피를 제공해 싸울 수 있게 했다. 이 과정에서 원내이든 원외이든 진보정당의 새로운 정치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현재 진보정당들은 구체적인 지역의 문제, 삶의 문제에 개입하기보다는 보수 정치도 사용하는 추상적인 문제에 매달린다.

    민주노동당

    사진=노동자연대

    과거 무상급식 운동과 최근 최저임금 1만원 운동은 모두 운동 의제가 보편적인 의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이 둘은 분명 다른 경로를 거쳤다. 무상급식 운동 이전에 민주노동당은 친환경급식이라는 전당적인 운동을 만들어 냈다. 지방의회의 의원을 중심으로 조례안을 발의하고 지역마다 운동본부를 만들어서 서명운동 등 주민 조직화에 나섰다. 이 의제는 당시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던 한미FTA 문제와 붙으면서 통상 의제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친환경급식이라는 의제는 무상급식이라는 의제로 질적인 비약을 보였다. 전국적인 조례제정운동이라는 방식으로 이해관계자가 직접 참여하는 운동의 문법을 만들었다. 그제야 제도 정치 내의 보수정당들이 움직였다.

    반면 최저임금 1만원은 이제 대선 후보자들의 주요 공약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최저임금 1만원으로 머물러 있다. 지역에서 몇 년째 시행되고 있는 생활임금 의제와 연결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최저임금 1만원이 필요한 구체적인 대중들의 조직화 경로가 보이질 않는다. 진보정당들조차 선언적인 1만원 주장 이외에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경로와 이를 가능하게 만들 대중운동의 문법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어떤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들기보다는 몇몇 지방정부의 과시적인 사업으로 수렴된다. 적어도 무상급식 의제는 밑에서 위로의 경로가 보였지만 최근 등장하는 주제들은 위에서 아래로라는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엔 운동의 의제를 지역에서 꾸준하게 실험하고 풀어내는 지역 운동의 부재라는 맥락이 놓인다. 그리고 핵심적인 활동가층에 대한 고민이 부재하다. 특히 정당 활동가에 대한 상이 없다. 무조건 전업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여전히 진보정당의 문법은 전업 활동가에 맞춰져 있는데 현실에선 현업이 있는 이들이 이를 집행하느라 골머리를 썩인다. 진보정당의 정치 운동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특히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일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속해서 정당 내 핵심적인 활동가로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가 필요하다. 헌신적이지만 지역에서의 개입력은 ‘0’으로 수렴하는 역설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하고 개개의 활동가를 건전지 바꿔 끼우듯이 소모하는 행태를 반복해왔다.

    과거 학생운동이 진보적 대중운동이나 정치 운동의 저수지였다면 이미 수원지로서 학생운동은 말라비틀어진 지 오래다. 그렇다면 정당의 운동이 자체적으로 사람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어느 정당도 기존의 운동가로서 당직자와 직업인으로서 당직자 간에 나타나는 기계적인 구분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지 못하다.

    실질적인 ‘정당 만들기’의 공동경험 축적이 필요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은 단순히 물리적인 실체로써 정당을 만드는 것보다 오히려 ‘정당 만들기’의 실질이라는 측면에서 공동경험을 축적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선거는 이를 위한 좋은 계기다.

    앞서 말한 바를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구체적인 과제를 중심으로 정파를 벗어난 공동사업을 모색하자. 특히 중앙당 중심의 논의가 아니라 지역에서부터 다양한 모델들을 만들자. 하반기에 몇몇 의제를 중심으로 조례 제정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의 흐름을 함께 만들자. 이를 바탕으로 내년 지방선거를 거치자. 실제로 지역에서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흐름을 만들고 ‘함께 하는’ 공동의 경험을 축적하자. 세력이나 단체의 연합이 아니라 독자적인 진보정당의 흐름을 장기적으로 함께 도모하고 공동으로 새로운 지역 비전을 구축할 ‘운동권들의 연합’을 만들자. 어설픈 대중정당의 논리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해야 하는 진보정당의 그림을 다양하고 구체적인 실천과 실험을 통해서, 그리고 반복적인 실패를 통해서 구축해나가자. 이런 흐름은 지역별로 다양한 수준과 층위에서 진행될 수 있다. 우리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대리주의의 그림자로 숨어버린, 현장을 잃어버린 진보정치의 맥락을 다시 잡아보자. 우리가 만나야 하는 대상들은 이미 우리가 오가는 그곳에 있지 않나. 진심을 담은 제안이다. [끝]

    필자소개
    전 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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