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상자는 공존의 마술
[그림책 이야기]『순이와 빨간 상자』 (고우리 / 봄봄)
    2015년 02월 05일 11: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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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이 내린 날, 빨간 상자를 발견하다

큰 산 작은 집에는 순이네 가족이 삽니다. 첫 눈이 내린 날, 순이는 다른 날보다 일찍 밖으로 놀러 나옵니다. 그리고 커다란 소나무 아래서 빨간 상자를 발견합니다.

순이는 신기한 빨간 상자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도대체 이 빨간 상자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작은 크기로 보아 새집일까요? 아니면 베개일까요?

바로 그때 빨간 상자 안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옵니다. 순이는 너무 놀라 심장이 마구 벌렁거립니다. 순이는 조심스럽게 빨간 상자에 귀를 대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정말 빨간 상자에는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순이의 오빠 말대로 빨간 상자는 그냥 라디오라고 불리는 기계에 불과한 것일까요?

이 세상은 크고 작은 빨간 상자가 더불어 사는 곳

어쩌면 순이가 발견한 빨간 상자가 라디오인지 아니면 정말 작은 사람들이 사는 작은 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큰 산들의 입장에서 보면 순이네 가족이 사는 작은 집이 바로 순이가 발견한 빨간 상자입니다. 우리 몸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작은 세포들이 바로 순이가 발견한 빨간 상자입니다.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개집이나 고양이집이 바로 순이가 발견한 빨간 상자입니다.

우주와 자연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크고 작은 빨간 상자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순이와 빨간 상자』를 본 독자들은 이 세상이 크고 빨간 상자가 모여 더불어 사는 곳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그림책 『순이와 빨간 상자』가 지닌 가장 큰 미덕입니다.

빨간 상자

사라진 빨간 상자

언젠가부터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명태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동해안에 있던 명태들의 빨간 상자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우리는 북극의 해빙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미 많은 동물들이 멸종되었거나 멸종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사라진 빨간 상자들은 남아있는 빨간 상자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빨간 상자에만 몰두하면서 다른 존재들의 빨간 상자들이 사라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은 사라진 빨간 상자들의 빈자리를 그대로 남겨두지 않습니다.

자연은 언제나 살아서 움직입니다. 지각이 이동하고 해류가 이동하고 새로운 동식물이 나타나면서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생태계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다시 인간들의 빨간 상자를 위협합니다.

사람들 속의 빨간 상자

그런데 빨간 상자의 세계는 자연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사는 빨간 상자 안에도 또다시 다양한 빨간 상자가 존재합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빨간 상자가 있고 보통 사람들의 빨간 상자가 있습니다. 어린이의 빨간 상자가 있고 어른들의 빨간 상자가 있습니다. 공부 좋아하는 사람들의 빨간 상자가 있고 공부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빨간 상자가 있습니다. 잘 노는 사람들의 빨간 상자가 있고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빨간 상자가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의 빨간 상자가 있고 아픈 사람들의 빨간 상자가 있습니다.

부자들이 자기들의 빨간 상자에만 몰두하면 보통 사람들의 빨간 상자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자들이 가난해질 것입니다. 어른들이 자기들의 빨간 상자에만 몰두하면 어린이의 빨간 상자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어른들의 미래가 사라질 것입니다.

빨간 상자는 공존의 마술

1등을 한 친구는 2등부터 꼴등까지의 역할을 맡아준 친구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 친구들 덕분에 1등의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주인공을 맡은 배우는 조연과 단역을 맡아준 배우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 배우들 덕분에 주인공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권력을 갖지 않은 국민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국민들 덕분에 권력자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기업주는 직원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직원들 덕분에 사장 또는 회장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들은 물과 대기와 태양에게 감사합니다. 물과 대기와 태양이 식물들을 먹여 살리기 때문입니다. 초식동물들은 식물들에게 감사합니다. 식물들이 초식동물들을 먹여 살리기 때문입니다. 육식동물들은 초식동물들에게 감사합니다. 초식동물들이 육식동물들을 먹여 살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동식물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인생은 여러 사람들의 빨간 상자들이 함께 만드는 역할 게임이며 종합예술입니다. 자연은 여러 생물들의 빨간 상자들이 함께 만드는 아름다운 합창이며 웅장한 교향곡입니다.

그림책 『순이와 빨간 상자』는 순수하고 신기한 상상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인생과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담은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이 놀라운 세계를 만든 고우리 작가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필자소개
이루리
동화작가, 그림책 평론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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