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과 잔혹함의 시대
[번역] 파리, 베이루트 그리고 바그다드를 생각하며
    2015년 11월 16일 11: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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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13일에는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프랑스 파리에서 잔혹하고 끔직한 테러가 발생했고 수십명에서 100여명이 훨씬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프랑스라는 선진국의 수도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지금 오늘도 테러에 의해 희생되고 있다. 모든 희생된 시민들을 추모하면서 우리는 이 야만의 시대, 잔혹함의 시대를 어떻게 끝낼 것인지를 고민하고 함께 실천해야만 한다. 두 개의 글을 번역하여 게재한다. 하나는 테러에 대해 보다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살핀 글이고 하나는 베이루트와 파리 사이에서 드러난 어떤 거리감을 지적하는 글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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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이 프라샤드(Vijay Prashad)는 멜버른 대락 트리니티 칼리지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의 국가 : 남쪽 나라들의 어떤 가능한 역사』(The Poorer Nations: A Possible History of the Global South)와 『전쟁과 점령에 대한 작가들의 반응』(Writers Respond to War and Occupation)의 저자이자 『팔레스타인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Palestine) 편집자이다.

냉혹한 시대에 남겨진 이들

끔직한 대량학살 주간이다. 베이루트(11/12)와 바그다드(11/13)에서 폭탄이 터졌고 파리(11/13)에서는 냉혈한의 난사가 있었다. 이들 테러들은 시체와 부상당한 생명을 남겼다. 그로부터 온 어떤 긍정적인 것도 없다. 그것인 남긴 것이라곤 희생자들의 고통뿐이다. 아니 더 나아가 그것은 힘을 지닌 자들이 다시 폭력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정책들 속에 편안한 안식처를 구하도록 만듦으로써 더 큰 고통만을 남겼을 뿐이다.

이들 사건들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공포와 함께 분노가 먼저 따라 온다. 이것은 본능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죽은 이들을 애도한다. 하이다르 무스타파(3세)의 젊은 부모는 베이루트에서 폭발이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을 때 아이를 위해 그들의 생명을 바쳤다. 파리에서는 테러리스트들이 드자밀라 하우드(41세)를 죽였는데, 그는 한 카페에서 이자벨마랑의 브랜드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여기 희생자들의 얼굴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 각각의 얼굴들은 신문과 소셜미디어에 나타난다. 그들은 그들의 최고의 시간을 지내고 있을 때의 모습과 희망을 우리에게 말하며 웃고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도 이 격렬한 갈등이 일어나는 데 아무런 실질적인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 시민들을 살해한 자들은 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들이다.

우리 모두는 이들 죽음을 이해할 수 없음으로 인해 무기력해질 것이다. 죽음 앞에서 그저 생명이 낭비되고 있다는 바로 이해 불가능한 현실. 바그다드, 베이루트, 그리고 파리, 이 모든 곳의 폭발들을 준비한 이들은 ISIS(이슬람 국가) 혹은 다에쉬(Daesh. ISIS를 경멸적인 어투로 바꿔서 부르는 말)라는 것이 이미 명백해졌다. 이들은 이미 나이지리아와 소말리아의 특정 그룹과 함께 리비아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일부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이라크의 많은 부분을 통제하는 집단이다.

알카에다처럼 ISIS 역시 지도부 없는 네트워크이다. 이들은 뇌도 없이 그저 분노를 야기하는 행동에 의해 자극을 받는 신경촉수만을 지닌 집단이다. 이들 폭력을 자행한 자들이 ISIS라면 그들은 어떻게 이들 지역들에서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는가?

서구에 있는 이들은 바그다드와 베이루트에서의 폭발에 대해서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서구 언론들은 이들 지역에서 폭발은 일상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한다. 그것들은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0월에만 이라크에서 714명이 폭력적인 테러로 숨졌다. 이 희생자의 숫자는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의 월간 숨진 인명과 동일한 수준이다. 11년 동안 이라크는 엄청난 숫자의 정신적 외상을 지닌 인구와 함께 그와 같은 사망자 숫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죽음과 죽음을 기다리는 생명들은 그저 전 지구적 관심사에서 하나의 각주에 불가한 것이고 아무런 고려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파리 테러 이후 “냉혹한 전쟁”에 관한 마초적인 언어가 서구 지도자들의 모습을 규정한다.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는 강경한 어조로 파리의 공격에 대해 반응했다. “우리는 무자비한 전쟁을 이끌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를 포함하여 서구인들은 이미 ISIS와 ISIS 같은 집단들에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해 왔다. 그래서 누가 공격을 받고 있나? 전략을 바꿀 것인가? 서구의 지도자들은 현재 상황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더 많은 전쟁이 어떤 반응을 초래했는가를 뒤돌아볼 수 있을까?

