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과 멘토가 아닌
스마트한 위로가 주는 구원
[붉고도 은밀한 라디오] 라종일 외『가장 사소한 구원』
    2015년 02월 26일 09: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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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깔있는 진보 미디어’ 칼라TV가 제작하는 논픽션 책 팟캐스트 <붉고도 은밀한 라디오>는 르포르타주와 논픽션 책을 다루고 있고, 매주 월요일 업로드 된다. 김현진(에세이스트)과 송기역(시인, 르포작가)이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책 소개 및 저자와의 인터뷰 외에, ‘신간 논픽션 브리핑’, ‘김현진의 라디오 에세이’, ‘논픽션 작가 열전’, ‘인문학 강의’, ‘내 인생의 밑줄 쫙 별표 땡땡’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8회 방송은 『가장 사소한 구원』(알마)의 저자 라종일, 김현진과 알라딘의 박태근 MD, 붉고도 은밀한 라디오 진행자 송기역 작가가 함께한 북토크쇼 실황을 내보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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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낙관주의자 VS 다혈질 비관주의자

“비관주의자와 낙관주의자의 차이가 뭔지 알아? 더 이상 나빠질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게 비관주의자이고, 이보다 더 나빠질 거라고 생각하면 낙관주의자야.”

보스니아-세르비아 전쟁을 블랙코미디로 다룬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 2001년) 도입부에 나오는 대사다. 얼핏 말장난 같지만 곱씹어 보면 그럴 듯한 유머다. 이보다 나빠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건 지금이 가장 나쁘다는 것이고,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은 아직 괜찮고 더 나빠질 수 있는 상황을 헤쳐 나가보자는 것이다.

『가장 사소한 구원』은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신들로 이루어진 책이다. 김현진 작가가 당장이라도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고민 편지를 띄웠고, 그에 대해 라종일 교수가 한 답장을 묶은 것이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고 김현진 작가가 물으면 라종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낙관론자예요. 세상에 좋은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죠. 자신의 낙관적인 전망을 부정하는 세상을, 부정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거죠.”

“세상은 근본적으로 부정의해요. 어떤 정의를 실행해도 그 정의 때문에 희생당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부정의함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꼭 필요해요.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치유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 어느 누구도 세상이 자기에게 친절하기를 꿈꾸지 말아야 해요.”

<노 맨스 랜드>의 대사를 적용하면 라종일 교수는 차가운 낙관주의자이고, 김현진 작가는 다혈질 비관주의자다.

“그저 그런 멘토 책 아냐? 하는 생각이 있을 거 같아요. 멘토링 책들은 말하자면 성시경의 발라드 같은 느낌이죠. 잠시 뽕 맞은 듯이 느낌은 좋아요. 멘토들이 하는 말은 가수 김작가 말을 빌리자면 ‘쌀로 밥짓는 소리’인데 라종일 선생님은 차가운 분이에요. 함부로 좋은 얘기 안 해주세요. 세상은 차갑고 그 온도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무조건 잘 될 거라는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을 기대하면 힘들어지니까 기대하지 말고 그저 같이 손잡고 힘내자고 하시는 거죠.”

그렇다. 라교수는 자신의 답이 진리요, 정의라고 하지 않는다. 정성이 깃든 진심으로 자신의 연륜과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한다. 김현진 작가는 라종일 교수와 편지를 교환하며 구원 받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라종일 교수는 사적으로 주고받은 편지를 출판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지만, 김현진 작가가 우기게 된 사연은 이렇다.

“나의 찌질한 이야기가, 둥지 밖으로 떨어지려는 울새 한 마리를 둥지로 올려놓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내가 라종일 교수님께 받은 특혜를 저처럼 아파하는 분들과 나누고 싶어서 세상에 내놓고 싶었었어요.”

정석대로 살아온 70대 어르신 라종일 교수와 내 멋대로 살아온 30대 어른 아이 김현진 작가는 어떻게 만났을까?

