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와 보수 향한 돌직구,
    누가 정치를 죽이고 있는가
    [책소개]『이철희의 정치 썰전』(이철희/ 인물과 사상사)
        2015년 11월 07일 03: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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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웨덴의 정치가 구닐라 칼손은 “정치는 특별한 사람이 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보통 시민이 참여하는 보통의 일이다”라고 했다. 정치가 보통 사람들이 삶을 바꾸기 위해 의존하고, 참여하고, 활용하는 ‘보통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는 어떤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진영 논리에 따라 서로 싸우고 죽이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2010~2013년 세계가치관조사 결과 정치권(국회)을 신뢰한다는 여론은 26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만큼 국민들은 한국 정치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책임은 온전히 보수와 진보, 즉 여당과 야당의 국회의원들에게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정치가 힘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를 죽이는 온갖 허상이나 오해, 또는 의도적인 왜곡을 바로잡아야 정치가 바로 설 수 있다. 지금처럼 정치를 더럽고, 나쁘고, 무익한 것으로 여기는 정치 혐오나 정치 불신을 끝장내야 한다.

    『이철희의 정치 썰전』은 이런 한국 정치에 던지는 돌직구다. 정치의 진면목, 진짜 정치를 알게 하고, 그럼으로써 정치를 삶의 무기로 쓰지 못하게 하는 시도와 세력에 맞서기 위한 촌철살인 돌직구다.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 이철희는 날카로운 통찰과 설득력 있는 논리와 냉철한 사고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비판을 해왔다.

    어느새 민주화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보수는 꼴통보수가 진보는 깡통진보가 주류다. 보수는 보수라는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선과 행태를 고집하고 있다. 진보는 무능하고 게으르고 실력도 없으면서 싸가지도 없다. 실력은 없고 진영만 남은 진보는 최악이다. 그래서 새누리당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고 말한다.

    좋은 정당 없이 좋은 후보가 나올 수는 없다. 설사 나오더라도 이길 수 없다. 설사 이기더라도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를 만든 것은 정당이며, 정당 없는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정치를 통해 우리의 삶을 바꿔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를 외면하고 좋은 사회나 내 삶이 편안한 복지국가를 만들 수 없다. 암울한 현실에 눌려 자기 자신을 쥐어짜며 자학하지 말고 더불어 손잡고 함께 나서야 한다. 고립된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함께하는 노력과 사회적 해법이 바로 정치다. 정치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국민이 정치를 외면하면 가장 저질스런 정치인들에게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자신의 삶을 바꾸는 무기로 정치를 활용할 수 있게 하려면 정치, 특히 진보정치가 달라져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너무도 부실하고 무기력한 새정치민주연합이 바뀌는 게 급선무다.

    이철희

    누가 정치를 죽이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행정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이고, 정치에서는 그 누구도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한다. 헌법에 정해진 대통령의 권리나 의무에서 자유롭다. 그야말로 ‘아몰랑’이다. 지난 6월 25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게 직격탄을 날려 대통령이 정당의 원내대표를 몰아내는 후안무치를 자행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진도 팽목항의 실내체육관에서 유가족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진정성은 보이지 않았다. 메스르 사태 때는 3차 감염자가 나온 날에도 지방 행사에 참여했고, 확진 환자가 나온 지 무려 16일 만에 국립중앙의료원을 찾았다. 인사도 실패했다. 안대희, 문창극에 이어 찬성률 52.7퍼센트라는 낮은 지지율로 총리 인준에 통과된 이완구 의원은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62일 만에 사의해 최단기간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새누리당을 움직이는 인사 편제는 박근혜 대통령 친정 체제다. 비서실은 ‘문고리 3인방’과 비서실장이 장악하고, 내각은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황우여 교육부총리가 관장하고 있다. 최고위원회도 서청원 의원을 필두로 친박의 위세가 거세다.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울 후보도 없다. 대통령이 깨알 같이 지적하는 내용을 열심히 잘 받아 적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과 입은 다물고 또 다물수록 보신(保身)에 도움이 되다는 ‘다다익선’이 여당에 횡행하고 있다. 김무성 대표로서도 옴짝달짝하기 어려운 포위 구도다.

    그런데 새누리당이 대통령의 뜻을 좇게 되면 당의 자율성은 사라지고, 그 결과 여론과의 괴리는 점차 커진다. 대통령은 마이웨이를 고집하니 새누리당으로서는 참으로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구도는 정당의 관점에서 새누리당에 재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6년 총선도 부득불 박근혜 마케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새누리당은 ‘박근혜 치세’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여당이 된다.

