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엣사 혁명의 한계와 약점
    [필리핀 좌파운동] 미완의 혁명들
        2016년 08월 26일 12: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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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8 장 엣사 1, 2, 3….

    2001년 1월 17일에서 20일에 걸쳐 필리핀 신문들은 조셉 에랍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몰아낸 또 한 번의 엣사(EDSA)혁명 기사로 도배되었다. 1986년 2월 21일~25일에 독재자 피델 마르코스를 타도한 최초의 민중혁명과 연관지어 이 4일간의 민중반란은 “엣사 투(2)”로 명명되었다. (EDSA는 필리핀 마닐라의 가장 길고 큰 메인 로드의 이름인데, 1986년 민중들이 거리로 나와 독재에 저항하던 혁명의 거리였다. 그래서 필리핀 피플파워를 엣사혁명이라고도 한다)

    민중 봉기의 도화선이 된 것은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비밀 은행계좌의 존재와 횡령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갈색 봉투의 개봉을 상원이 거부한 것이었다. 봉투를 개봉하려던 10명의 상원의원들이 격분하여 상원의 공청회 석상으로부터 퇴장하는 장면이 TV로 방영되었고, 수백만의 필리핀 국민들이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날 밤, 여러 단체의 활동가들이 상원 공청회의 코메디에 항의하는 시위를 마닐라수도권 곳곳에서 전개했다.

    우리가 속해있던 사회주의노동당(SPP)은 케손 시내에 있는 티목로, 서(西)로, 케손로의 교차로에 집결해 교차로 가운데 있는 금속제 전주와 철망을 돌과 봉으로 두드리며 소음 데모를 시작했다. 우리 사무실은 그 길모퉁이 근처에 있었고, 우리는 사무실에서부터 거리에 이르는 전봇대에 깃발을 묶어 걸었다. 우리는 티목과 모라토 대로의 교차로에서 소음 데모를 하고 있는 또 다른 좌파 그룹을 만날 수 있었다.

    자동차들은 속도를 낮추고 경적을 울리며 사운드데모에 동조했다. 한밤중, 지나가는 여러 대의 차 속에서 “가자, 엣사 성당으로! 엣사 성당으로!”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깃발을 흔들며 두 대의 택시에 분승해 엣사 대로와 오르티가스 대로의 교차점에 있는 엣사 성당으로 향했다.

    엣사(EDSA) 2

    엣사 투(2)는 수백명으로 시작됐다. 엣사 성당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다소 불안했다. 경찰에 의해 쉽게 쫓겨나지 않을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일부 그룹이 성모 마리아상 옆 성당 옥상에 스피커를 설치했다.

    집회는 새벽부터 시작되었고 발언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모여든 대중들에 의한 집회가 계속되었다. 4일간이나 끊이지 않고 연설자와 가수, 아티스트가 등장했다. 엣사 2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1월 19일 밤에 그 절정에 달해 경찰 추산으로 약 140만명을 헤아렸다.

    1월 20일 아침, 군이 에스트라다에 대한 지지 철회 성명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와중에 성당에 모인 좌파 진영은 참가자 수의 증가에 힘을 얻어 말라카냥 궁으로의 행진을 결정했다. 성당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몇 백Km 떨어진 루손 섬 북부나 남부로부터 온 사람도 있었다. 마닐라 대주교이자 엣사 집회의 중심인물이던 하이메 신 추기경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사람들에게 행진을 자제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좌파 연설자는 군중들을 향해 말라카냥궁으로 가서 에스트라다를 사임시키자고 선동했다.

