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 팔자?
    사회적 공포감의 개인화
        2016년 05월 17일 10: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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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늘 놀랄 수밖에 없는 것 중의 하나는, 다수가 지니는 “운명”에 대한 궁금증과 “개선에의 욕망” 같은 것입니다. 남녀, 노소, 빈부, 심지어 보혁의 구별을 떠나서, 거의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각종 형태의 “팔자”를 믿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지니는 통념으로는, 이 팔자를 일단 알아보기부터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알아보는 방법은 천차만별이지만 굿해서 나오는 신탁이나 공수 아니면 대체로 관상이나 역술 같은 것입니다. 한데 알아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팔자 고치는” 것이야말로 이 “운명에 대한 욕망”들의 꽃이라면 꽃이죠.

    굿해서 천지신명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기와불사를 해서 불보살의 가피력을 얻고, 삼천배를 드려 업장소멸하게 하여 만사형통케 하고, 하나님께의 기도와 십일조의 확실한 납부로 신의 은총을 입고…

    “가피력”과 “은총” 사이의 각종 뉘앙스 차이는 있지만, 이런 다양한 종교적 행태들을 뒷받침하는 기복적 믿음은 크게 봐서 하나입니다. “운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믿음의 시작이고,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해서, 그 힘과 에너지 (삼천배 드리는 정성) 내지 물질 (불전, 성금 등등)의 교환거래를 통해서 “운명”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 믿음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이 믿음은, 과학적 차원에서 본다면, 검은 고양이가 당신 앞에서 길을 횡단할 경우 꼭 불길하다는 러시아의 민간 미신 이상의 합리성을 지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불멸의 영혼의 존재처럼, “운명”의 존재를 논하자면 아예 이성이나 과학 내지 학술의 영역을 벗어나야 하죠.

    인간의 미래를 결정짓는 요인들이 그저 무수히 많기 때문에, 그 총체적 집합으로서의 “운명”을 안다는 것은 우주 속의 개미 같은 인간으로서는 단순히 불가능할 뿐입니다. 예컨대 도심에서 가장 큰 위험요소는 아무래도 “자동차”인데, “내”가 횡단할 모든 길들을 달릴 모든 운전자들 중에서 졸음운전을 하여 “나”를 쳐 사망 내지 부상시킬 사람이 있을 정확한 가능성을, 그 어떤 합리적 방법으로도 계산 못하죠.

    물론 인간 각자의 삶을 결정짓는 요인들의 영향력 경중을 우리가 알 수 있기에, 그 요인들을 주목해서, 각자의 앞날을 대략 추측할 수야 있습니다. 가장 큰 요인은? 바로 태내 및 유아기의 산모의 생활양식과 건강, 그리고 무의식 속에 평생 저장될 1-4살 때의 경험들입니다. 4-5살까지 두뇌의 핵심적 부분들이 다 충분히 발달되니까 그 때까지 유아에게 입혀진 손실을 나중에 교정하기가 아주 힘들죠.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당신의 어머니가 임신한 시절에 담배나 술에 손을 댔다면, 그리고 유아기에 충분한 영양 보충을 받지 못했거나 무관심, 애정 부족 내지 학대에 노출됐다면, 당신의 “운명”에 문제가 많을 것을, 굳이 굿을 하지 않고서도 다 알 수 있죠.

    임신 기간 때의 삶이나 유아기 아동에 대한 육아 방식은 대개는 학력/소득/거주지 등의 계급적 요소와도 유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통상 “운명”이라 생각하는 많은 부분들은 계급론적으로도 설명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태내/유아기의 삶을 다 알아도 각자의 미래를 결정짓는 요인들이 이외에도 다수 있기에 “운명”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는 난센스죠.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이미 5살 이전까지 이루어진 것들 중의 많은 부분을 아예 바꿀 수 없지만, 굳이 바꾸자면 삼천배나 철야기도보다 훨씬 좋은 방법은 아마도 심리치료 정도일 것입니다. 당신의 행동을 알게 모르게 결정짓는 당신의 무의식/저의식 속을 들여다 볼 수 있고 당신의 공포감, 콤플렉스, 본인이 잘 모를 수 있는 욕망의 지형도를 그릴 수 있다면, 그걸 의식해서 바보짓을 덜 하고 조금 더 현명하게 살 수 있고 결국 더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죠.