    리더십은 없고 스타십만 있는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만년 야당’, ‘선거 패배에 익숙한 정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2004년 총선 승리 이후 숱하게 치른 선거에서 거의 대부분 패배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새정치민주연합의 대응은 무기력했고, 존재감이 없었다. 선거 정치와 일상 정치 모두에서 역사상 이처럼 무능한 정당이 있는지 의문이다. 한마디로 국회의원 개개인이 부족을 대표하는 추장처럼 행사하면서 느슨하게 한 울타리에서 지내는 호족 연합체나 프랜차이즈 정당 같다.

    새정치민주연합은 형용사 차원의 평가가 불가능할 정도의 진보이기 때문에 아예 진보답지 않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의석수로는 거대 정당이나 사회적으로는 소수 정당에 불과하다. 새정치민주연합에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미래를 잘 벼린 구상, 흔히 말하는 비전이 없다. 어떤 초인이 등장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살리는 길은 없다. 초인이 있기라도 한다면 그의 역할은 새정치민주연합을 죽이는 것이다. 낡은 야당을 완벽하게 허물어야 한다.

    오픈 프라이머리가 해답인가?

    언제부터인가 한국 정치에서는 오픈 프라이머리가 최고의 선(善)이자 정치 개혁의 핵심인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 최근 정치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공천권을 돌려주기 위해서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해야 한다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미국의 정치를 오래 지켜본 제임스 선드퀴스트는 오픈 프라이머리가 좋은 후보를 뽑을 가능성보다 직무에 맞지 않는 엉터리를 뽑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고 주장했다. 국회의원 선거에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하면 경험과 훈련을 통해 좋은 정치인으로 성장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대중의 시야에 노출되어 지명도와 인기도를 높이는 데 후보자들이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픈 프라이머리 시스템은 대중매체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픈 프라이머리에 참여하는 유권자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과 동원되는 사람, 정치에 적극적인 시민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대개 중산층 이상이고, 동원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투표하지 않는다. 정치적 주장이 강한 사람들은 대체로 비(非)사회경제적 어젠다를 갖고 있다. 결국 오픈 프라이머리는 사회경제적 약자의 이해와 요구, 선호와 열망을 대변하지 못한다.

    결국 오픈 프라이머리는 정당의 약화를 불러온다. 정당이 약화되면 선출된 공직자들은 강력한 이익집단의 일상적 로비에 의해 대표성과 책임성이 크게 훼손된다. 정당이 약화되고, 선거 결과를 정당 밖의 조직된 소수가 좌우하다 보니 현직자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용이하다.

    공천권은 정당에 있어야 한다. 유권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선출권이다. 그 결정권 자체를 당이 포기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부정이다. 또한 경선에 적극 참여하는 일부 국민들이 편향된 성향을 일관되게 보인다면, 그것은 의사 결정의 민주화라기보다는 왜곡이라고 하는 게 옳다. 그뿐만 아니라 정당이 책임지고 후보를 공천하지 않는다면 선거에서 지더라도 정당에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국회의원을 늘려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3 대 1로 되어 있는 현행 선거구별 인구 편차가 위헌이라며, 이 편차를 2 대 1로 줄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등장한 해법이 바로 국회의원 정수 확대다. 즉, 지역구를 가진 현역 국회의원들의 기득권을 인정할 필요와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는 요구를 모두 충족하기 위한 방안이 국회의원 정수 확대라는 뜻이다.

    정치학자들은 대체로 국회의원의 수를 늘리는 데 동의하지만, 현역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반대한다. 기득권은 줄고, 경쟁은 느는 탓이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경쟁이 생명이다. 정당·인물 간 경쟁이 없으면 민주정치는 기능부전에 빠진다. 국회의원 정수 확대는 곧 경쟁의 확대, 정치의 활성화와 다름없다. 또 국회의원의 수를 늘리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회의원 증원을 세금 문제로 보느냐, 국민 정치 서비스의 문제로 보느냐에 따라 호오(好惡)가 달라진다.