    2차 피플파워

    엣사2의 한 장면

    내 연설 순서가 되었다. 나는 짧게 “멘디올라! 멘디올라!”(대통령궁이 있는 지역)를 외쳤고 군중들은 그에 화답했다. 그렇게 해서 좌파세력은 행진을 결정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이 엣사에 머물며 행진에 동참하지 않았다. 행진을 막는 하이메 신 추기경 등 교회 지도자들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새벽에 엣사 성당을 출발했다. 행진을 시작할 때는 2~3천명이었지만, 멘디올라에 도착할 즈음 시위대의 수는 수십만 명이 되어 있었다. 연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고, 시위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는가 하면 먹을 것과 음료를 주었다. “동참하라!”는 외침이 끝없이 메아리쳤다. 말라카냥궁까지 12Km 정도 남아 있는 지점에 도달했을 즈음, 6륜 트럭이 시위대의 선두에 끼어들었다. 1970년대의 포크송 가수 코리타(Coritha)가 트럭 위에서 그녀의 히트곡인 「오라스 나(It’s Time)」를 불렀다. “지금이야말로 마음을 결정할 때, 빛에 가까이 다가가야 할 때,… 공포는 오직 마음속에 있는 것일 뿐… ”이라는 내용의 가사로 사람들에게 변혁을 호소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깊은 울림이 있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정오 무렵 우리가 멘디올라 다리에 닿을 때까지 코리타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 노래를 불렀다.

    다리 근처에는 에랍의 지지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으나 훨씬 많은 수의 우리 대오가 그들을 레가르다역의 동측에 있는 사회복지개발청 근처로 몰아내는 형국이 되었다. 에랍 지지자들과 우리 대오 일부와의 사이에 충돌이 생겨 난투가 벌어졌다. 그 때 라디오에서 아로요가 이미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대법원장 힐라리오 다비데의 입회 아래 하이메 신 추기경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윽고 에랍이 대통령 관저를 떠났다는 사회자의 멘트가 흘러나오자 함성과 환호가 울려 퍼졌다. 엣사 2는 필리핀 민중들의 또 한 번의 승리였다.

    엣사(EDSA) 3

    그로부터 넉 달도 지나지 않은 4월 25일부터 5월 1일에 걸쳐 역사적인 장소인 엣사에서 또 다시 격변이 일어났다. 샌달에 누더기를 걸친 도시빈민들이 엣사 성당으로 몰려와 에스트라다의 석방과 대통령으로의 복귀를 요구하며 7일간의 철야집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주로 메트로 마닐라 인근에 거주하는 빈민들이었다. 도시빈민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이 시위는 “엣사 쓰리(3)” 또는 “푸어 파워(Poor Power)봉기”라고 불렸다.

    엣사 3의 참가자 규모는 엣사 2에 필적했다. 엣사 3의 참가자는 피크시에 약 100만 명 이상으로 알려졌다. 적극참가자(성당에 계속 있었던 사람들)는 엣사 2 때보다 많았다. 이것은 참가자들의 계층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엣사 3의 참가자들은 대부분이 도시빈민들이었고 그들은 중간층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엣사 2의 참가자의 태반이 학생(대부분은 노동자계급 가정 출신)들이었던 것에 비해, 엣사 3의 주요 참가자는 도시빈민층과 실업자들이었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기층빈민”이라고 불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5월 1일 이른 아침, 엣사 거리로부터 대통령관저까지 행진해 온 대략 5만 명의 시위대가 말라카냥궁의 정문을 향해 돌진하면서 봉기는 막을 내렸다.

    대통령 관저로의 돌격은 시위 참가자들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강력한 지지와 군의 중립화라는 필요조건의 결여로 인해 애초부터 패배는 운명 지워져 있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봉기의 성공에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에스트라다를 지지하는 정치가들은 선동만 했을 뿐, 말라카냥궁 습격에는 가세하지 않았다. 그들은 군부를 이간질하려는 허황된 시도를 위해 대중들을 총알받이로 이용했을 따름이었다.

    엣사3

    엣사3의 한 장면

    엣사 3는 시위대들 중 다수의 사망자와 수백여 명의 체포자를 내고 막을 내렸다. 그중에는 돌이나 곤봉 등 우선 손에 잡히는 것들을 사용해 용감하게 경찰과 싸운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라카냥 궁 습격 이후 수주일간 계속된 군중들의 폭동에 대해 아로요 정권이 공포의 탄압을 가하는 구실이 되었다. 이른바 “자유주의 체제”(놀랍게도 이 표현은 정권 초기에 아로요와 동맹관계를 맺었던 좌파세력이 썼다)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시내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하는 한편, 영장 없는 체포와 슬럼가나 빈민가에 대한 경찰의 단속을 무차별적으로 자행했다. 소요 사태는 1주일간 계속되어 5월 7일에 막을 내렸다.

    제 29 장 3개의 엣사(EDSA) 버전 

    필리핀에는 3개 버전의 엣사 항쟁이 있다. 1986년의 “엣사 1”, 2001년의 “엣사 2”, 그리고 그 2개월 후의 “엣사 3”이다.

