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옌데와 인민연합,
지금 우리에게 의미는?
[책소개]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빅터 피게로아 클라크/서해문집)
    2016년 04월 30일 09: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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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시킨 칠레 아옌데 대통령을 단독으로 다룬 평전이 국내 최초로 출간됐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는 아옌데의 집안 배경에서부터 의대생으로 민중의 처참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치활동을 시작한 시기,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도전과 좌절, 극복의 순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정권을 잃고 삶을 마감하기까지의 과정들을 담고 있다.

또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프리메이슨 활동과 연애관계, 취미활동 등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아옌데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했으며, 칠레의 근현대사와 아옌데 활동 당시의 주변 국제정세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또한 그가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세계에 남긴 유산을 점검해보면서 아옌데와 인민연합 정권의 사상 초유의 정치적 시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찬찬히 짚어본다.

선거로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의 이름 앞에는 ‘선거로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혹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쿠데타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대통령’이라는 수식이 붙는다. 이것들은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정치인과 그의 의미, 그리고 그가 살던 시대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체 게바라가 아옌데에게 선물한 《게릴라전 교범》에 남긴 “똑같은 목적을, 나와 다른 수단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살바도르 아옌데에게”라는 글귀처럼, 아옌데는 소련이나 쿠바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주의적 이상을 추구하려고 했다. 그것은 각각 현실에서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 소련과 쿠바 정권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적 대안이면서, 참고해야 할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당연히 미국과 칠레 기득권층에게 아옌데 정권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미국은 쿠바혁명과 아옌데의 집권으로 라틴아메리카에 불어 닥친 사회주의의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반아옌데 진영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칠레의 자본가와 기업인들은 파업과 시위를 조직했으며, 보수언론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칠레가 소련과 쿠바의 길을 갈 것이라며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어쩌면, 아옌데 정권이 버틴 만 3년이라는 기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옌데

연대와 통합, 분열과 좌절의 칠레 좌파 집권사

‘대통령제 국가에서 아옌데는 어떻게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선거로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라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세심하게 짚어봐야 할 부분이다. 양당제가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나라들, 기득권 세력과 보수정당이 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나라들에서 진보 정권이 집권하는 길에 연대와 통합 논의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칠레 사회주의 세력이 집권하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인해 그것이 좌절되기까지의 과정은 쉼 없는 연대와 통합, 분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아옌데는 1952년 대선에 사회당과 공산당이 함께한 ‘인민전선’의 이름으로 나섰고, 1958년과 1964년에는 사회당, 공산당 등이 모여 결성한 ‘인민행동전선’의 대통령 후보였다. 1970년에는 사회당, 공산당, 기독민주당 탈당파, 독립진보연합의 연합체인 ‘인민연합’의 후보로 대선을 치렀다.

“힘을 앞세워 일시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사람은 혁명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사회를 변혁하고, 사회적 화합을 모색하며, 나라 경제의 근간을 바꿔내는 사람은 혁명적이라 부를 만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혁명의 개념입니다. 근본적이고 창조적인 변혁 말입니다.”(96쪽)

1948년 의회 연설에서 밝혔듯이 아옌데는 평화적 방식을 통해 혁명적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집권 기간 내내 보수정당인 기독민주당과의 연대를 집요하게 시도했다. 인민연합에 참여한 정당들은 집권을 위해 힘을 합쳤지만, 집권의 목적은 저마다 달랐다.

인민연합 내부에는 옛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것이 목표인 이들이 있었고, 대선 승리를 점진적인 정책을 통해 변혁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방식이든 개의치 않고, 두 진영이 상호논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인민연합의 집권이 과반에 이르는 절대적 지지를 얻은 것도 아니었고, 의회에서도 기독민주당의 힘이 강력했던 상황에서 인민연합 내부의 갈등은 국내외의 압력에 시달리는 아옌데 정권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었다. 폭력혁명을 불가피하다고 보는 이들의 말과 행동이 언론을 타고 칠레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고, 기독민주당과의 협력을 가로막았다.

그 어떤 정치세력도 의회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독민주당과의 연대는 필수적이었으나, 인민연합 지도부는 아옌데의 그러한 제안을 거절했다. 이 거절은 이후 아옌데의 입각 제의에 대한 기독민주당 지도자의 거부로 이어졌고, 인민연합과의 협력을 주장한 기독민주당 좌파 세력은 점점 힘을 잃기 시작했다.

