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혁명의 이상과 현실
[러시아혁명 100주년 ①] 20세기 최대의 역사적 사건
    2017년 01월 25일 09: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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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20세기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던, 그리고 여전히 미치고 있는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1917년 러시아혁명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박노자 선생의 블로그 글을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다양한 맥락에서 짚어보는 연속 게재가 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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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 혁명을 논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우리가 지금도 10월 혁명의 연장이 되는 시공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작게는 지금도 한반도의 북반부에서 10월 혁명의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스스로를 규정한 소련의 영향 밑에서 성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엄존하는가 하면, 또 크게는 자본주의를 부정한 10월 혁명 없이는 오늘날 세계의 정치계에서 하나의 핵심세력으로 작동되는 좌파도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좌파의 가장 근본적인 요구는 무상의료, 무상교육, 노동자들의 경영참여인데, 이 요구를 최초로 실현한 것은 다름이 아닌 10월 혁명이었다.

물론 세계의 좌파 판도를 보면 혁명이 아닌 개혁을 추구하는 사민주의 계통은, 급진주의자들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도 모른다. 한데 복지국가 건설을 일찌감치 이루어내고 완전고용을 실시한 10월 혁명 이후의 소련과의 체제경쟁이 아니었다면 과연 서구 등지에서의 복지개혁이 가능했을까 싶다.

서구형 복지국가가 바로 소련의 몰락 이후에 급속히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온건 좌파는 10월 혁명에 비판적일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 혁명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세계의 20세기를 규정한 최대의 역사적 사건을 지명하자면 1917년 10월 혁명이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되겠다.

러시아

트로츠키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급진 좌파들은 1920년대 말 이후부터 “혁명이 배반됐다”고 주장해왔다. 혁명가의, 감정적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는 아마도 “배반”으로 보일 여지가 크겠지만, 조금 더 거리를 두어서 역사화 시키자면 러시아혁명이 프랑스 등 역사 속의 많은 다른 혁명들처럼 그 발전의 주어진 궤도를 차근차근 밟아왔다고도 볼 수 있겠다.

1920년대 말에 러시아형 급진적 자코뱅 독재는, 테르미도르식 독재라고 할 스탈린 독재로 교체됐다. 궤도 자체는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았지만, 테르미도르기가 대단히 길었다는 것은 프랑스와의 차이점이었다.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의 통치기인 그 테르미도르기에는, 러시아는 사실상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인 공업화와 도시화, 종교와 국가의 분리, 군사 증강, 보편적 국민/인민 교육의 실시 등을 수행했다. 단, 준주변부 국가인 러시아로서의 특징과 20세기라는 독점자본 시대로서의 시대적 특징 등이 있어, 이 과제들을 고전 자본주의와 다른, 국가화를 통한 방식으로 수행한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기” (1985~91)와 초기 옐친의 표면적 “민주주의” (1991~3)는 러시아식 총재정권, 즉 보수적 민주주의의 부흥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프랑스와 다르지 않게 1993년에 국회를 포격한 옐친과 그 후계자 푸틴은 나폴레옹과 같은 보수적 독재의 길로 갔다. 한데 나폴레옹도 그랬듯이, 푸틴의 독재는 어디까지나 혁명기 성취의 일부를 – 비록 보수적인 모습으로 – 간직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본화가 용인되긴 했지만, 자본가로 급부상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1917년 혁명 이전의 자본가 계급과 아무 관계없는 데르미도르기 관료들과 그 자녀들이다. 규모가 축소되긴 하지만, 원칙상 무상의료와 교육은 여전히 유효하며, 제정러시아 시대의 국교 등은 복귀되지 않았다.