    엣사 3는 의심할 바 없는 민중봉기다. 3개의 봉기에는 대규모의 대중 동원과 민중들의 직접행동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주역은 억압적이고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정권의 추방을 위해 압력을 행사하려고 한 수많은 민중들이었다.

    1986년 2월의 엣사 1은 혐오스러운 마르코스 독재의 타도를 목표로 하는 대중들의 직접행동이었다. 2001년 1월의 엣사 2는 부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에스트라다 정권의 타도가 그 목적이었다. 그리고 2001년 4월~5월의 엣사 3 역시 글로리아 아로요의 엘리트 체제 추방을 목적으로 한(추방된 에스트라다를 복권시키려 한), 주로 빈민층에 의한 직접행동이었다.

    그러나 엣사 1의 사회적 중요성은 그 후의 엣사 봉기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엣사 1은 강력한 반독재투쟁의 정점이었다. 1986년의 엣사 1에 의해 강고한 마르코스 독재 체제가 타도되었고 진보적 · 혁명적 세력에게 커다란 정치적 도약과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독재체제의 붕괴는 좌파 진영에게 폭넓은 민주주의의 장과 정치적 활동 공간을 열어주었다.

    PeoplePower1

    1986년의 엣사1 모습

    엣사(EDSA) 2

    이에 비해 엣사 2는 주로 정권의 부패에 초점이 맞춰졌다. 엣사 2는 민주주의의 장의 확장과 폭넓은 노동계급 운동 지평의 확대라는 관점에서 볼 때,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엣사 2의 승리자이자 에스트라다를 대신해 정권을 획득한 글로리아 아로요는 애초부터 필리핀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향유하는 자들의 편이라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IMF나 세계은행 등 제국주의 기관들이 기대하는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착실한 경제관료의 면모를 드러냈다.

    엣사 2는 그 정치적 중요성에 있어 첫 번째 엣사에 필적하지 못한다. 좌파 진영 내에서는 엣사 2가 단지 “지배계급 내의 에랍파와 반에랍파의 대결”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존재했고, 그로 인해 일부 좌파는 이 봉기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1월 20일 아침의 대통령 관저 앞 시위를 포함해 강력한 정치적 참가를 주장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째, 대중들이 그곳에 있었고, 부패한 에스트라다 정권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려는 수백만명의 민중들이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엣사 항쟁으로 대중적 동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군부 내에 잠재한 쿠데타 계획에 대한 방어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과 가까운 군인들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을 알았다. 엣사 2 이후 제출된 정부의 한 보고서는 당시 군부 내에서 적어도 3개의 그룹에 의한 쿠데타 계획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세 번째로 좌파의 개입은 대중들로 하여금 가일층 자신감을 얻게 하고 정치적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즉 조직된 세력의 결집을 왼쪽 날개로 서포트하기 위한 것이었다. 좌파 세력은 위기의 본질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에스트라다를 대신하는 좌파적인 구상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지배계급 내의 반 에스트라다파가 대중의 전투성 앞에서 동요하는 것을 폭로해 내는 것이기도 했다.

    하이메 신 추기경이 이끄는 교회권위자를 포함한 엘리트 층 출신의 반(反)에스트라다 그룹은 정권 내 잔존세력에게 에스트라다를 버리고 다음 헌법상의 계승자(글로리라 아로요)를 지지하도록 부탁하는 청원행동을 하려 했을 뿐이었다. 1월 20일 이른 아침, 마닐라 대주교 하이메 신 추기경이 말라카냥 궁 포위 시위를 중지시키려 한 것에서도 그것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엣사(EDSA) 3

    엣사 3는 부적절한 행동이었고 특히 처음 며칠간 성당에서의 집회에서 있었던 위법 행위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엣사 3를 인정하지 않는 좌파 그룹도 있다. 그러나 빈민층이 속속 엣사 성당에 무리지어 모이고, 5월 1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라카냥 궁을 향해 몰려가는 것을 보면서 좌파는 대단히 당혹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트라다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수의 빈곤층이 에스트라다를 지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그야말로 “푸어파워 봉기”인가, 엣사 혁명의 “빈민 버전”인가? 빈곤층의 봉기인가, 아니면 단순한 “일당 동원”(즉 에스트라다파의 정치가들에게 고용되어 성당에 몰려온 것)에 불과한 것인가?

