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중국정치의 새 출발?
[중국과 중국인] 집권 3년차를 맞는 한국과 중국 정치
    2015년 01월 13일 10: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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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3년 차에 들어서는 한국과 중국 정치의 모습이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지난 1 년 동안 각종 대형 사고와 집권 세력내의 불협화음 그리고 인사 문제로 임기의 반환점이 돌기도 전에 심각한 권력누수 상황에 직면한 박근혜 대통령과 달리 시진핑(习近平)은 지위 고하를 막론한 강력한 반부패 운동으로 떵샤오핑(邓小平) 이래 최고의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으며, 동시에 이를 통해 조우용캉(周永康)을 비롯한 정치적 반대 세력들도 제거하면서 신속하게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의 3대 핵심 권력기관인 중국공산당, 행정부(국무원), 인민해방군의 고위 간부들이 시진핑과 왕치샨姚依林이 주도하는 반부패 운동에 의해 가을낙엽처럼 추락하고 있다. 조우용캉, 쉬차이호우(徐才厚), 링지화(令计划)를 비롯해 수많은 고위 간부들이 이미 차디찬 독방에 수감되었거나 조사를 받고 있다.

시진핑 집권 후 반부패 운동이 시작할 때만 해도 과거에 수차례 반복되었던 것처럼 ‘깃털만 건들고 몸통은 건들지 못할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몸을 사리면서 최후의 칼날이 과연 어디로, 그리고 누구를 향할 것인지 숨죽이며 지켜보는 상황으로 변했다.

1989년 6월 4일 발생한 ‘천안문 사건’의 출발점이 개혁개방 후 만연해진 당-정 간부들의 ‘부정부패 척결’ 요구였던 점을 상기해보면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이 ‘천안문 사건’ 이후 수면 아래로 잠긴 중국의 정치개혁에 다시 힘을 실어주는 단초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시진핑이 이렇게 전례 없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반부패 운동을 통해 권력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던 요인들과 그의 권력 강화가 이후 중국정치에 끼칠 영향에 대해 살펴보겠다.

중국공산당

중국공산당 회의 모습. 왼쪽에서 네번째가 시진핑

시진핑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그의 전임인 후진타오(胡锦涛)의 전폭적인 지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전임인 쟝쩌민(江泽民)처럼 당 군사위 주석 자리에 2년 정도 더 머무르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총서기와 군사위 주석 직을 동시에 물려주면서 시진핑의 권력 안정화에 적극 협력했다.

후진타오는 떵샤오핑에 의해 발탁된 1세대 신진 간부 중의 1인이었으며. 1992년 당시 50세의 젊은 나이로 파격적으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떵샤오핑 등 당의 원로들에 의해 쟝쩌민의 후임으로 지명되면서 쟝쩌민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으며, 심지어 당 총서기에 취임 한 후에도 정치국 상무위원회 내에서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서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후진타오는 임기 말에야 가까스로 장악한 (실질적인) 군부 지휘권을 시진핑에게 온전하게 이양함으로서 쟝쩌민에게 일격을 가했다. 후진타오의 당권 및 군권의 동시 이양에 대해 여러 ‘설’들이 많지만, 이유를 막론하고 중국정치에서 권력이양의 모범 사례로 기억될 것이며 이후에도 중국정치의 고질병인 원로들의 개입을 차단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왕치샨(王岐山)의 기율검사위(中央纪律检查委员) 서기 임명이다. 왕치샨은 원래 농업 및 금융부문 전문가였다. 그는 기율검사위 서기에 임명되기 직전까지 부총리로 금융 및 경제개혁 분야를 담당했었으며 이 때문에 총리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지만, 쟝쩌민에 의해 시진핑이 후진타오의 직계인 리켜챵을 밀쳐내고 총서기로 내정되면서 서열 2위로 밀린 리켜챵이 총리(관례상 당의 2인자가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 3위는 총리)를 맡게 되었고 왕치샨은 기율검사위 서기에 임명되었다.

이것이 시진핑과 왕치샨 모두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불거진 전임 정법위 서기 조우용캉의 전횡으로 당 중앙과 지방에서의 정법위원회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이 진행되었고 결국 당 18차 대회부터 정법위 서기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하지 못하고 정치국원이 담당하게 되었으며, 정치국 상무위원이 지휘하는 당 기율검사위가 정법위보다 큰 힘을 갖게 되었으며 반부패 운동 역시 탄력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는 압력에 흔들리지 원칙을 고수하는 왕치샨의 곧은 성격도 일조했다.

시진핑과 왕치샨 두 사람의 단결이 가져온 또 다른 효과는 진정한(?) 태자당 세력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부모가 혁명열사인 경우에 일반적으로 태자당 성원으로 부르지만, 초기에 태자당을 지칭할 경우에는 부모의 지위가 당 정치국원 이상일 경우를 의미했다. 따라서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숙부(江上青, 안휘이성에서 활동하다 지주들의 습격을 받아 희생당함)가 혁명 열사였던 쟝쩌민이나 아버지(曾山)가 장관급으로 중앙위원이었던 쩡칭홍을 태자당으로 구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에 비해 아버지(习仲勋가) 정치국원으로 부총리까지 역임했던 시진핑이나, 장인(姚依林)이 정치국 상무위원까지 역임한 왕치샨은 진짜 태자당 성원으로 분류될 수 있다. 당, 정, 군 및 경제 분야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던 태자당 구성원들이 쟝쩌민 세력의 지나친 권력욕 및 부정부패에 적극적인 지지를 유보하다가 시진핑과 왕치샨의 명분과 행동에 지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런 요인들이 긍정적으로 더해지면서 시진핑은 짧은 시간에 확고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시진핑과 더불어 쌍두마차로 불리던 리켜챵 총리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잘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약화된 것처럼 평가 받고 있다.

어찌됐던 여러 요인들이 맞물려 시진핑은 전례 없던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몇몇 외부 언론들로부터는 마오쩌뚱이나 떵샤오핑에 버금가는 권력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시진핑의 이런 신속하고 강력한 권력 장악이 과연 중국정치에 긍정적으로만 작용할 것인가?

어떤 권력 구조가 좀 더 효율적인가, 즉 중국정치를 예로 들어 보자면 마오쩌뚱이나 떵샤오핑처럼 강력한 1인자에 의한 권력행사가 더 효율적인지, 아니면 쟝쩌민 이후 모습을 갖춰 가고 있는 정치국 상무위원 더 나아가 정치국에 의한 집단지도 체제가 더 효율적인지에 대해 단언하기는 어렵다. 장단점이 너무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만 마오쩌뚱과 떵샤오핑 시대를 지나면서 최고 지도자의 임기가 종신제에서 임기제로, 통치방식이 인치(人治)에서 법치로 정착해가는 과정에서 시진핑으로의 지나친 권력 집중으로 인한 중국정치의 과거로의 회귀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있다. 최근 홍콩 언론에서 시진핑의 2027년까지의 재임 및 명문화된 규정은 아니지만 관례에 따라 2017년에 은퇴해야 할 왕치샨의 연임까지 거론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우려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아직 7년이란 시간이 남아있어 섣불리 미래를 예단할 필요는 없지만, 최근 전개되고 있는 중국정치의 상황이 이런저런 기대와 우려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올 한해도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이 지속될 것이고 이와 함께 그의 권력도 한층 강화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것인지 지켜보는 관전자들 역시 긴장의 끈을 놓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소개
중국의 현대정치를 전공한 연구자. 한국 진보정당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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