서구 지식인들과 그 지도자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전략적 선택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오로지 증오감만 강화시켜 더 큰 위협만 만들어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이들 ISIS 테러리스트들은 어디에서 유래했는가? 우리는 조사를 토대를 둔 실질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부터 눈을 떼고 종교나 인종을 비난하려는 유혹에 빠져든다. 망각은 오늘날의 질서이다. 서구를 향한 각각의 테러들은 그것이 일어난 시각에만 맞춰져 있다.

아무도 서구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자금을 대는 ‘무슬림세계연맹’(World Muslim League)에 주목하지 않는다. (무슬림세계연맹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자금을 제공하는 보수주의 이슬람을 선전하는 NGO이다.) 이 기구의 주된 임무는 오로지 1960년대와 1970년대 아랍세계에서 세속적인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역사의 좋은 측면을 대변해온 모든 세력들은 반 이슬람이라는 이유로 (이슬람 보수주의가 빼어든-역주) 칼 아래 쓰러져 갔다. 이 반동의 활동은 석유와 지역 패권에 관심을 둔 서구의 이해와 걸프-아랍 세계의 군주국과 사우디 왕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1979년 소련이 개입하기 전 1970년대 아프가니스탄의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 공화국에 대한 서구와 사우디의 공격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된다. 아무도 무자헤딘(Mujahedeen)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무자헤딘은 세속적인 아프가니스탄 사회주의 정부를 무너뜨리는 활동을 했고 미국은 이 조직에게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역주) 무자헤딘의 핵심 세력은 이후 알카에다로 변이될 수 있는 모든 핵심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다.

무엇이 이라크 전쟁과 그 이후 리비아, 시리아에 대한 이 모든 전쟁들을 냉전의 유산으로 만들어 버렸는가? 이 전쟁들은 이들 국가를 파괴하고 아프가니스탄처럼 성전(Jhardis)의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다.

불신은 1911년 리비아에서 이어졌던 공중 폭격에서부터 2011년의 리비아 폭탄 투하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상기시키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죽은 숫자는 말해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단지 “도살”일 뿐이라고 1911년 어떤 저널리스트는 기록하고 있다.

아무도 레일라 세바르(Leila Sebbar)의 소설 [적색의 세느강]을 책꽂이에서 끄집어내지도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1961년 라피에서 친 알제리 저항자들 수백 명을 프랑스 정부가 학살한 것을 적나라하게 다룬 소설이다.

당신은 이런 책을 읽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지금 그들 자신을 위해 죽은 이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까?”라고. 당신은 지금 나에게 화가 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은 아마 서구 국가들이 만들어 온 역사와 그들이 종종 초래한 죽음의 역사, 그들 스스로 비참함을 만들고선 이를 부정하기도 했던 그 역사에 관해 격분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왜 수천 명의 (아랍계-역주) 유럽 거주자들이 시리아로 갔으며 지난 몇 년간 성전에 참여했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왜 당신은 프랑스 외무장관 로랑 파비우스가 과묵하게 시리아의 알카에다 자원자들을 테러리스트의 명단에 올려놓기를 주저한 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누가 이들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서구에 있는 –역자) 자신의 정부에 의해 촉발되어 어느 곳인가의 전쟁을 위해 떠난 이들이며 시리아에서 싸우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라고 자극하는 사우디가 돈을 대는 성직자들(무슬림세계연맹의 지도자들-역주)로부터 영향 받은 이들이다.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들이 자행한 학살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9/11 이후, 부시 정부는 그 자신이 만들어온 역사(서구의 개입으로 인해 무슬림 세계의 세속 정권들이 무너지고 이슬람주의가 범람하도록 만든 역사-역주)를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9/11 당시 “앞으로 있을 전쟁(이라크 전-역주)이 이슬람의 증오에 기름을 붙는 것이며 단지 문제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말하면 마치 그것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같이 여겨졌다. 9/11 테러 이후 나는 “테러로부터 어떤 좋은 결과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랬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고 썼다.

내가 의미했던 것은 미국을 공격한 이들의 테러뿐만 아니라 그 이후 이어진 테러들(미국의 이라크 침공-역주)도 마찬가지일 것임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부시의 전쟁이 초래한 것은 폭력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부시는 거만하게 “임무는 완성되었다”고 떠들었지만 그것이 남긴 결과는 끝없는 전쟁이었을 뿐이다.