    한국의 국회의원 정수는 어떤 기준으로 보든 글로벌 스탠더드에 못 미친다는 게 중론이다. 인구수가 한국과 비슷한 영국은 의원 수가 650명이다. 또 복지국가인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는 의원 1인당 인구수가 3만 명이 채 안 된다. 오스트리아도 4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인구 규모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복지와 대표성 간의 상관성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한신대학교 사회학과 김종엽 교수는 “국회의원 수를 늘리면 특권은 줄어든다”고 말한다. 국회의원 수가 늘어나면 상대적으로 부패도 줄어들 것이고, 정치 행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결국 정치의 질이 좋아지는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좋은 정치는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눈을 의식하고, 유권자의 평가를 두려워할 때 가능해진다.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는 것은 유권자가 싸고 질 좋은 정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진보가 이기려면

    진보가 빠지기 쉬운 유혹 중에 하나가 교조주의인데, 그것은 진보의 천형(天刑)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사회, 다른 세상을 꿈꾸고 지향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중심을 잡기 위해 교조에 얽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가 지향하는 이념이나 사상을 견지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시대의 흐름 또는 여론의 동향에 맞춰 적절하게 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 말해 국민들의 눈에 진보가 신선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때 진보는 성공할 수 있다. 섹시(sexy)하고, 프레시(fresh)하고, 시크(chic)한 진보의 모습이 중요하다. 도덕적 우월 의식에 빠진 진보는 게으른 진보다. 정책을 주장할 때도 대중의 정서나 그들의 언어를 고려해야 한다. 세상의 흐름, 정서, 유행, 풍조, 기미 등을 기민하게 포착해야 하고, 정말 치열하고 촘촘하게 고민해야 한다. 상상력도 대단히 중요하다.

    정치는 이성보다 감성의 영역이다. 이성적 판단 운운하며 메마르게 접근하는 것보다는 느낌과 정서를 추동하는 감성적 접근이 더 익숙하고, 더 잘 와 닿는다. 대체로 진보는 이성과 논리에 치중하다 보니 대중적 감성을 놓치기 일쑤다. 자신들이 옳다는 도덕적 우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면서, 진보 성향의 이성 과신에 따른 부작용이다. 이런 ‘정치적 근시’로 대중적 감성을 포착할 수도 없고, 사회경제적 프레임을 제대로 작동시킬 수도 없다. 또한 어떤 이슈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 이슈를 쉽고 간명한 이슈로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따라서 속물 진보가 아니라 책임 진보라면 변화에 민감해야 하고, 실력으로 승부해야 하고, 리더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 진보를 자기 기득권 지키기의 명분으로 삼는 ‘진보 상업주의’를 걷어내야 진보가 산다.

    샤츠 슈나이더는 “전쟁에서 그러하듯, 전략은 정치의 심장이다”라고 말했다. 이 전략에는 지성이 필요하다. 의지나 열정만으로는 안 된다. 옳다는 신념만을 고수하거나, 한번에 다 얻겠다고 하면 전략이 필요 없다. 정치가 가진 역동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구현하려면 정치를 전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보가 전략에 무지하거나, 이를 폄훼하는 것이 이성과 논리 등을 강조한 데 따른 부작용일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의 전략적 무지나 무능이 양해되는 것은 아니다. 진보는 ‘이기는 전략’을 통해 승리하고, 작든 크든 그 승리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더 좋은 세상을 지향하는 진보라면 좋은 전략으로 승리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

    강한 리더십이 없으면 이기는 전략도 생겨날 수 없다. 진보에 강한 리더십과 이기는 전략은 패키지다. 새정치민주연합에 없는 두 가지가 바로 전략과 리더십이다. 선출된 당 대표가 숱하게 있었지만, 그 누구도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낡은 질서는 통합과 탕평의 명분하에 그대로 온존되었다. 혁신이 생겨날 수 없었고, 강한 리더십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 그 결과 패배, 패배, 패배뿐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선당후사란 말은 도처에서 들리는 데 정작 자신을 희생한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할 만큼 한 다선 의원도, 자리 욕심이 아니라 대의 때문에 마지못해 배지를 달았다는 의원도 불출마는 절대 불가다. 하나의 팀으로서 새정치민주연합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에 필요한 것은 조속한 질서 회복이 아니다. 혼돈의 조직화다. 경쟁력과 지속 가능성을 갖춘 새로운 대안 체제의 성립은 그 결과다.

    정치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기 때문에 내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못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나 상대의 못남에 편승하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쉽다. 상대가 어느 순간 그 못남을 떨어내고 잘하게 되면 곧바로 나의 못남이 속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치란 묘해서 상대가 못하면 그에 편승하려 할 뿐 자기가 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기 쉽다. 상대가 못해도 그와 별개로 자신의 못남을 떨어내는 노력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자신을 바꾸는 데 성공해야 상대의 실책 때문에 생기는 반사이익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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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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