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철수는 '좌파'에게 무엇일까
        2012년 07월 30일 03: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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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한기님의 페이스북에 있는 글을 필자의 양해를 구해 레디앙에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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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히 ‘좌파’라는 틀로만 안철수를 보면, 영락없이 ‘우파’다.

    자본주의를 인정할 뿐더러, 그를 더 좋게 하자는 거니까.

    신자유주의를 부정하기보다는 제대로 작동하게 하자는 것으로도 보이고.

    그렇다면 좌파는 ‘보수’ 안철수를 거부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정답’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먼저 좌파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고,

    무엇이 좌파의 목소리를 뿌리내리게 하는 최선의 조건을 마련해 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필자 우한기씨


    왜 인민들은 좌파를 지지하지 않는가? 당위와 현실의 괴리들

     좌파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건이라면 흔히들,

    ‘삶이 너무나 고단하여 세상이 뒤집혀버렸으면 싶은 생각이 널리 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절로 좌파를 지지할 거라 보면 오산이다.

    이 만연한 ‘불안감’을 해소해 줄 만한 대안이 현실 정치에서 나타난다면

    ‘실력 없는’ 좌파에게 정치를 맡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가 못하는 것을 안철수는 파고들었고, 제대로 먹혔다.

    그리하여 좌파는 더더욱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좌파정치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전제들 

    정치든 경제든 ‘상식’이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잡았을 때,

    그리하여 누구나 제 이념과 정책을 표방하는 것이 존중받을 때다.

    이것은 정확히 ‘정치적 자유주의’ 내지 ‘진보적 자유주의’다.

    한마디로, 존중하고 존중받으면서 경쟁하는 시스템 말이다.

    내가 안철수에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다.

    “전쟁은 적을 믿으면 안 되는 것이고, 정치는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상대방의 궁극적인 목적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적을 믿으면서 싸우는 것, 기본적인 믿음은 가지면서 대결하는 것이 정치.”(91쪽)

    좌파가 대결 가운데서만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원론적이다.

    그것은 좌파의 성장에만 눈을 맞춘 것일 뿐, 왜 좌파운동을 하는지 그 근본을 저버린 판단이다.

    무엇보다 지금 현실은 대결할 만한 좌파조차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과학적 사회주의’의 영향 탓인지, 좌파에게는 일종의 강박이 있다.

    ‘경제적 문제 해결에서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강박 말이다.

    그 경제적 문제는 결국 대중의 삶의 안정 아닐까?

    내가 하나 남이 하나 결과적으로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면,

    실력도 없으면서 기어이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종의 고집일 게다.

    ‘노동의 가치가 구현되는 사회’를 표방하지만,

    지금 현실은 노동 가치는커녕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다.

    살인적인 노동과 살인적인 해고가 만연해 있고,

    전국 방방곡곡, 도시와 시골, 육지와 섬, 어디 하나 깃발을 내걸지 않은 곳이 없다.

    자본은 용역깡패들을 사병으로 고용하는데, 공권력은 이를 수수방관하는 지경이다.

    이것이 이념의 문제, 체제의 문제일까?

    한마디로, 자본주의든 뭐든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기기 위한 조건과 수단들, 이긴다는 의미 

    단언컨대 이 문제는 싸움의 현장에서 헌신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가 필요하고, 제대로 공권력을 행사할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장악하지 못하는 현실이라 해서 체념만 할 수도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할 ‘대리인’을 찾아 그를 힘껏 앞세우는 것도 배제해서는 안 되는 방안일 것이다.

    가난한 이웃이 정치에 무관심한 까닭은 무엇일까?

    제 가난과 제 억울함의 근원이 정치적인 데 있다는 걸 몰라서?

    아니다.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제 싸움이 허망하게 무너질 것을 뻔히 알기에,

    제 싸움을 지지해줄 어떤 정치세력도 없다고 여기기에,

    그런 판에 뛰어들었다가는 그나마 가진 것조차 다 잃는다 생각기에.

     좌파는 이 분쟁을 지지하고 북돋우는 데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아울러 분쟁이 당사자의 승리로 귀결되게 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승리의 경험만큼 정치적이게 하는 방도는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좌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 환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좌파는 싸움의 주제를 경제적인 데서 다른 가치로 바꾸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존재의 이유를 달리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인권, 생태, 평화, 여성…

    이를 위해서도 보편 복지는 필수적이다.

    먹고사는 것이 기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좌파가 추구하는 가치를 내세우는 것은 너무나 먼 얘기가 돼버린다.

    그러기에 대선 후보들의 복지 노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박노자식으로 이번 대선에 관심 없다, 는 말로 순결성을 자랑하는 것은 좌파의 본분을 망각한 자세다.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급조된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을 경계한다.


    좌파적인 것과 좌파적인 것과의 공존, 우리는 어디에 있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를, 어떤 세력을 통할 때

    좌파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을 건지를 판단하고 나아가 지지하는 것이다.

    이를 ‘타협’이라 해도 좋고 ‘투항’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분명히 하자.

    ‘좌파와의 공존과 경쟁’은 민주주의의 징표라는 점을 깨달아

    그를 실천하는 자만이 유일하게 ‘성공하는 지도자’라는 사실을.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 정치를 ‘불가역적으로 전환’시키는 길이라는 것을.

    따라서 그를 약속하고 실천할 만한 대안을 지지하는 것도 좌파운동의 길임이 분명하다.

    안철수가 확실한 대안인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나아 보인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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