다른 길이 있는가? 168명이 죽은 뭄바이 공격(Mumbai Attacks- 10여명의 극단적인 파키스탄 무슬림이 주축이 되어 2008년 뭄바이에서 일으킨 테러 공격: 역주) 이후 인도 정부는 전쟁으로 곧바로 치닫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을 갖고 그 공격을 조사했으며 그 속에 진행된 음모를 밝혀내고 책임자를 처벌했다. 뿐만 아니라 인도인들이 뭄바이 공격을 계획한 이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비난하던 파키스탄과의 외교적 대화를 시작했다.

이 조사 기록은 여전히 공개된 채로 남아 있다. 인내는 그 시절의 질서였다. 어떤 미사일 공격도 뭄바이에서의 공격을 빌미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마 미사일 공격이 있었다면 그것은 갈등을 고조시키고 인도와 파키스탄을 서로 인내할 수 없는 전쟁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신중하게 문제에 접근한 것이 훨씬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모든 진영이 ISIS와 알카에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쉬운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한다. 어떤 서구 국가들도 그들의 중앙아시아 동맹국들인 사우디 왕가와 걸프의 왕조국가들과 대결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 서구의 아랍동맹들은 극단주의 네트워크의 연결망을 부양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자금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 국가들의 부족장들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증오에 가득 찬 분파주의를 주입시키는 것과 같이 위험한 사고에 물들도록 자극한다.

어떤 서구 국가들도 터키의 여당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국내 문제에서의 정치적 지대를 제쳐두고 쿠르드 전사들이 ISIS에 맞서 자유롭게 싸울 수 있도록 지원하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서구 국가도 그들의 군사기지들이 극단주의를 부양하는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정부의 대리인들 지지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분쟁 중에 있는 국가들과 무역을 재개하고 금융정책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켜 그들 국가들이 테러의 토대가 되는 혼란 상태로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한 UN 회원국들의 호소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92년 말리(Mali)의 자유주의 지도자 알파 오마르 콘나르가 서구 국가들에게 가중된 채무를 삭감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매달 서구 은행들에게 부채를 갚아야 하고 말리의 농부들이 무역정책의 혹독함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면 그들 국가의 시민들을 빈곤과 갈등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할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잘못된 관행에 대해서는 그에 따른 책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간단하게 콘나르의 호소를 무시했다. 빚을 갚으라는 말이었다. 콘나르는 자기 시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없었고 행정부를 떠나야 했다.

이 국가는 폭동으로 무너졌으며 알카에다는 말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팀북타(Timbukta)를 장악했다. 2013는 프랑스는 이곳을 폭격했다. 말리는 여전히 균열된 채 남아 있다. 이것은 잘못된 정책이 연속되면서 초래된 결과이다. 아무도 말리를 걱정하거나 관심두지 않는다. 서구인들은 오로지 마그레브(북서 아프리카 지역을 일컫는다. 이집트 서쪽 지역이다-역주)의 알카에다와 그 움직임에만 신경을 쏟고 있고 있다.

서구의 정책 입안자들은 장난감으로 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 소년을 닮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명 높은 정책의 결과로 초래된 인간적 고통과 참혹한 결과를 보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냉혹한 시대 속에 있다. 끔직한 테러가 있고 또한 무시무시한 슬픔이 있는 그런 시대 말이다.

하루이틀 간격으로 벌어진 테러들. 위에서부터 이라크 바그다드(13일), 레바논 베이루트(12일), 프랑스 파리(13일)의 참혹한 광경들

하루이틀 간격으로 벌어진 테러들. 위에서부터 이라크 바그다드(13일), 레바논 베이루트(12일), 프랑스 파리(13일)의 참혹한 광경들

이 글은 Hummus for thought blog에 올라온 레바논인 조이 야우브(Joey Ayoub)의 글이다. 그는 프랑스어를 제2국어로 사용하는 베이루트의 부유층 지역 출신 엘리트이다. 이 글은 파리에서의 테러공격(11월 13일)이 있은 후 세계인들의 반응을 보면서 베이루트의 지식인으로서 그가 느낀 어떤 절망감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인들, 한국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죽음에 대한 비대칭적 반응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글이다.<번역자>

베이루트의 죽음과 파리의 죽음은 왜 다른 대우를 받는가?

베이루트의 나의 시민들의 죽음은 파리에 있는 또 다른 나의 시민들의 죽음만큼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난 토요일(11월 13일. 현지시간) 세계는 파리에서 벌어진 비극으로 인해 경악했다. 베이루트와 파리 두 곳에서 널려진 시체들! 두 도시의 비극은 모두 이슬람국가(the 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 (IS))의 자행으로 보인다.