    필리핀 좌파는 다음 사항에 입각해 엣사 3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단순한 “일당 동원”에 불과하다는 주장과는 달리 수만 명의 사람들이 엣사 성당에 결집해 5일간이나 투쟁했고 그 피크시의 규모는 엣사 2(백만 명 이상)에 필적했다. 둘째, 적극 참가자의 수는 오히려 더 많았다는 점. 셋째, 시위참가자들의 소속 계층이 중간층이 아닌 빈민층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이다.

    우리 그룹과 사회주의노동당의 기반이 된 지역에서도 다수의 빈곤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가했던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 에스트라다를 지지하는 정치가 중에는 빈민들의 집회 참가를 위해 운송수단을 제공한 자가 있었다. 그러나 진보진영 역시 마찬가지의 행동을 했다. 엣사 3의 “폭도”가 일당을 받고 동원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말라카냥 궁 투쟁에서도 증명됐다. 그들이 만약 돈을 받고 동원된 사람들이었다면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면서 싸우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요 일간지의 진보적 칼럼니스트, 콘라도 데 퀴로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 「 나는 “엣사 3”를 다른 엣사와 구별해 따옴표를 써서 언급하고 싶다. (에스트라다를 대통령으로 복귀시키겠다는) “엣사 3”의 목적은 이전의 두 번의 엣사의 목적처럼 고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엣사 3를 일련의 엣사 항쟁 중에 발발한 하나의 해프닝으로 일축해버릴 수는 없다. 엣사 3 역시 다른 두 번의 엣사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각가지 이유로 성당으로 결집했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저 멀리 높은 분들이 운영하고 있는 정권, 또한 점점 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해가는 자신들을 신경써주지 않는 정권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엣사 3에 참가했던 압도적인 다수는 에스트라다 지지라기보다는 반(反)아로요 입장에 경도되어 있었다. 엣사 3는 단순히 추방된 전 대통령의 복귀를 요구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못가진 자들이 처해 있는 비참한 상태에 대한 혐오와 환멸의 폭발을 보여준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볼 때 엣사 3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해야 했던 것일까?

    이른바 진보진영(자칭 “시민사회”) 안에는 엣사 3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곤경에 빠진 아로요 정권을 지지하는 행동을 한 자들도 있었다. 군중들을 에스트라다 복귀 요구로 몰고 가면서 말라카냥궁 습격을 선동한 반 아로요파의 썩은 정치가를 고립화시키는 것은 정치적으로 필요한 처방이지만, 시위에 참가한 대중들을 썩은 정치가들에게 포섭된 어리석은 무리라고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엣사 3의 대다수 참가자들이 순수한 혐오감을 아로요 정권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증거는 충분히 있다.

    사회주의노동당(SPP)은 엣사 3 세력에 손을 내밀 것을 다른 좌파에게 제안했다. 우리는 엣사 성당에서의 그들의 행동에 동참하지는 못했으나(그들은 좌파들을 아로요 지지 세력으로 간주했다), 일부 동지들을 성당집회에 참가시켜 우리의 선전물을 배포하게 했다. 우리는 “에스트라다도 아니고 아로요도 아닌 빈민을 위한 정권의 수립”을 호소하는 성명을 빈민가에 배포하자고 제안했다. 슬럼가에서의 이런 활동과 대중 집회가 우리의 입장을 알려주고 대중들을 설득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엣사 항쟁의 한계와 약점

