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등원 때의 ‘캐쥬얼-운동화’ 차림
    [복기, 의정활동4년-3] 새로운 정당을 희망했지만
        2015년 02월 05일 10: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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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인 전 의원과의 만남

    선거가 끝나고 한 차례 서울에 들렀다. 출마 직전 같이 밑그림을 그리고 정책 기조를 짰던 친구들과 선배들이 홍대입구역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간략히 선거 평가를 진행하며 나는 “성공한 선거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인동동, 진미동의 투표자 가운데 35%가 도의원 정당명부 선거에서 야권 정당(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사회당)에 투표했다.

    그러나 야권 유일 후보로 나섰던 나의 득표율은 21%. 아무리 높게 잡아도 야권 투표자의 60% 가량만 나를 지지했으며 상당수의 야권표가 빠져나간 셈이다. 무소속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지만 무소속 후보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후보보다 유리할 게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에 들른 김에 임종인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대자보> 편집진이던 김영국 씨가 만남을 주선했다. 초면이었지만 임 전 의원은 나를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 나는 그를 높게 평가하는 칼럼을 쓰고는 했다.

    임 전 의원은 열린우리당 의원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었고 민주노동당 의원과 행보를 함께하며 ‘열린노동당’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종로의 한 생선집에서 큰 체구에 눈빛이 형형한 그를 만났다.

    미디어로 본 그는 이따금 익살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는 “어떻게 당선되었냐”며 신기해 했고 나는 “잘된 선거는 아니었고 제가 잘 나서 당선된 것도 아니다”라고 답했다. “MB 덕분입니다. 구미에도 그를 싫어하는 시민들이 많았고 그 시민들 표를 많이 받은 거죠.”

    그가 내게 특별한 볼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예전부터 한번 만나고 싶던 청년이라 만남을 청했던 것이다. 2009년 가을 안산 상록을 재보선에 무소속 진보 후보로 출전했다가 15% 득표율에 3위를 기록한 그는 진로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이랑 진보신당이랑 합당할 거 같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합당에 반대고, 합당했을 때 그 당에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요? 나는 합당을 하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국민들은 정치권을 여 아니면 야로 보거나, 잘해야 범한나라당, 범민주당, 범민주노동당으로 보고 있으니까.” 그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합당하면 그 당으로 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으로 들어가는 것도 고려 중입니다.” 나는 “안 들어가셨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본디 민주당 계열의 열린우리당에서 국회의원을 했던 사람이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겨 생맥주집에서 가볍게 낮술을 마셨다.

    그는 “김 의원은 영남 출신이라 민주당에 대한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호남 출신이고 민주당이 친정인지라 김 의원처럼 민주당을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조금 지나서 실제로 민주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날 그는 “내 지향은 야5당(민주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연합의 진보적 정권교체”라고 밝혔다. ‘진보적 정권교체’의 개념에 대해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노선을 계승하면서 발전적으로 극복한다’고 설명했다.

    독자적 진보정당의 발전에 무게를 둔 나와는 명백히 차이가 있었다. 또 지방정치인과 중앙정치인과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와 당을 함께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도 나와 함께 하고자 그날 만남을 가졌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열린우리당에서 유일하게 비정규직법 개악을 반대했던 정치인이었고, 타투 합법화 등 기성 정치의 관심이 못 미치는 소수자 옹호에도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가 잘되기를 바란다.

    임 전 의원 뿐만 아니라 나도 당파적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김두관 경남지사쯤 되는 거물이라면 모를까, 나에게 ‘무소속’은 대중적으로 이도저도 아니게끔 비치게 하는 오해의 표지였다. 선거 결과 분석에서도 나왔지만 무소속인 점이 그리 유리하게 작용하지도 않았으므로 연연할 아무런 사유가 없었다. 빨리 벗어던지고 싶었다.

    그때 나는 한 명의 ‘무소속’에 지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이 내보낸 후보’라는 낭설이 있었지만 민주노동당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 당 내의 NL(민족해방)계열과는 당을 같이하지 않기로 했다. 별다른 다짐이 없었다. 그것은 내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통일지상주의, 민족제일주의는 진보정치의 질곡이었다. 가끔 터지는 북한 관련 사건들은 진보의 원칙에 어긋나는 동시에 대중적으로도 위상을 실추시켰다.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한나라당의 영입 제의를 받고 있다는 헛소문도 퍼졌다. 훗날에는 “네 번 제의를 받았는데 모두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나는 한나라당에게 영입 제의를 받은 바가 전혀 없다.

