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 이상과 현실의 충돌
    [러시아혁명 100년②] 복합적 혁명
        2017년 01월 26일 12: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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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혁명 100년 ① 링크

    10월 혁명의 의의를 보다 크게 만든 것은 바로 그 복합적 성격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하지만, 볼셰비키나 좌파사회주의혁명당 등 사회주의 정당 지지자, 즉 도심 노동자나 인텔리만의 혁명도 절대 아니었다.

    레닌 자신이 1917년 10월 혁명을 총칭하여 “인민 혁명”, “인민 다수의 혁명”이라고 했는데, “인민”이라고 한 그 혁명의 주도세력을 분석해보면 사회주의 지향의 인텔리/노동자층 이외에 적어도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지주들의 농지를 나눠 갖기를 원하며 농민공동체의 농지 공동소유권을 취소시킨 스톨르핀 총리 정권의 반동적인 “농업개혁”을 무효화시켜 다시 한 번 대부분의 농지를 농민공동체의 소유로 돌리려는 농민층이었다.

    또 하나는, 최소한 자치권부터 최대한 분리 독립까지의 민족자결권까지 요구하며, 모든 민족·종교 차별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을 꿈꾸었던, 그 당시 러시아 제국 총인구 절반 이상을 구성했던 민족적 소수자들이었다. 그리고는 수백만 명의 제1차 대전 징집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러시아 인민 6백만 명 가까이 사망자나 부상자, 전쟁포로로 만든 미증유의 도살극의 무조건적, 가장 빠른 중지를 원했다.

    결국 10월 혁명은 노동자들의 요구인 자본가층으로부터의 생산수단의 공유화 이외에는 농지개혁과 민족 차별구조의 해소,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의 탈퇴 등 여러 문제들을 동시에 해결해야만 했다.

    혁명이 이처럼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만큼 그 진행은 어쩔 수 없이 충돌의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혁명이 해결해야 할 여러 과제들은 상호 보완적일 수도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상호 충돌적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소비에트 국가의 입장에서는 세계혁명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했지만, 그게 당분간 불가능한 이상 적어도 되도록이면 제정러시아의 영토라도 충실히 이어받아야 했다. 영토가 넓고 자원이 많을수록 국제자본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서 경제적인 실험들을 하기가 훨씬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볼셰비키들이 그 영토권을 계승하고자 하는 구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 민족자결권을 활용하고자 하는 소수자들이 산다면?

    혁명의 두 가지 원칙이 상호 충돌됐을 때에 하나는 희생돼야 할 때가 있었다. 이미 레닌 시절에 희생된 민족자결권의 원칙은, 그 뒤로는 수십 년 후에도 혁명을 계승한 국가를 괴롭힐 수도 있었다.

    최근 러시아가 정식 전쟁을 2008년에 벌인 하나의 인접 국가는 그루지야인데, 그루지야 민족주의의 상당히 반러시아적인 성향은 1921년에 소비에트 러시아가 군사력을 이용해서 독립 상태이었던 그루지야를 다시 영토화한 부분과 직접적 관계가 있다. 그 뒤로는 소비에트 국가가 1924년 독립 지향적 농민 봉기를 진압하는 등 사실상 민족자결의 원칙을 가시적으로 유린했었다.

    마찬가지로 1990~2000년대의 러시아를 괴롭힌 “체첸 문제”의 한 가지 기원은, 1920년대 초기의 소비에트 국가가 체첸 영토에서 이용한 토착세력들에 대한 각종의 강압책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소비에트 정부는-원칙이 아닌 현실의 세계에서는-각종 자원이 많고 전략적 요충지인 그루지야나 체첸 영토의 독립을 허용해 그 작은 나라들이 영국 등 열강의 사실상의 보호국이 되어 소비에트에 대한 침략준비의 기지가 되는 것을 과연 용인할 수 있었겠는가? 혁명이 일국으로 국한되는 이상 영토 통합 등 “국가건설”의 과제들이 각종의 이상주의적 원칙에 우선되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소비에트 러시아를 그 당시의 조선 간행물에서 “노농적로赤露”라고 불렀지만, 노동자와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꼭 일치되는 것도 아니었다. 숙련공 계층에 그 기반을 둔 볼세비키당은 농촌에서는 거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농민들의 다수가 지주들의 농지를 나누어 가지게 된 뒤로는 되도록이면 국가로부터의 간섭을 적게 받기를 원했지만, 노동자계층을 지지기반으로 삼은 새로운 국가는 농촌으로부터 곡물을 공출하고 내전 상황에서 필요한 병력자원을 농민들로부터 확보해야 했다. 공출과 징병에 분노한 농민들은 반소비에트적 반란들을 일으키고, 그 반란들을 주로 노동자 출신으로 구성된 붉은 군대 부대들이 상당히 잔혹하게 진압해야 했다.

    거기에다가 “노농국가”에서는 “노”와 “농”은 평등하지 못했다. 1918년 6월에 통과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РСФСР)의 최초의 혁명 헌법에 의하면 도심에서는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 한 명을 5천 명의 유권자들이 보내는 동시에 농촌에서 한 명의 대표자는 아예 2만 5천명의 유권자들을 대변해야 했다. 농민의 5표는, 노동자 한 표와 가치와 동일했단 이야기다.

    사실 “무산계급의 독재”란, 완전한 무산자라고 할 수 없었던 농민에 대한 도시 노동자(와 그들을 기반으로 삼는 급진적 정치세력들)의 통제이기도 했다. 비민주적인 구조임에 틀림없다. 한데 농민들이 노동자와 같은 정치적 비중을 갖는 경우 과연 혁명의 사회주의적 지향은 여전할 수 있었겠는가? 20-30년대의 조선의 적색농조도 주로 소작인과 빈농들로 구성됐는데, 러시아의 농촌에서도 소수의 빈농 내지 고용농들이 급진적인 성향을 띨 수 있어도 다수의 농민들은 비시장적인 미래 사회를 상상할 수 없었으며 지향하지도 않았다. 사회주의 지향과 절차적 민주주의의 온전한 공존이 불가능했다는 것이었다.

    혁명의 과정은 보통 어떤 고정된 절차를 결여한다. 우리 일상은 법에 의해 지배를 받지만, 일상이 아닌 비상시인 혁명은 법을 수시로 만들고 수시로 폐기하는 시기다. 고정된 틀들을 거부하는 만큼 혁명은 그 성질상 폭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법의 지배가 불가능할 때 이해관계의 충돌은 대체로 “실력투쟁”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매우 아쉬운 이야기지만, 혁명의 문법상으로는 총탄은 표가 되고 사격이 투표 행위와 마찬가지가 될 때가 많다. 물론 이것은 혁명의 추진세력들이 단순한 “폭력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레닌은 민중의 목소리를 늘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고, 불필요한 폭력을 애써 피하려는,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정치인이었다. 한데 그도 사격 소리를 듣기 전에 그의 고정 지지세력이 아닌 인민들의 의사에 꼭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크론슈타트

    론슈타트를 점령하기위해 진격하는 적(赤)군들

    사적 곡물 유통을 금지시킨 “전시 공산주의”에 불만을 품어 들고 일어난 크론슈타트의 농민 출신 징집 수병들의 반란(1921년초)을 목격하고서 레닌은 농민들에게 양보를 하여 신경제정책으로 전략적 후퇴를 했다. 이 후퇴의 대가는, 봉기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약 3-4천 명의 목숨들이었다. 혁명과 폭력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쌍둥이임에 틀림없다. 한데 혁명 없이 역사적으로 진보할 수 있는 방식은, 과연 인류에게 있기라도 하는가? (계속)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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