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바이, 페레스트로이카
    [필리핀 좌파운동] 북한, 중국, 소련
        2016년 04월 27일 10: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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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사정으로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 연재를 2달 정도 중단했었다. 다시 재개한다. 번역자 등 연재글을 위해 노력했던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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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기와 슬픔의 과거’ 링크 

    제19장 헬로 페레스트로이카! 굿바이…

    필리핀 혁명운동이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대량 학살한 1988년의 잠입프락치 색출작전의 광기가 지나간 후인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국가들의 붕괴가 필리핀 혁명운동뿐 아니라 전 세계의 좌파에게 충격파를 불러일으켰다.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는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폴란드에서 시작되어 헝가리, 동독,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로 도미노의 물결이 이어졌다. 루마니아에서의 공산주의 체제의 전복은 폭력적인 것이었다. 1990년에서 91년에 걸쳐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는 공산주의를 버렸고, 유고는 1992년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5개 독립국으로 분열됐다. 그리고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어 러시아, 그루지아, 카자흐스탄, 라트비아 등 15개 독립국으로 나뉘어졌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격동의 시기에 나는 네덜란드에 있었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동지들이 1988년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있을 때, 나는 국제 활동 부문으로의 배치전환을 희망했다.

    국제 활동을 담당하는 그 위원회는 「홈 사무국」(the Home Bureau)이라고 불렸다. 나는 1989년말 네덜란드의 유틀레히트에서 다음 임무를 대비하며 대기 중이었다. 그 임무는 쿠바에 필리핀 공산당 외곽조직인 민족민주전선(NDF)의 지국을 설립하고, 하바나에 지국이나 사무소를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정당들과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유럽과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위기에 빠지는 바람에 나의 쿠바행은 연기되었다. 얼마 후 쿠바 지국 설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됐다.

    1989년 11월 12일, 나는 다른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유틀레히트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TV로 지켜봤다. 모두가 이 예기치 못한 사태 앞에서 당황했다. 어떤 동지는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또 다른 동지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좋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동서의 베를린 시민들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그 어느 쪽이 좋은지 비교할 수 있게 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의 붕괴는 유럽 좌파 내에서도 주요한 문제였다. 호세 마리아 시손이 이끄는 유틀레히트의 필리핀 공산당과 민족민주전선도 이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1977년에 체포되어 투옥된 시손은 9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1986년 코리 아키노의 집권 후 사면되어 석방되었으나 1987년 멘디올라 학살 사건 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얼마 후 페레스트로이카의 제반 현상과 무너져가는 공산주의에 대해 연구하는 팀이 만들어졌다. 나는 그 팀의 일원이 되었으나, 일련의 사태들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팀 내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통일된 견해를 도출해내지 못했다.

    한편 시손은 공산주의의 붕괴는 “CIA의 공작”과 동유럽 공산당의 “수정주의”에 의한 것으로, 그 프로세스는 브레즈네프로부터 시작해 고르바쵸프까지 이어졌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시손의 주장은 1991년에 발표되어 논쟁을 불러일으킨 필리핀 공산당의 문건, 『우리 기본 원칙의 재확인과 오류의 정정』의 세계정세 항에 담겨졌다. 1993년에 필리핀 공산당을 분열로 이끈 논쟁의 하나는, 세계 곳곳에서 진행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프로젝트가 파탄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1990년에 내가 마닐라에 돌아왔을 때, 필리핀 내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필리핀의 운동은 지극히 내향적이어서 필리핀 섬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필리핀 사람이 연루되거나, 운동에 있어 해외로부터의 지원에 영향이 발생하거나 하는 따위에 국한되어 있었다.

