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이버와 고용 불안정
    [왼쪽에서 본 F1] 개인에게 책임 전가하는 시스템
        2016년 05월 17일 09: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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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F1 드라이버라는 자리는 ‘파리 목숨’에 가깝습니다.

    최근 레드불이 손바닥 뒤집듯 드라이버 라인업을 바꿔버린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F1 최대 팀 중 하나이면서 신흥 강호를 대표하는 레드불은 5월 초 다소 충격적인 발표를 했습니다. 레드불 소속 드라이버 다닐 크비앗을 자매 팀이지만 하위 팀이라고 할 수 있는 토로로쏘로 강등시키고, 토로로쏘의 10대 드라이버 막스 베르스타펜을 레드불로 승격시킨다는 발표였습니다.

    시즌 중 드라이버 교체 자체가 흔하지 않은 일이고, 몇 주 전 크비앗이 레드불 드라이버로는 2016년 처음으로 시상대에 올랐다는 것을 생각하면 레드불의 결정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베르스타펜이 차세대 챔피언 후보 0순위로 꼽히는 천재적인 드라이버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이제 만 18세에 불과한 네덜란드 출신의 막스에겐 아직 경험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기 때문입니다.

    베르스타펜의 승격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더 큰 문제는 러시아 출신의 크비앗에 대한 레드불의 태도였습니다. 크비앗은 강등을 통보받고 일주일이 지난 후 기자 회견에서 자신이 강등된 이유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조금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마치 회사에서 징계를 받아 분명히 더 좋지 않은 자리로 전출 발령을 받았는데, 왜 그런 조치가 이뤄졌는지 충분한 설명이 없는 경우와 같습니다. 공문서로 설명하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구두로 충분한 설명도 하지 않은 것은 가혹하기도 하고 합리적이지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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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러시아 그랑프리 직후 자리를 바꾼 크비앗과 베르스타펜 ]

    도대체 왜 F1 드라이버의 강등이라는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가 이렇게 대충 처리될 수 있는 걸까요?

    이유는 F1의 특수한 고용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직종, 다양한 사업장에서 여러 가지 계약과 고용 관계가 존재하고 다들 나름의 특징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스포츠이자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면서, 첨단 전문 기술을 다루는 특수 산업인 F1의 특성까지 생각하면 F1 드라이버의 계약과 고용 관계는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F1 드라이버의 계약과 고용 관계가 큰 문제를 안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일자리가 매우 적은 숫자로 한정돼있고, 고용주에게 절대 권력이 보장돼있다는 것입니다. 일부 최정상급 드라이버를 제외하면 팀과 1대 1로 당당히 자신의 계약 내용을 협의하는 것조차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전 세계 모터스포츠가 형성하는 피라미드에서 최정점에 있는 F1의 드라이버가 되는 것은 모터스포츠에 일생을 바친 모든 이들의 꿈이기도 하므로, F1 드라이버를 선택할 권한을 가진 기업 – F1 팀은 독점적이고 큰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됩니다.

    이번 레드불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현재도 대단하지만, 곧 대성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유망주에게 기회를 주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베르스타펜이라는 약간의 불안 요소를 안고 있는 젊은이를 상위 팀의 두 개밖에 없는 자리 중 하나에 앉힌 그들의 도전을 칭찬까지 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크비앗을 너무 소모품처럼 취급했다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크비앗에게 그렇게 대했다면, 다른 누구라도, 심지어 베르스타펜이라도 언제든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도대체 계약이 어떻게 되어 있길래 저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질문하는 독자도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경우에는 크비앗과 레드불 팀 관계자의 인터뷰 내용에서 유추해보자면, 상위 팀 레드불과 하위 팀 토로로쏘 사이에 드라이버 결정과 이동은 전적으로 레드불의 결정 사항인 것으로 보입니다. 불공정해 보인다고요? 맞습니다. F1의 대부분 계약은 어느 정도 불공정 계약에 가깝습니다. 독점적인 지위가 불공정 계약을 만드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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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호주 그랑프리의 뜨거운 감자였던 반데가르데 ]

    안타깝게도 불공정 계약이라도 지켜지면 다행입니다. F1에선 드라이버와의 계약이 휴지조각이라는 말이 있는데, 지난해 2, 3월, 자우버 F1 팀과 드라이버 귀도 반데가르데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은 이런 휴지조각 같은 계약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팀 운영과 생존이 쉽지 않은 소형 F1 팀들은 여러 드라이버와 중복 계약을 맺곤 했습니다. 드라이버들은 일생을 바칠 기회를 위해 어렵게 섭외한 스폰서를 F1 팀과 연결해주고, 바늘구멍 같은 틈을 찾아 F1 그랑프리에 출전할 기회를 얻어내려고 노력합니다. 반데가르데도 그런 계약을 맺고 2015시즌 자우버의 드라이버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비슷한 계약을 맺은 드라이버가 세 명이 더 있었고, 자우버의 낙점을 받은 것은 반데가르데가 아닌 다른 두 드라이버였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하소연할 길이 없어진 반데가르데는 자우버를 계약 위반 혐의로 고소해 일반 법정의 판단을 요청했고, 법원에서 명백한 계약 위반 사실을 확인한 뒤 자우버의 자산을 동결하고 팀 대표를 구금하는 등 강력한 조치들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자우버는 백기를 들고 반데가르데와 합의를 이끌었지만, 법정에서의 승리와 자우버의 계약 위반에 대한 보상을 얻었을 뿐 결정적으로 F1 팀의 시트는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비슷하게 드라이버와의 계약을 휴지조각처럼 생각하는 다른 F1 팀에서도 반데가르데를 드라이버로 앉히겠다고 데려가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반데가르데라는 한 청년의 어린 시절부터의 모든 것이랄 수 있는 F1 드라이버가 되는 꿈은 영원히 물거품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런 불공정한 계약과 그 불공정한 계약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 관행은 F1에 오랫동안 뿌리내렸던 암적인 존재입니다. 당장 생존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드라이버들은 불공정한 계약에 묶인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것이 전통 아닌 전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일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 드라이버를 제외하면 모두가 같은 운명입니다.

    결국은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직무의 특수성이 어떻든 고용이 보장되고 합리적인 계약 관계가 유지되도록 하는 것은 모든 계약 주체의 책임입니다. 팀의 생존이 어렵다는 것이 결코 고용된 노동자들을 마구 대해도 된다는 면죄부가 되지 않습니다. 팀의 생존이 어려워진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려서는 안됩니다. 대형 팀에서 비교적 많은 연봉을 받는 드라이버거나, 육성 과정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투자를 했다고, 연봉을 많이 줬다고, 고용된 노동자를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구조조정이라는 허울 속에 기업이 어려워진 책임을 노동자에게 물으려는 부당한 움직임이 보입니다. 연예 기획사에서 투자해 키운 연예 노동자들에게도 투자금을 마치 담보처럼 여기는 이야기도 종종 들립니다. F1 드라이버의 불공정 계약과 부당한 대우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전체 시스템을 바꾸고 뿌리 깊게 박힌 왜곡된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이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물론 쉽지 않다고 그냥 내버려둘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당장 답이 보이거나 묘책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면서 조직이나 기업, 혹은 F1 팀의 생존과 성장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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