두 도시 모두에서 수백 명이 죽었고, 다른 수백 명이 부상당하고 불구가 되고 상처를 입었다. 세계는 이 공격들에 대해 비난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형적인 모습을 반복했다. 공격들에 대한 비난과 분노는 비대칭적이며 동등하게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조이 야우브(Joey Ayoub)는 베이루트에서 어떻게 어떤 죽음들은, 삶과 마찬가지로, 다른 죽음들보다 더 문제시 되는지 썼다.

나는 레바논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엘리트 커뮤니티 출신이다. (레바논과 시리아는 프랑스 식민지로서 여전히 제2언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있다-역자) 이 말은 내가 프랑스를 두 번째 고향으로 여겨왔다는 것이다. 내게 파리의 거리들은 베이루트의 거리들만큼이나 친근하다. 나는 며칠 전만 해도 파리에 있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두 사건은 두 곳 모두에게 끔찍한 밤을 만들고 있다. 첫 번째는 오늘(11월 12일) 베이루트에서는 40명이 넘은 시민들이 죽음을 당했으며 두 번째 사건은 파리(11월 13일)에서 100명 이상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세계인들에게 베이루트에 있는 나의 시민들의 죽음이, 파리에 있는 또 다른 나의 시민들의 죽음만큼 중요하거나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명백하게 느낀다.

‘우리’는 페이스북에 ‘안전함’이라는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다.(페이스북은 파리의 테러 이후 곧바로 페이스북 창에 파리 시민들이 자신이 안전함을 표시할 수 있는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했다. 베이루트에서는 일상적으로 죽음이 있지만 페이스북이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는 않았다- 역자)

‘우리’는 사건이 있는 바로 그날 밤,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는 영향력 있는 남성들, 여성들로부터 곧바로 위로의 메시지를 접하지 못했으며 수백 만 명이나 되는 온라인 사용자들의 관심 대상도 아니다. ‘우리’는 셀 수 없는 무고한 난민들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들을 바꾸지도 못한다. 이보다 더 명백한 사실이 있을까?

나는 이 사실들을 말함에 있어 어떤 분노도 없다. 다만 단지 슬플 뿐이다. 말해진 모든 것들에서, 피상적으로 단합된 인류의 목소리인 것처럼 우리가 겨우겨우 만들어 왔던 진보적 사상의 수사학들에서, ‘이 기이한 종의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여전히 ‘세계’의 지배적인 관심으로부터 배제되어 왔음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현재의 구조 속에서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제외시켜 왔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권력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타자’들의 죽음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나의 ‘신체’ 역시 그 ‘주류화된 세계’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죽는다면,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어떤 분노의 감정도 없이 이를 말하고 있다. 이 진술은 단지 하나의 사실(fact)을 말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정치적’ 사실이라는 건 분명하다. 아마 나는 이 사실들에 분노해야 마땅할 것이지만 나는 그런 분노에조차 너무 지쳤다. 분노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큰 부담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내가 죽었을 때 벗들과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기억될 만큼 특권적 위치에 있다. 그리고 이 글이 실린 블로그와 이 글이 포스팅되는 온라인을 통해 세계 여러 곳의 시민들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인터넷의 힘이다. 그러나 이조차도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특권이다.

나는 타네이시 코츠(Ta-nehisi Coates)가 미국에서 ‘흑인들의 신체(시체)’에 관해 말하는 내용을 알고 나서야 이 명백한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아랍인들의 신체’에 관해 말할 수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체, 토착민들의 신체,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신체, 인도인들의 신체, 쿠르드족의 신체, 팔레스타인들의 신체, 중국인들의 신체, 혹은 다른 어떤 이들이 신체에 대해서도!

인간의 신체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그것들이 ‘똑같은 신체’라고 느껴져야 했을 뿐이다. 아마 그것은 그 자체로 환상일 것이다. 그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구조들 속에서’-역자) 보존할 만한 환상이다. 그런 환상을 유지해야만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알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신체는 지구적인 것이 되지만 대부분의 인류의 신체는 지역적인 것, 종족적인 것, 혹은 장소 귀속적인 것일 뿐이다.

나의 이 생각들은 오늘의 끔찍한 공격의 희생자들과 함께한다. 나의 이 생각들은, 몇몇 학살자들의 행동의 결과로서, 또한 이 두 공격이 ‘결합된 실재’임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류의 빈곤한 상상력의 결과로서, 심각한 차별로부터 고통 받을 모든 이들과 함께한다.

나의 유일한 바람은 이 범죄들이 의도했던 것의 정 반대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우리가 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거기 도달할 것이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낙관적이고 싶다. 우리는 인류에 대해 말해야 한다. 당장 그렇게 해야 한다.

필자소개
번역 남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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