    국제연대에 관한 필리핀 공산당의 구상은 다음 두 가지 과제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필리핀의 투쟁에 대한 지원을 전 세계 운동권과 민중들 사이에 만들어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전 세계에서 미제국주의의를 타도하는 투쟁의 일환을 담당하기 위해 국내에서의 투쟁을 끈질기게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들 과제는 필리핀 공산주의자들의 민족주의적, 그리고 반제국주의적 정열의 표현으로 칭송되었으나, 실제로는 공산당 조직의 분파주의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고, 공산주의 운동은 전 세계 노동자들의 연대에 입각해야 한다는 견해는 어디로 간 것인가? 혁명투쟁은 민족해방투쟁의 단순한 축적이 아니라 국제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많은 동지들이 마음속에 수많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CIA의 공작”이라든가 “수정주의 사상”을 원흉으로 지적하는 필리핀 공산당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 쓴 몇 개의 논문을 배포했다. 그것은 지하출판물, 즉 소련공산당 정치국이나 특권관료의 공식견해를 비판하여 소련 내부에 퍼진 이단파의 문서였다.

    나의 지하 출판물은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이나 동유럽 국가들에서 자본주의의 부활을 주요한 목적으로 하고 있고, 공산당과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를 위해 행해지고 있다고 하는 견해를 반박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것은 페레스트로이카(구조개혁)나 글라스노스트(정보공개)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개선하고, 공산당의 관료적 지배를 약화시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재구축하려는 의식적인 시도이다.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자 소비에트연방공화국 대통령이기도 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입안자였지만, 실현시키려 하는 제반 요구와 이상은 젊은 공산당 지도자들이나 당원에 의해 발의된 것으로, 그들은 당이나 국가의 관료주의적 체질과 미국이 주도하는 선진자본주의의 경제발전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공산당의 무능력에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은 당의 관료주의를 소비에트연방이나 동유럽에서가 아니라 북한에서 목격했다. 마침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발발해 학생들의 저항에 대한 대학살이 있었던 직후인 1989년 중반 경, 나는 필리핀 대표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 방문

    1989년의 북한 방문은 김일성 주석의 초대에 의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아직 “친애하는 지도자”의 지위에 머무르고 있었고, 소문에 의하면 궁중에서 분방한 독신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초대는 김일성의 남북한 통일 제안에 대한 지지를 확산시키고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북한 혁명의 기초이자 사회주의 건설의 지침으로 간주되는─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과 아프리카 각국, 캐나다, 필리핀, 기타 지역에서 버스 3대분 정도의 대표단이 참가했다.

    우리는 평양과 인접한 도시를 행진하기도 하고 버스와 항공편으로 여러 곳을 방문한 후, 마지막으로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비무장지대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미군이 패트롤하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우리는 여러 식전이나 행사에 초대되었다.

    우리는 5성급 국영호텔에 숙박했는데, 외출은 북한 가이드 없이는 허용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우리는 호텔에 배달되는 영자 신문을 읽었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다음과 같은 기사 내용을 떠올리며 웃곤 했다. 그것은 매일같이 영자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최고지도자” “위대한 영도자” “탁월한 지도자” 등등의 수식어와 김일성이 어디어디를 방문하여 인민들을 격려했다는 머리기사였다.

    마지막 저녁식사는 사치스러운(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인민공회당에서 열려 100여 가지 종류의 음식과 수 갤런의 알콜이 나왔다. “인민공회당”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그곳은 외국의 수상이나 국빈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호화로운 건물은 높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여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내부가 북한산 대리석으로 장식된 멋진 건축물이었다. 연회장은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고, 화장실도 사방이 거울로 장식된 넓은 방으로 화장실 안에서 미아가 될 뻔했다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을 정도였다.

    100여 가지의 요리가 15분 간격으로 나왔는데, 그 사이에 나는 북한 가이드와 얘기를 나누었다. 가이드에게 맑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주의를 공부했냐고 묻자 그는 주체사상은 맑스, 엥겔스, 레닌 이론의 최고 정점을 이루는 것이므로 주체사상만 공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 만찬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이 계획한 것으로, 김정일이 서구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서방측 손님들에 대한 접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고 얘기했다. 밤이 되어서야 나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이윽고 해가 지자 전통예술 공연에 이어 여성들로 구성된 록밴드가 북한과 서방측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수많은 북한 여성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녀들은 한복이 아닌 몸에 착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대표단의 남자들은 여성들에 이끌려 짝을 지어 홀의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 춤추기 시작했다. 다음 날 들은 소문에 의하면 주최자의 지시로 몇 명인가의 남성들 방에 그녀들이 따라 들어갔다고 한다.