1971년 상원 보궐선거에서 기독민주당과의 협력을 위해 후보를 출마시키지 말고 기독민주당 후보를 지지하자는 아옌데의 제안도 거부되었다. 사회당은 독자후보를 출마시켰고, 우파의 지원을 받은 기독민주당 후보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이는 기독민주당의 우경화를 촉진시켰고, 결국 기독민주당 우파에 밀린 좌파 세력은 탈당을 한 뒤, 기독좌파당을 창당해 인민연합에 합류했다. 이들은 인민연합과 기독민주당의 협력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다. 아옌데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연대의 실패는 큰 걸림돌이 되었다.

진보 정권을 누가 무너뜨렸나?

한번은 부유한 우파 신문사주가 아옌데가 요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절대다수 칠레인들은 요트를 구경조차 하기 힘든 시대였다. 아옌데는 즉시 별장에 보관하고 있던 소형 보트를 산티아고로 싣고 오게 한 뒤, 산티아고 중심가 불네스 광장의 분수대에 띄웠다. 그날 오후 항의 시위를 위해 30만 명가량이 광장에 운집했다. 연단에 올라선 아옌데는 분수 위에 떠 있는 자신의 ‘요트’를 가리켰다.(120쪽)

왠지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상황은 1958년 칠레 대선 당시에도 벌어졌던 일이다. 이처럼 집권 이전에는 물론이고, 집권 이후에도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미국과 칠레 기득권층의 공격은 전방위적으로 집요하게 펼쳐졌다. 특히 아옌데의 구리산업 국유화는 미국 정부와 구리 회사를 격분시켰다. 미국의 구리 회사 아나콘다는 전체의 16.6%만 투자하고도 전체 이윤의 79.2%를 칠레에서 거두고 있었다.

미국은 반아옌데 세력에게 “꿈도 못 꿀 정도의” 자금을 제공했으며, 반아옌데 언론사를 지원하고 육성했다. 소련과 쿠바가 칠레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며 여론을 선동했고, 정치협상을 어렵게 만들었다. 미국 기업들은 부품 공급을 중단해 칠레의 중요한 운송수단인 트럭운송이 마비되었고, CIA와 기업가들의 매수로 트럭운수업자들은 ‘자본가 파업’을 일으켰다. 또한 미국은 비축해두었던 구리를 방출하여, 칠레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구리의 수출량이 22.2% 줄었다.

칠레의 기득권 세력은 시위를 조직하고 폭력사태를 방치했으며, 추가적인 국유화에 대비하여 외국으로 자금을 빼냈다. 아옌데 정부는 국유화된 구리 광산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없었다. 인민연합 내 공산당과 사회당, 그리고 아옌데 정부의 의견이 각기 달랐고, 정치적 대립의 심화와 외세의 개입, 경제봉쇄가 겹쳐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지금, 아옌데와 인민연합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3년이라는 짧은 집권 기간 동안 아옌데 정부가 남긴 유산은 적지 않다. 아옌데가 역점을 두고 추진한 구리산업 국유화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칠레 경제의 튼튼한 젖줄이 되고 있다. 또한 기존에 진행되던 토지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칠레 자영농의 힘을 키우고 농업경쟁력을 향상시켰다.

외교관계에서는 미국이 장악한 국제체제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주고, 60세 이상에게 연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복지정책을 추진했으며, 사회보험 적용을 늘리고 전기와 수돗물 공급 확대를 추진했다. 이 밖에도 공직자의 투명성과 인권 증진, 서민 보호, 인프라 확보 등을 위한 광범위한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비록 쿠데타로 인해 아옌데 정권은 무너졌지만, 세계 곳곳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아옌데의 유산을 들춰보고 있으며, 2000년 이후 집권한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은 인민연합과 놀랄 만큼 흡사한 정책을 추진했다. 칠레에서는 특히 교육과 공공서비스 개선 예산 확보 방안으로 천연자원에 대한 공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번졌으며, 극심한 불평등을 해결하고 부의 재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세계적으로 커져갔다.

아옌데가 ‘다른 방식’의 혁명을 꿈꾸었다고 해서 그를 ‘개량주의자’로 폄하하는 시선도 일부에 있었다. 하지만 아옌데는 평생을 사회변혁과 자본주의 체제 탈피를 꿈꾸었다. 그는 적대세력을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키고 싶어 했고, 다른 나라의 혁명 과정이 치른 혹독한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든 피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그의 노력은 이후 어디에선가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아옌데 정부의 붕괴를 통해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전 세계 좌파 진영은 교훈을 얻고자 했으며,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옌데의 패배는 제국주의의 좌파 정부에 대한 대응방식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또한 선거를 통한 혁명 세력의 집권이 가능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 한편으로 혁명적 과정을 효과적으로 방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도 강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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