“2009년, 제가 『그래도 언니는 간다』를 냈을 때 강준만 교수와 한윤형 씨가 서평을 써주셨어요. 두 사람 다 좋게 말 안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잖아요. 근데 강준만 교수님이 좋게 얘기해주셨어요.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을 모신 라종일 교수는 『김대중 죽이기』, 『노무현 죽이기』에서 대통령도 좋게 말하지 않았던 강준만 교수가 칭찬하는 사람이 누군가 궁금해서 제 책을 읽으셨다고 해요. 당시 우석대 총장이었던 라 교수님이 비서를 통해 연락을 하셨어요.”

가장 사소한 구원

애를 낳아서 생산직으로 깔아주라는 거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다. 출산에 관한 두 사람의 생각도 (물론) 달랐다. 먼저 라종일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사랑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다면 자기 아이를 안았을 때 아니었을까 싶어요. 아이가 구원이고 혁명이었어요. 제가 한 경험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경험이 애를 낳아서 기른 경험입니다. 아이를 통해 많이 배웠어요. 부모의 은혜가 아니라 자식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다음은 김현진 작가의 말이다.

“제가 라교수님한테 그랬어요. 애를 낳아서 자본의 생산직으로 깔아주라는 거냐고 했어요. 그러면 교수님은 제 생각 자체가 사람을 인적 자원으로 보는 신자유주의의 기준과 뭐가 다르냐고 하세요. 시작은 같은 거 아니냐고 하시면서요. 그런 말씀을 들으면 제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과 제 생각의 근본은 같은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되더라구요.”

두 사람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솔직히 두 사람의 대화가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는데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로 들리기도 한다.

삼포세대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생명 탄생이 경이롭고 축복임을 몰라서가 아니다. 무언가를 원하면 원할수록 절망스럽기 때문이다.

자식을 자본주의의 노예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낳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식도 나와 같이 힘든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건 다 배부른 소리일 뿐이다. 일단 당장의 삶이 피로하기 때문이다.

삶의 비용을 과도하게 지불하며 어찌되었든 살아가야하기에 그런 거창한 이유 따위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것이 문제다. 생각하며 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남들처럼, 남들만큼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아야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려올 수 있다. 틀을 깨고, 삶을 재구성해야 해답이 보일 것이다.

힐링과 멘토가 난무하는 시대에 주는 스마트한 위로

이렇게 살짝 반감이 생겼나 했는데, 라종일 교수의 다음 말에서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을 통과해온 어르신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이해의 마음이 솟아났다.

“자라온 세대의 환경이 달라요. 저는 일제 말기와 6.25를 기억해요. 폭력과 갈등의 시대를 직접적으로 거쳐 왔기 때문에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아왔어요. 여성과 어린이의 지위가 형편없었던 시대를 목격하며 살아왔어요. 한 동네에서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는 숨어 지내고 가해자가 외려 자랑질을 하고 다니는 시대를 살았어요. 6.25 때는 이웃끼리 죽고 죽이는 것을 봐야 했어요. 폭력과 야만의 시대를 거쳐 온 산증인으로서,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낍니다.”

연륜이 주는 긍정의 힘과 단단함이 느껴진다. 라종일 교수의 이러한 점이, 야무질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상처에 취약한 김현진 작가에게 구원이 된 것 같다. 힐링과 멘토가 난무하는 시대에, 멘토라기 보다는 조금 더 살아본 인간으로서, 라종일 교수가 김현진 작가에게 주었던 혜안과 스마트한 위로가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제8회 붉고도 은밀한 라디오 ‘신간 논픽션 브리핑 따북’ 코너에서는 『저항하는 평화』(오월의봄 /엄기호, 김종대, 강인철, 정희진, 서경식, 조영선, 하승우, 최현정)와 『탈바꿈』(오마이북/탈바꿈프로젝트)이 소개되었고, ‘김현진의 라디오 에세이’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선일보 구독자인 아버지의 표심을 돌리기 위해 긴급 작전에 돌입한 딸의 이야기가, 블랙 유머 형식으로 다뤄지고, ‘논픽션 작가 열전’에서는 ‘에곤 에르빈 키쉬’를, ‘내 인생의 밑줄쫙 별표 땡땡’ 코너에서는 번역가이자 학원강사인 최영식이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노명우/사월의책)를 추천한다.

<붉고도 은밀한 라디오> 듣기 ☞

팟빵 : http://www.podbbang.com/ch/8412

아이튠즈 : http://goo.gl/oQzx6s

필자소개
자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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