    북한 체재 중에 우리는 빈곤의 흔적을 눈꼽만큼도 볼 수 없었다. 우리들은 가이드 입회 하의 투어만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평양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의 설계에 의해 전 시가지가 마치 고층빌딩이 점재하는 광대한 정원과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현재 이들 빌딩에는 병사나 그 가족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평양의 메인스트리트를 행진하고 있을 때, 빌딩에 사는 사람들이 연도에 줄지어 있었지만, 묘하게 통제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그 움직임에는 군대와 같은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피해망상증의 북경

    평양을 출발한 우리는 북경까지 열차를 탔다. 열차가 중국령에 이르자 일단의 인민해방군 병사가 올라타 우리가 탄 차량을 검사하고 우리가 북한에서 찍은 비디오를 압수했다. 천안문 사건에 관한 불법 비디오가 반체제 인사들의 손에 의해 돌아다니고 있어 비디오의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북경의 첫인상은 쇠락한 느낌이었다. 철도역은 어수선했으나 역 사무실에는 인기척이 없었고 역무원의 안내도 일체 없었다. 북경에 있는 우리의 연락원에게 전화를 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공중전화 부스의 전화번호부가 찢겨 거리에 나뒹굴고 있는가 하면 아예 쓰러져 있는 전화 부스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역사 지붕의 전광판에서는 마돈나가 노래하며 춤추고 있는 모습이 흘러 나왔다. 중국어로 된 책이나 잡지를 팔고 있는 가게 앞에 긴 행렬이 늘어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매점에서 팔고 있는 포르노잡지를 사려는 사람들이었다.

    역 근처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한 학생을 만났다. 그는 가이드료를 받고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유명한 관광호텔을 포함해 관광지는 천안문 사건 이후 폐쇄되어 있다고 알려주었다. 배가 고팠기 때문에 레스토랑으로 데려다 달라고 우리는 말했다. 택시를 탔으나, 군에 의해 봉쇄된 천안문 광장을 멀리 우회해야 했다.

    유일하게 열려있는 레스토랑은 광장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국영식당이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가게는 막 문을 닫으려하고 있던 참이었다. 주방장은 이미 노동시간이 끝나 음식을 내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런가? 당신이 자본주의적 이윤이라는 동기를 폐절하고 얻은 성과라면 그것도 괜찮겠지, 이 주방장은 돈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락을 판단의 기준으로 하여 결정한 것일 거라고 우리는 생각하기로 했다. 우려곡절 끝에 우리는 겨우 호텔에 도착했으나 호텔에서도 식사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한 동지의 짐 속에 남아 있던 비스켓을 나눠 먹어야 했다.