    당시 존재하던 정당 중에는 진보신당이 가장 나와 유사한 노선을 가졌다. 내가 2009년 3월까지 진보신당 당원이었던 것을 안 대구경북지역 진보신당 간부들이 스치듯 “복당해야 하지 않겠냐”고 입을 연 적은 있었다. 그게 다였다.

    나는 진보신당 입당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럴 거라면 선거 때 진보신당 후보로 나오는 것이 옳았다. 사회당 행은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진보신당 다음으로 나와 유사한 정당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그 당이 대중정치를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보지 않았다.

    내가 민주당 영입 제의를 받고 있다는 헛소문도 돌았는데 내게 그럴 의사도 전혀 없었거니와 구미지역 민주당이 나를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구미지역 민주당은 그야말로 ‘사람 기근’이었고, 안장환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당을 외롭게 끌고 가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사실 안 위원장의 위상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안 위원장은 언젠가 농담조로 “김수민 의원을 을지역 위원장으로 하면 좋겠는데…”라고 했지만 마음에 없는 말이 분명했다. 그들은 내가 그 ‘밑’으로 들어가면 모를까 대등한 위치에서 나를 받을 이들이 절대 아니었고 이는 차차 그들의 행태로 증명된다.

    구미지역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은 내가 합류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구미는 공단도시였기 때문에 자연히 지역 민주노동당은 NL계열이 아닌 노조 출신들이 주도하고 있어서 지역사회내에서는 서로 불편할 것이 없었다. 지역 내에서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나아가 국민참여당까지 동행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고 나도 그 범주 안에서 사실상 함께했다. 그러나 같은 정당에 몸담는다는 건 또다른 문제였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재 있는 정당에 입당하지 않는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명분을 지키려면 그래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무소속으로 영영 남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가지였다. 새로운 정당이 생기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기성정당들이 당을 재편하며 개명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 재편 가능성이 그나마 보이는 사례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합당이었다. 임 전 의원과 만났을 때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 합당에 반대했다. 그렇다면 비NL 진보정당인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합당하는 경우가 남아 있었지만, 실현될지는 미지수였다.

    아예 새로운 정당이 생길 가능성은? 나는 “기회가 닿으면 당을 만들겠다”고 공언했으나 그때는 여지가 없는 듯했다. 주변 사람 몇몇과 대화를 나누며 녹색당이 창당하는 경우를 상정해 보기도 했지만 녹색당은 1990년대부터 계속 창당에 실패하고 있었다.

    활로가 보이지 않자 마음이 더 급해졌다. 한국에도 지방정당이 허용된다면 구미지역 내에서 내가 앞장 서 당을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요원한 일이다. 항간에서는 구미 풀뿌리희망연대가 지방정당에 준하는 조직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와 민노당 김성현 당선자는 구미 풀뿌리희망연대의 운영위원이었고 두 명의 당선자를 배출한 풀뿌리희망연대는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었다. 나에게 붙는 수식에도 ‘풀뿌리’가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풀뿌리희망연대는 정치세력이 아니라, YMCA, 참여연대, 농민회, 전교조, ‘사람사는세상’, 참교육학부모회가 참여하던 시민단체 연석회의였다. 선거에서도 지지 선언 없이 정책 제안과 각 후보자별 수락내용만을 발표했었다. 내 성향이야 어떻든 그때 나는 그냥 한 명의 ‘무소속’에 지나지 않았다.

    개원 직전 터진 KEC 직장폐쇄

    서울에서는 예전 대학 시절 어울렸던 너댓살 많은 학과 선배들도 만났다. 4, 5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형들도 있었다. 갑자기 시의원 당선자가 되어 나타난 나를 다소 어리둥절하게 맞으면서도 “야~ 구미에서 어떻게 당선되었냐”며 신기해 했다.

    그들과 맥주를 기울이며 월드컵 축구 경기를 관람했다. 형들은 여전했다. TV 속 중계보다 그 형들의 해설이 더 재미있었다. 그 뒤로 그들을 만나지 못했지만 형들은 SNS를 통해 가끔 의정활동을 응원했다.

