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비하는 자의 행복,
    서빙의 고단함과 절망
        2015년 08월 17일 09:12 오전

    Print Friendly

    왜 옛 동구권의 출신들은 서방으로 갔을 때에 돌연히 안락함이랄까, 자신의 위신이 올랐다랄까, 좌우간 갑자기 뭔가가 “편해진” 것을 느꼈을까요?

    여러 가지 가능한 답 중의 하나는, “서비스 계급”, 즉 서비스업 노무자 계층의 존재 유무 여부이었던 듯합니다. 국가화된 동구권의 경제에서는,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서비스”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소비라고 해봐야 필수품 배급/보급을 통한 주민들의 노임 회수 수준이었고, 사실 주민들은 그 어디에서도 “고객” 노릇을 할 수 없었습니다. 상점 판매원이나 식당 배식원 (웨이터) 등등은, “고객에게 서빙하는” 서비스 노동자라기보다는 해당 (국가 소유/경영의) 기업단위에서 복무하는 공무원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친절”을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일면으로는 그들로서는 굳이 감정노동을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젊은 서비스 노동자는 그럭저럭 8시간 동안의 복무시간 “떼놓고” 그다음 귀가하여 대학이나 대학원 시험 준비에 얼마든지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대학원 졸업은 보다 전문적인 직장 배정에의 하나의 길이라면, 또 하나의 길은 모범적 복무를 통해 입당을 쟁취하여 나중에 본인이 근로하는 기업단위에서 하급 내지 중급 간부로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실력주의 “성장”이 가능한 차원에서는 동구의 서비스 공무원 노동자들은 굳이 손님 앞에서 기가 죽을 일도 없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그 손님은 서방적 의미의 “고객”도 아니었지만요.

    반대로 동구권의 중산계급 인텔리가 서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본국의 서비스 노동자들과 동등한 공무원에서 “고객”으로 변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서독 마르크나 불란서 프랑크, 일본 엔이나 미국 달러가 약간이라도 있는 한 웨이터나 판매원이 그에게 극진한 친절을 다하는 것을 이제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본국에서 부족한 물자를 분배해주는 서비스업 공무원들 앞에서 쩔쩔맸지만 서방에서는 “고객”으로서 평생 한 번이라도 “왕대접” 쯤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서방에 갔다 오는 희귀한 기회를 포착하는 동구권의 중간계급 인텔리들이 상당히 많은 경우 친서방파가 되는 심적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평생 해본 적도 없었던 “왕노릇”을 상점이나 레스토랑에서 어쩌다가 한 번 해볼 수 있어 그 행복감을 잊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1950-70년대의 쏘련이나 동독 지식인이 평생 한 번 만끽할까 말까 하는 그 행복감을, 예컨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육체노동자라도 얼마든지 매일매일 느낄 수 있습니다. 커피숍이나 백화점에서의 소비를 허할 정도의 (아마도 정규직에 해당되는) 임금만 있다면요.

    나는 너다

    감정노동자의 애환을 다룬 맹봉학 감독의 ‘나는 너다’의 한 장면(출처kwwnet.tistory.com/38 )

    “손님 커피 나오셨습니다”, “네, 옷이 맞으십니다”, “계산이십니다” 국어 문법에 맞지도 않은 과잉 경어의 봇물, 무조건적이고 잘 훈련된 절들과 미소들…국내 서비스업의 감정노동의 강도는 세계적으로 일본 그다음으로 가장 셀 것입니다.

    서비스업 (많은 경우 여성) 노동자가 팍팍 주어야 하는 “기”를 흠뿍 받아 마시는 “고객”이야 그 순간 본인 인생의 고됨을 잊고 소비의 즐거움에 빠지겠지만…과연 한국형 소비 자본주의를 가능케 하는 이 커다란 서비스계급에게는 행복의 그림자라도 보일까요?

    동구권의 서비스업 공무원은 특히 부족 물자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을 경우 어쩌면 중간계급 지식인 이상의 생활수준을 누렸을지도 모르지만, 대한민국 서비스노동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여성이 많고 비정규직은 대부분이고 전반적으로 저임금이라는 것입니다.

    2015년 현재 서비스업 노동자들의 28%가 아예 100만 원 이하의 저임금을 받으며, 48% 가량은 100-200만 원 정도의 “그나마 굶지 않을 정도의 저임금”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참고로, 남자 정규직의 평균 임금은 2015년 현재로서 326만 원 정도입니다. 가장 심적으로 힘든 감정 노동을, 가장 돈 받지 못하는 여성비정규직들이 한다는 거죠.

    동구권의 서비스업 노동자들에게는 대학/대학원 진학 내지 입당과 관리자로서의 성장 등의 나름의 “미래 가능성”들은 있었지만 한국 서비스업은요? 가끔가다가 한국 서비스업 일부 부문들의 실태를 가까이에서 보면 솔직히 미래고 뭐고 그저 죽음이나 부상만이 앞에 보이는 강제노동수용소 같습니다.

    건당 400원 정도 버는 택배 노동자는 하루에 (본인이 지불해야 하는 기름값 등을 포함하여) 7만원 정도 벌자면 150곳을 돌아야 한단 말입니다. 10시간 일한다 치면 한 시간에 15곳 정도 돌고요…이렇게 일하다가는 과로사나 사고사, 내지 사고로 인한 부상이 몇 년 사이에 찾아오지 않는다면 행운이라고 봐야 합니다.

    물론 한국이라고 해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비정규직 여직원은 뜻을 세우기만 하면 돈을 조금 모아서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 전문대나 지방대 졸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죠? 그 다음에는, 그녀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온다면 아마도 하급 사무노동자로 신분상승이 될지도 모르죠. 한국 사회에서 서비스업 노동자로서 가능한 운신의 폭이란 그 정도입니다.

    아마도 현 사회에서 혁명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바로 서비스업 노동자들이고, 동시에 작은 기업에서 분산적으로 일하는 탓에 조직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도 서비스 노동자들입니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서비스업 과잉 친절의 사회에서 소비를 하는 중간계급들이 일상의 애로를 잠시나마 잊어 친절한 서비스의 안락에 빠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서비스 계급의 존재입니다. 한데 소비하는 자들의 행복은 바로 서빙하는 이들의 불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아, 우리가 남의 불행을 보면서도 못 보는 척하고 남의 생명을 갉아먹으면서 산다는 사실을 언제까지 외면할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