    가령, 내가 어렸을 때에 나를 압박했던 부모 내지 다른 보호자의 권위에 지금도 무의식 속에 눌러 있으며 그것 때문에 상위자에게 내 권리주장이나 의견개진을 제대로 못한다는 걸 스스로 알면,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주위와 보다 평등한 관계 설정을 위해 분투해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더 주체적이고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인간으로 거듭날 수도 있죠. “팔자 고치기”는, 과학적으로는 대체로 이 수준까진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의 “팔자”가 우리 두뇌 속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말씀이죠.

    그러니까 점집이나 교회, 절, 굿당에서의 의례 등등은, 사실 물로 주사를 놓는 것과 똑같은 행위죠. 점을 쳐서 알 수 있는 것은, “운명”이라기보다는 당신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볼 점 전문가의 당신에 대한 판단 정도입니다. 대개는 점과 같은 일을 보시는 분들은 타자 심리 판단에 능하고,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 등의 결과가 얼굴 표정이나 태도, 자세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그런 전문가가 고객을 보는 순간에 상당히 많은 것들을 알아챌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예컨대 자세에 자신감 없고 얼굴에 근심걱정이 훤히 보이는 중년의 주부라면? 부부갈등/가정문제/가정위기 아니라면 자녀 대입/진로, 대체로 둘 중의 하나겠죠? 문제는, 그런 분들은 진단을 잘 해도 치료를 할 줄 모르고, 대체로 돈 받고 희망을 좀 주거나 공포감을 더 주어서 돈을 더 뜯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수의 한국인들이 이와 같은 방식들을 가지고 “운명”을 알아보고 고칠 수 있다고들 믿죠?

    사회적 공포감의 개인화

    권력과 돈의 갑질로 이루어지고, 국가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모든 문제의 해결이 가족 내지 개개인에게 떠맡겨져 있는 사회는 공포감의 사회죠. 위험사회 속에서의 이런 종합적인 불안, 공포 심리는, 개개인의 레벨에서는 “액운”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집니다. 즉 사회적 공포감이 개인화되는 거죠.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에 대한 믿음은, 자본/권력 본위의 사회, 즉 피통치자들이 매우 무력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의 개개인의 무력감을 반영합니다. 신분이 이제 거의 세습되고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에 사회적 서열에서의 그의 위치가 사실상 대략 정해진다면, 같은 논리 선상에서 왜 타고난 “운명”을 못 믿겠어요? 그렇게 해서 피착취, 피억압 상황이 합리화되고, 각종 갑질의 피해자들이 “내 팔자야” 하면서 스트레스 호르몬을 덜 분출하면서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는 것이죠.

    그리고 초자연적 힘에 의한 “운명 교정”에 대한 믿음은, 획일화된 위계서열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한 가지 숙원을 반영합니다. “맨 위에” 있는 “보스”와 어떻게든 “인연”을 맺어 공을 잘 들여 싹싹 빌어 “벼락출세”의 기회를 얻어 보려는 숙원이죠.

    대통령이 “수첩 인사”로 이름을 날리고 학교든 기업이든 과잉충성을 늘 보이는 가신형 인간들부터 “팔자”가 좋아 보이는 세상에서는 빌어서 안 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통념인가 봅니다. 관세음보살이든 예수님이든 땅콩사장형의 악질 자본가든, 일단 “윗분”에게 빌어서 나쁠 게 없다고 보는 사회 속에서는 기복적 기도는 대유행을 할 수밖에 없겠죠?

    “운명”에 대한 신앙은 그저 우리 공포와 불안, 사회적 위계질서의 내면화, 권위와 권력에의 복종의 내면화, 그리고 각종의 욕망의 “거울”일 뿐입니다. 이 신앙이 비합리적인 만큼 이 신앙을 배태시킨 사회 자체도 비합리적이죠. 이런 류의 신앙을 낳는 개개인의 심적 병리들은 크게 봐서는 사회적 병리와 직결돼 있습니다. 실제로는 “운명”은 없습니다. “적응”의 미명하에 복종/굴종을 선택하고, 자신의 선택을 이렇게저렇게 합리화해보는 약한 개개인이 있을 뿐입니다. 참 슬픈 그림이죠….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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