    한편 개원이 다가오면서 구미시의회 의장단 선거는 가닥이 잡히고 있었다. 슬쩍 예상하기에도 허복 의원이 우세했다. 부의장으로 나선 김영호 의원 등 을지역 무소속 의원들이 가담했고 친박연합도 그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황경환 의원과 손홍섭 의원은 다섯 표를 넘길 것 같지 않았다. 나의 캐스팅 보트도 사라졌다. 그런데도 후보로 나선 의원들은 끊임없이 내 한 표를 요청했다. 나는 더 이상 단순한 당선자가 아니었다. 의장 후보들의 등살에 괴로워하는 또 하나의 유권자였다.

    하루는 저녁에 민노당 김성현 의원에게 전화가 왔다. “별 일 없는가?” “없는데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요? 누가 찾아왔습니까?” “그래, 의장 후보가…… 도저히 살 수가 없다.” 그는 형곡동 민노당 사무실이었다. 누가 찾아왔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 황경환 의원이었던 것 같다. 나도 풀뿌리사랑방에 있었다. 전화를 끊은 직후 얼른 사무실 셔터를 내리고 퇴근해버렸다.

    하지만 며칠 뒤 낮에 찾아온 황 의원은 피할 수 없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박교상 의원, 김성현 의원하고 셋이서 움직이기로 했다는데 사실인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왜냐면 박 의원과 김 의원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없었고 반드시 내가 선택을 같이한다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도 지지하지 않기로 잠정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허복 의원도 연신 전화를 걸어왔다. “김 의원~ 시원하게 답 좀 줘봐. 나도 애가 타.” 아마 당시 의원들 중에 정보에 가장 어두웠을 내가 내다봐도 허 의원이 의장에 오를 것 같았다. 이미 게임은 다 끝났는데 그래도 공을 들이는 그를 보면서 기초의원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라고 깨달았다.

    같은 4선이면서 나이가 10년 가까이 많은 황 의원이 허 의원에게 양보를 종용했지만 허 의원은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의회 안팍에서는 “한 번 의장을 역임한 황 의원이 너무 욕심을 내는 거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다.

    의장 선거로 괴롭던 나날에, 구미 공단의 ㈜KEC에서 돌발 사건이 터졌다. 지방선거 직후쯤 금속노조 KEC지회는 단체협상 와중에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정신 없는 당선자 일정에 지쳐 방문을 미루고 있었는데, 6월 30일 일이 터졌다. 기숙사에서 농성중인 조합원들이 용역 깡패들에게 내쫓겼고 사측이 직장폐쇄를 단행해버린 것이다.

    나는 파업 초창기 으레 단협 과정에서 있는 파업이라고 받아들였었다. 다만 이명박 정부가 노조 전임자의 수와 임금을 규제한 타임오프를 밀어붙였고 금속노조 KEC지회가 이를 사업장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노사간 쟁점이 된 것이 특기사항일 따름이었다. 더구나 노조는 타임오프 관련 요구 사항을 철회할 의사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측이 초강경수를 동원한 것이다.

    KEC의 파업은 오랜만에 벌어진 일이었고 일각에서는 “사측도 온건한 편이라 이 같은 대립이 이례적”이라는 평도 있었다. 자연히 사측의 강경 진압 배경에 의문부호가 찍혔다. “이 정도로 나오는 걸 보면 이제 사측이 노조를 박살내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일었다. 실제로 내가 아는 사람은 사석에서 KEC 사측 관계자에게 “이번에는 그저 넘기지 않겠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정리하고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KEC는 광평동 수출탑을 지나자마자 구미공단 입구에서 나타나므로 시민들에게 친숙한 기업이었다. 공단이 조성된 직후에 들어서 ‘향토기업 1호’로도 통했다. KEC 맞은 편은 ㈜코오롱인더스트리였다. 이곳에서도 2005년부터 정리해고 철회 투쟁이 진행된 바 있었기에 KEC 노사갈등을 코오롱과 혼동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의장선거 직전 최고조에 달한 불쾌함

    30일 낮 KEC 정문앞 농성장을 방문했다. 한 남자 조합원이 다가와 “어디서 오셨냐”며 수상한 듯이 물어왔다. “아 저는 경북일반노조 조합원입니다.” 그때 나와 안면이 있는 노조 활동가가 다가와 소개했다. “아, 이 사람은 이번에 당선된 김수민 시의원이야.” 경비 건물 앞에 선 채로 상황을 공유했다.