    3번의 엣사 항쟁은 모두 필리핀 지배계급 내 정파들에 의해 이끌려졌다. 엣사 1은 코리 아키노파를 정권의 자리에 앉혔다. 엣사 2는 아로요파를 낳았다. 그리고 엣사 3는 에스트라다 정권의 복귀를 노린 에스트라다파가 주도했다. 따라서(적어도 엣사 1, 엣사 2에서는) 새로운 정파가 권력을 잡게 되면, 곧바로 “피플파워”를 해체시키고 무력화시켰던 것에 대해 새삼 놀랄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 피플파워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 정권을 잡게 되면 이미 그것이 필요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플파워 혁명” “엣사 혁명”이라는 것은 잘못된 명칭이다. 그 어느 엣사 봉기도 구 지배계급이나 구 지배체제가 새로운 사회경제적 질서를 대표하는 새로운 계급에 의해 타도되는 진정한 혁명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엣사 봉기는 자본주의 국가의(고스란히 온존된) 주요한 기관의 당번병을 교체시켰을 뿐이었다. 이른바 “새로운 개의 목에 걸린 오래된 목걸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은 민중들의 손에 권력이 넘어갔다는 의미에서의 “피플파워”가 아니다. “피플파워”라는 용어는 단지 엣사 봉기의 대중적 특질을 나타내는 형용사에 지나지 않는다. 구정권에 대항하여 다수의 민중들이 결집하여 궐기했지만, 최종적으로 그들은 역시 익명의 대중에 불과했고, 새로운 정권 하에서의 작은 권력에서조차 배제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엣사 3와 엣사 1, 엣사 2와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엣사 1과 엣사 2는 “성공”했지만, 엣사 3는 에스트라다 정권의 복귀에 실패했다. 아로요의 배후에 결집해있던 군대를 조금은 동요하게 만들었지만, 분열은커녕 중립화시키는 것조차 실패했다. 그렇다고 해서 엣사 3를 완전히 말소시킬 수는 없다. 엣사 3 역시 대중동원과 직접적 행동을 기초로 했다는 것과, 지배 계급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어젠다를 시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도했다는 것은 이전의 엣사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엣사 3의 실패는 대중행동이나 대중투쟁의 가능성 측면에서 사람들에게 나쁜 시그널을 주었다. 이것을 엣사 1과 엣사 2의 성공과 비교해 보자. 이 둘은 대중 속에서 대중 집회나 대중 투쟁에 관해 극히 적극적이고 건전한 견해를 침투시켰다. 엣사 1과 엣사 2의 경험에 의해 필리핀 민중들 중 적어도 두 세대에 걸쳐 자신감이 강화됐다. 그것은 그들을 탄압하고 모욕하던 그 어떤 전제 군주도 단결하여 타도할 수 있다는 혁명적인 발상에서 나오는 자신감이다.

    엣사 3의 실패는 대중 속에 있던 이 확신과 희망을 무너뜨리게 했다. 만약 엣사 3에 의해 아로요 정권을 에스트라다 정권으로 교체시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좌파운동이나 대중운동에 해악을 끼쳤을 것인가? 다시 말해 위협에 직면한 아로요 정권이 좌파가 지지하면서 책임을 져줄 만큼 “그나마 나은 정권”이었던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키노 정권이 마르코스 정권독재에 비해서는 “그나마 나은” 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엣사 1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에스트라다도 아니고 아로요도 아닌”, 이라는 입장, 즉 진보적, 혁명적 세력 독자의 입장을 호소하는 방침을 취했던 것이다.

    미완의 혁명

    3번의 엣사 항쟁 모두가 여러 가지 주객관적 요인에 의해 완결되지 못한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모든 엣사 봉기의 객관적 한계는 정권의 자리를 차지한 한 개인의 타도에 목적이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3차례의 봉기 모두 부패한 자본주의 체제를 대신하는 포괄적인 대안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 한계는 이들 봉기에 참가한 대중의 정치적 내지는 계급적 의식의 낮음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모든 엣사 봉기에 있어 대중들이 지배계급이나 전통적 정치가의 대표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엣사 1에서는 민중들은 엔릴레(마르코스 정권의 국방장관)나 라모스(참모총장)와 같은 자들을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엣사 2에서는 도박왕을 자처하는 차빗 싱손(에스트라다의 절친이었으나 에스트라다 실각의 원인이 되는 내부 고발을 한)이나 에스트라다에 반대한 상원의원들에 대한 폭발적인 성원이 마련되었다. 엣사 3에서는 대다수 도시빈민층들은 에스트라다의 심복들과 낡은 정치가들을 자신들의 리더나 영웅으로 추대해 박수를 보냈다. 그것은 “푸어 파워(Poor Power)”의 슬로건과 “계급적 자각”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는 활동가들의 주장을 봉기의 참가자들이 배반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객관적 요인――엣사 대중의 정치적 의식이 낮음에 관계된――은 필리핀의 노동자계급 투쟁의 수준이었다. 광범위한 노동자계급(공업노동자, 도시민빈민, 농촌노동자)이 엣사 봉기에 참가했지만 지배적이고 압도적인 세력은 엣사 3를 제외하고는 이른바 도시 중간계층이었다. 지배 엘리트나 부르주아들의 리더십과 함께 그들의 압도적 존재가 타협적인 방향으로 봉기의 방향을 몰아갔다. 기도회 스타일의 집회 자체가 고위성직자나 타산적인 전통적인 정치가들과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대규모의 동원이나 집회에 결합시켜 성공하는 총파업과 같은 조직된 노동자계급의 참가는 어느 엣사에도 없었다. 엣사 1, 엣사 2의 경우, 몇 개인가의 노동조합이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대부분이 도시부를 기반으로 하여 전개된 엣사 봉기였지만 수도권 어디에서도 도시빈민층의 반란(과거에 가두 바리케이드 투쟁의 형태로 일어났던)을 고양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엣사 3 시위대에 대한 군의 습격에 의해 발생한 멘디올라 폭동은 5월 1일 저녁까지 진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1970년에 역시 멘디올라에서 있었던「1/4분기의 폭풍」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1/4분기의 폭풍」때는 도시부에서의 집회나 충돌, 전투들이 확대되어 점점 강력한 혁명운동을 형성해갔음에 비해 엣사 3는 한순간에 와해되어 형체도 없이 사그라져 버렸다.

