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의 진보, 사회의 진보
    [왼쪽에서 본 F1] "진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며
        2015년 11월 18일 10:21 오전

    Print Friendly

    F1은 과학 기술 측면에서 봤을 때 가장 진보된 스포츠입니다. 인류 기술 발달의 최전선에 있다는 우주 개발과 비슷한 수준의 투자와 연구 개발이 이뤄지기 때문이죠.

    물론 각각의 세부 분야를 놓고 따져본다면 더 진보적이고, 더 앞서나간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큰 덩어리의 개념에서 본다면 F1만큼 기술적으로 진보된 무언가를 찾기는 힘듭니다.

    게다가 F1 무대에선 모든 것이 ‘실전’입니다. 아이디어가 나온 지 몇 달밖에 안 된, 첨단 기술이나 개념이 적용된 차량이 바로 실전에 투입됩니다. 실험실에서의 연구 데이터와 실제 길을 달릴 때의 상황 사이에 괴리가 크고, 애초에 연구 개발 비용과 실험 방법 등이 제한되는 규정 덕분에 실전이 곧 테스트가 되는 셈입니다.

    덕분에 F1 팬들은 일반 사회에서라면 듣도 보도 못한, 수십 년 후에나 나올 법한 기술이라는 것들을 공개적인 장송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F1이 과학 기술 면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얘기를 할 때면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과연 ‘과학 기술 면에서’라는 수식어를 빼고 나서도 F1이 진보적인 스포츠인가? 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부터 답하기가 쉽지 않죠. 인문 과학에서 얘기하는 진보와 과학 기술의 진보를 연관 지어 생각하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일반 상식에서 두 가지 ‘진보’ 사이의 괴리는 큽니다.

    [한 시대의 가장 진보된 기술을 집약한 F1 레이스카]

    [한 시대의 가장 진보된 기술을 집약한 F1 레이스카]

    그 때문인지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했다는 F1이라는 스포츠의 알맹이, 그 사회 정치적인 면을 보면 진보와는 거리가 상당히 멉니다. 이전 칼럼에서 다뤘던 것처럼 자본주의적이면서도 비민주적인 F1 팀과 운영 주체의 시스템은 어떤 면에서 봐도 진보적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사회 정치적인 진보와 과학 기술의 진보는 단어만 비슷하지 완전히 다른 얘기니까 관계가 없지 않냐고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F1은 ‘포뮬러 1’의 준말입니다. 포뮬러, 즉 규정으로 통제되는 전용 레이스카를 개발하고 만들어 경쟁하는 것 중 가장 상위의 스포츠라는 뜻입니다. 스포츠의 모든 부분이 규정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규정이란 것은 결국 사람이 정합니다. F1을 주관하는 FIA가 최종적으로 문서를 만들지만, F1의 운영사이자 절대 권력을 가진 FOM과 버니 에클스톤, 그리고 F1 팀 중 기득권을 가진 대형 팀들이 사실상 규정을 좌지우지한다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F1이 기술적으로 얼마만큼 진보할 수 있는가는 F1이라는 조직과 시스템의 정치적인 한계에 따라 정해집니다. 일반 사회에서 법과 제도의 한계가 기술 발전의 한계를 규정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F1은 기술의 첨단이 그대로 노출되는 스포츠다 보니 이런 한계 역시 일반 팬들이 쉽게 목격할 수 있다는 것 정도가 그나마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물론 ‘F1은 미래를 지향하고 발전한다’라는 명제나 ‘F1의 기술은 진보해야 한다’라는 명제는 누구나 인정합니다. 이 명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에 차이가 날 뿐이죠. 일반 사회에서 수구적인 사고에 얽매인 사람조차도 앞날을 준비하고 미래의 발전을 향해 나아간다고 얘기하곤 하니, 가장 진보적인 스포츠 F1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덕분에 기술 규정들은 제법 신기술에 대해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때로는 너무 과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듣습니다. 일반 승용차 기술에 적용이 쉽지 않아 보이는 최근(2014년)의 엔진과 파워 유닛 도입도 그런 예 중 하나입니다.

    최근 F1의 운영 면에서도 진보적인 변화가 없지는 않습니다. F1 팀 노동자들의 휴식을 강제하기 위한 의무 휴가 기간 도입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여름 휴가 기간으로 지정된 보름 동안은 공장과 본부는 완전히 폐쇄돼야 하고, 임직원 간 전화 통화와 e-mail을 주고받는 것까지 금지됩니다. 이렇게 강제로 쉬게 만들지 않으면 어떻게든 일을 하게 되니 조금은 과격한 규칙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그랑프리 기간에도 노동시간을 강제하는 규정이 생겼습니다. 가장 첨예한 경쟁이 펼쳐지는 그랑프리 주말에도 밤늦게 지정된 일곱 시간 동안 어떤 기술 작업도 금지됩니다. 아예 차고에 접근도 못 하게 하죠. 불가피한 상황을 위한 예외가 존재하긴 하지만 이 역시 일 년에 단 두 차례뿐입니다. 강력한 제한 덕분에 F1에서 야근이나 철야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습니다. 여름휴가를 강제할 때는 그나마 예외도 없으니 모두가 쉴 수밖에 없는 셈이죠. 전혀 진보적이지 못하다는 F1의 운영 시스템이 그나마 이 정도는 노동조건을 챙겨주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3)

    [2012 코리아 그랑프리에서 작업 중인 케이터햄과 르노의 기술진]

    그런데, 기술적인 면이든 운영 시스템적인 면이든 영원히 계속 진보적 태도를 고수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어제는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던 기술에 도전하다가, 오늘은 어느새 시대에 뒤처지고 옛것에만 집착하는 ‘수구’가 돼버립니다.

    어렵게 진보적인 신기술에 도전하는 것에 지쳐버리고는, 두고두고 현재의 규정대로 고정돼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어제 변화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이런 얘기하는 것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잘 굴러가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뭘 또 바꾸느냐?”는 얘기 말입니다.

    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구관이 명관’이었다며 옛날이 좋았다고 얘기합니다. F1이 가장 진보적이라 좋아했던 사람이, F1에서 구현된 신기술에 매료됐던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장을 바꿉니다. 다들 익숙해진 시스템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안 그런가 싶은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죠.

    이러다 보니 ‘F1은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테제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일부 사람들이 더없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그들이 규정을 바꾸고 또 바꾸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면 모두가 옛 추억에만 빠져 F1의 본질을 망각해버렸을 테니까요. 현재도 F1은 다가올 2016년은 물론 2017년의 획기적인 변화와 진보를 준비하며 기대를 부풀리고 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아쉬운 점은 이런 진보에 대한 의식이 기술적인 부분에만 한정된다는 점입니다. 다른 시스템에서는 구색을 갖추는 수준, 외부 사회단체와 일반인의 비판을 의식한 수준 이상의 진보적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F1의 조직이, 시스템이 더 진보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여느 사람 사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제도와 정치를 진보시키는 건 더없이 까다로운 과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애초에 ‘진보’라는 것이 쉬웠던 적도, 내버려두면 자연스럽게 이뤄졌던 적도 없었으니, 이 과제가 난제일지언정 불가능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포기하고 멈춰 서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누가 뭐라든 F1은 발전하는 과학 기술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계속 진보하게 될 것입니다. 멈춰 서고 넘어지더라도 그 F1을 둘러싼 시스템과 조직도 어느 정도 진보의 영향을 받겠죠. 적어도 세계의 많은 팬이 열광했던 F1의 본질이 진보하는 기술의 정점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저 역시 기술의 진보와 사회의 진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덕분에 F1이라는 문제 많은 자본주의적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를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