    남녀 혼성으로 100여명인 사측 용역이 기숙사에 난입한 시각은 새벽 1시 40분경이었다. 노조에는 여성 노동자가 많았고 그중에는 임신 3개월째인 여성도 있었다.

    조합원들은 저항하면서 용역들의 모습을 촬영했고 용역들은 여성 노동자의 가슴을 움켜쥐기까지 하면서 노동자를 끌어냈다. 여성 용역이 남성 용역에게 “그 여자 가슴을 놓으라”고 소리쳤고 그 남성은 되레 더욱 욕설을 퍼붓는 장면도 있었다 한다. 작전이 종료된 직후 용역은 기숙사 출입을 봉쇄했다.

    마침 한 동네에 사는 금속노조 차광호 선배도 현장에 와 있었다. 그는 내게 남아공 월드컵에서 응원 도구로 유행하던 부부젤라를 건넸다. 부부젤라는 노조 집회에서도 유용했는데 나는 그것을 불고 싶은 곳이 따로 있었다. 의장단 선거로 한창 괴로웠으니 내일(7월 1일) 개원하는 의회에서 불어버리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그날 밤에는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만나 앞으로의 의정활동 기조를 공유했다. 그런데 쉴 새 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한창 논의 중이었으니 받지 않았다. 재차 걸려오자 받았다. 모 의원이었다.

    나도 아는 어떤 사람들과 모여 있는 중이었던 그는 급기야 “수민아”라고까지 부르며 꼭 모임에 들르라고 했다. 목적은 뻔했다. 개원과 동시에 있는 의장단 선거였다.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회의는 밤 늦게 끝났는데 그때도 그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재촉에 못 이겨 원평동의 한 술집으로 갔다.

    그 자리에서 모인 이들은 특별히 내게 강권을 하지는 않았지만 허복 의원 지지를 요청했다. 태도가 부드러워서 나도 일단은 분을 삭였다. 답을 피하고 술이나 한잔 하고 곧장 일어나려고 했는데 지지 요청이 되풀이되었다. “네가 지지하고 싶은 의원이 있다면 지지해라. 단, 없다면 허 의원을 좀 밀어도.” 만일 내가 “내일 무효표를 던지기로 했다”고 즉답했더라도 그대로 나를 놔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벽 2시쯤 귀가했다. 정말이지 불가해한 일이었다. 나는 의원 이름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그가 누구를 의장으로 밀지 체크해 보았다.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허복 의원이 이기게 되어 있다. 굳이 나를 그렇게까지 귀찮고 괴롭게 할 필요가 없었다.

    당선된 후 흘러간 지난 한 달을 돌아보았다. 너무나 불쾌했다. 나를 지지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를 제 멋대로 재단하고 제 필요에 따라 접근하는 사람들이 나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결국 단 한 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김수민-3

    오른쪽 반팔 셔츠가 김수민 의원

    2010년 7월 1일 나는 반팔 와이셔츠에 캐쥬얼 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등원에 나섰다. 경고 시위였다. 그날 내 옷차림은 예상 외로 이슈가 되었고 어느 지역 언론에 실리기까지 했다. 보도 내용은 다소 긍정적이었다. 이렇게 화제가 될 줄도 몰랐다.

    국회에서 유시민 의원이 세미 정장으로 등원했다가 욕을 들은 것도 옛날 사건이 되어 있었다. 단병호 의원은 작업복 차림으로, 강기갑 의원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등원했지만 별 탈이 없지 않았던가. 내 옷차림이 새삼 화제가 되는 것도 낙후된 지역정치의 방증으로 여겨졌다. 나는 예전의 나와 달라진 것이 없으며 무턱대고 의회 안에서 남과 섞이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런 속내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 뒤로도 한동안 옷차림에 시비를 걸고는 했다. 정장을 걸쳐도 신발이 운동화면 시비, 넥타이를 매지 않아도 시비였다. 나는 여름에는 정장 차림을 피했다. 나는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었고, 차가 없어서 걷다 보니 옷이 흠뻑 젖을 때가 많았다. 여름에는 회의에서도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2011년인가 2012년에가에는 분홍색 남방을 두고 비난하는 하류 기자도 있었다. 물론 내게는 택도 없는 짓이었다. <계속>

    필자소개
    전 구미시의원. 스스로를 정당인보다는 사회운동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녹색당 소속. kimsoomi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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