    이들 모두가 주어진 기회를 포착하여 계급적 억압자들에게 도전해야 하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의식이나 각오 수준의 낮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엣사 봉기가 다양한 지배엘리트들의 리더십에 의해 일찍 주저앉고 말았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혁명적 이론가(『러시아 혁명사』의 레온 트로츠키)의 저술에 의하면, 부르주아가 정치권력을 잡게 되는 것은 그들이 혁명적이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라는 사실 그 자체에 기인한다. 그들은 교육, 언론, 전략적 포지션의 네트웍, 각종 관료기구의 지배층을 보유자산으로 가지고 있다. 그 점에서 노동자계급과는 천지차이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리한 입장을 모두 박탈당한 상태에서 떨쳐 일어난 빈민들은 스스로의 쪽수와 단결력, 그리고 간부와 조직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일련의 엣사 봉기에서 결여된 핵심적이고 결정적 요인, 즉 혁명적 지도성 문제에 맞닥트리게 된다.

    1986년 당시 최대의 좌익 조직인 필리핀공산당(CPP)과 그 외곽의 “민족민주주의” 전선조직 은 마오주의 노선에 의한 인민지구전 구상과 반독재투쟁에 있어서의 분파주의적 대응으로 인해 피플파워 혁명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필리핀공산당(CPP)은 엣사 1 때에는 극좌적 입장으로, 또 엣사 2에서는 기회주의적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오락가락했다. 엣사 2에서 「민족민주연합(NATDEM)〔필리핀 공산당의 외곽 대중조직〕은 대중동원을 선도한 이른바 “시민 사회”(현재 필리핀의 NGO나 사회민주주의 그룹이 엣사 2의 참가자를 가리켜 쓰는 용어)의 일부로써 참가했다. 이후 에스트라다 정권을 대신해 글로리아 아로요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거나, 2001년 3월 14일의 선거에서 아로요파 후보를 추천하는 등, 혁명성을 송두리째 포기했다. 공정성을 기해 말하자면, 그들은 선거후 태도를 180도 바꿔 “미국-아로요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 선회했다.

    이러한 커다란 한계와 약점들이 모두 엣사 항쟁 패배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엣사 항쟁은 참가자의 정치적 · 계급적 의식의 저급함과 노동자계급투쟁의 미약함, 그리고 혁명적 지도성의 결여로 인해 완결되지 못한 미완의 혁명이었다.

    우리가 이들 내재적인 한계와 약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대중의 정치적 · 계급적 의식을 고양시키고 노동자계급이 억압자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각오와 능력을 높여나가는 한편 투쟁을 견인하는 힘의 강화를 가로막고 있는 진보운동의 분열의 고착화를 극복할 때까지 이러한 피플파워 봉기는 불공정하고 부패한 체제 전체를 변혁하지 못하고 체제의 당번병을 교체하는데 머무르게 될 것이다.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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