혁명의 일부 성취가 보존되는 만큼 러시아형 나폴레옹이라고 할 푸틴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 만만치 않아, 그런 유형의 정권이 꽤나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나폴레옹 독재기도 혁명 한 주기의 최후의 부분인 만큼, 러시아인들이 아직도 혁명의 자장 속에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배반”이라는 말은 비록 감정이 섞인 언어긴 하지만, 10월 혁명이 그 본래의 취지를 끝내 다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이야기했던, “주방의 하급 여성 노동자도 같이 국가경영에 참여하는” 코뮨 식의 비국가적인 사회로서의 사회주의는, 그 어디에서도 장기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혁명이 세계적으로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모스크바가 아닌 베를린이 혁명 국가의 수도가 됐다면 과연 혁명의 현실이 그 이상에 조금 더 부합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1923년의 독일 혁명 시도의 불발로 유럽 핵심부에서의 혁명에 대한 꿈은 거의 깨지고 말았다.

인구의 다수가 소농이었던 러시아에서의 혁명은 애당초부터 도시 안에서의 직장의 민주화 (노동자들의 공장 관리 등)와 함께 전국적으로 농촌에 대한 도시의 압도적인 통제를 의미하기도 했다. “코뮨식 사회”가 태어날 수 있는 이상적 환경은 분명 아니었다. 한데 내전과 열강 간섭과의 투쟁 속에서 도시에서도 투쟁의 대상인 열강과 경쟁할 수 있는 관료적 국가가 다시 재건되는 모습을, 많은 볼셰비키들이 우려에 가득찬 눈으로 지켜봤다.

공장들에 대한 관리를 관료가 아닌 노조들에게 맡겨달라 했던 1920~22년의 “노동자 반대파” 위기 의식의 출발점은, 혁명의 이상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는 현실에 대한 통찰이었다. 당 관료들이 국가 관료들을 통치하고, 당과 국가가 “무산계급의 이름으로”, 노조의 보조를 받아 평민들을 같이 통치하는 새로운 형태의 관료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어도, “코뮨” 만들기가 절대 쉽지 않았다.

결국,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10월 혁명은, 그 궤도를 밟아가면서 여러 단계들을 지난 뒤에 인류에 남긴 것은, 레닌이 꿈꾼 사회주의라기보다는 인민들에게 완전고용과 각종의 복지혜택을 보장해주고 능력대로의 신분 이동까지 책임져줄 수 있는, 하지만 정치를 인민이 아닌 “인민의 대표자”들만이 맡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화된 산업사회다. 서구형 복지국가보다 어쩌면 더 완벽한 복지체계를 갖춘 사회이었지만, 사회의 민주성으로 본다면 서구 등 형식적 의회민주주의라도 돌아가는 사회에도 미달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배반이라면 <국가와 혁명>의 이상에 대한 배반임에 틀림없지만, 과연 그 애당초의 이상들을 “다” 실현시킨 혁명들을 역사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서구형 의회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영국 혁명의 이상이 종교적 도덕이 지배하는 청교도 사회이었으며, 민주주의의 또 하나의 시발점이 된 프랑스 혁명의 이상이 자본주의 사회로서 불가능한 평등과 박애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그렇다면 영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도 “배반”됐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인가?

이상들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근원적인 이유들에 대해서는 한 번 제대로 성찰해보는 것은 더 생산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국방부와 비밀경찰을 다 갖추어야 할 국민/인민국가가 존재하는 이상, 즉 혁명이 전 세계로 확산되지 못하고, 혁명자 집단이 “국가 건설”을 해야 하는 이상 과연 “코뮨형 사회”란 애당초부터 가능하겠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아니면, 몇 명의 전문가와 경영의 총책임자들의 통제를 필요로 하는 커다란 철강공장이나 비료공장, 조선소 같은 대형 사업장은, 과연 어디까지 그 속성상 “코뮨화”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전체로 봐서는, 산업사회와 레닌이 꿈꾼 “완전한” 민주주의는 과연 공존이 가능하겠는가? <국가와 혁명>이 제시한 과제들이 산업사회 이후를 겨냥하는 것이라면 10월 혁명은 아직도 미완형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계속)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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