    우리는 열차로 북경을 출발해 홍콩으로 향했다. 다음 날 홍콩역에 도착하자 천안문 광장의 학살 희생자 포스터가 역 구내에 붙어 있었다. 그 무렵, 중국 학생들에 대한 연대 지원운동이 대단히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는 산발적으로 집회가 개최되어 유인물이 뿌려지는가 하면 곳곳에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1990년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지하 출판물을 썼을 때, 나는 북한의 관료주의와 획일적인 당과 국가체제, 그리고 중국에 있어서의 학생과 지식인 계급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떠올렸다. 그래서 더욱 사회주의 사회의 개혁을 목표로 하는 페레스트로이카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페레스트로이카는 자본주의로의 회귀를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사실 나는 페레스트로이카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아주 잠시 동안, 페레스트로이카는 사회주의를 새로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희망의 빛을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곧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자본주의국가로의 변질로 유혹하고, 소국 분할주의가 머리를 들기 시작해 몇 개인가의 독립국이나 공화국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나는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문제나 경제 영역에 있어 과도적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신사고”를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개혁 중에는 생산 · 분배의 완전집중화나 완전한 계획경제 등 시기상조의 정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책이 경제의 정체를 야기하고 “현존사회주의”(좌파 중에는 사회주의의 맑스적 개념과는 다른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이러한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가 자본주의를 대신할 수 없는 실행 불가능한 대안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고르바초프에게 무엇이 일어난 것일까.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추진한 것이 그가 구 소련의 CIA 공작원이었기 때문이라거나, 거대 독점은행(IMF-세계은행)과 제국주의 세력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쉽게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권력을 쥐고 경제적 · 정치적 이권을 배분하는 소위 노멘클라투라, 즉 공산당 정치국원이나 특권 관료, 당 지도부도 함께 추진한 이 변화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고르비는 휘말려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규모의 민영화를 통해 민영화된 기업의 대주주가 되어 거기서 이익을 얻는 자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오늘 날 러시아의 자본가의 선두주자들을 보면 대부분이 옛날의 특권 관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분석을 오늘의 중국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극도로 관료화된 자본주의의 형태는, 민간자본과 기업의 이익이 당 기관과 고급간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부유층, 초부유층과 1억5천만 명을 넘는 신중간층으로 이루어진 계층은 당 간부나 경영자나 전문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설령 정치와 경제에 있어 “통제된 민주화”를 어떻게 실시하는가를 둘러싸고 내부 대립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야말로 지본주의화의 지향성과 함께 장기적인 일당 지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강력한 지원세력인 것이다.

    위로부터의 페레스트로이카

    바로 이런 점에서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장 큰 약점이 위로부터 강요된 개혁운동이라고 하는 점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약속된 일련의 개혁은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적 특권을 향유해 온 관료들에게 강탈되어 버렸다.

    1991년에 페레스트로이카의 개혁에 저항한 이른바 “강경파” 의 구테타가 기도되어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에서 일시적으로 해임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고급 별장에 있었다. 별장 외에도 당 정치국원은 수입품의 특별 재고가 있는 고급 점포에서 쇼핑을 하는가 하면, 외국 통화나 달러 등을 입수하고 호화로운 리조트에서 체재하거나 자신들의 자식들을 일류 학교에 보내는 등 정부나 당에서의 지위로 인해 얻는 여러 가지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노동자계급이 대중적으로 궐기해 자신들의 손에 권력을 장악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몇 군데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연발생적인 봉기가 일어나 수만 명의 대중들이 가두로 나와 정부청사를 포위했지만, 우리가 필리핀의 제 1차 피플파워, 그리고 제2차 피플파워에서 경험한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은 특권계층(이전의 당 관료, 즉 개혁되고 재편되어 명칭만 바꾼 공산당)에 인계되어 진정한 개혁을 바라는 대중의 희망은 봉쇄되고 말았다.

    “현존사회주의”가 취약한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취약한 자본주의국가로 전환한 것의 본질을 대중들이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한계점이나 약점이 무엇이든 간에, 현존사회주의는 국민 대중에게 부여된 사회복지 급부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세계의 가장 앞선 복지국가조차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사회복지를 법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완전고용, 무료 주택, 전국민 의료보험제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이 다른 나라보다 앞선 사회주의국가에 있어 사회복지는 법률로 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지방평의회나 중앙정부에 의해 실제로 제공되고 있었다. 따라서 구 동독 사람들이 동독이 붕괴되고 통일된 자본주의 국가 독일에서 2~3년간 생활해보자 질 좋은 상품들이 넘치는 풍요의 이면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주택도 부족하고 사회복지 급부를 상실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동독 출신 고령자들 사이에 사회주의로의 회귀를 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 보고되고 있다.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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