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에 관한 에피소드
    [푸른솔의 식물생태 이야기] 벼를 보며 아버지를 생각하다
        2014년 12월 30일 09: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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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란?

    벼<Oryza sativa Linne>는 벼과 벼속의 한해살이 풀이다.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벼는 동남아시아의 야생종 벼가 원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산스크리트어로는 브리히(Vrihi), 말레이시아과 필리핀 등지에서는 바디(Badi), 빈히(Binhi) 등으로 ‘벼’를 부르는데 이것이 우리말의 벼(Bia)의 어원으로 이해되고 있다.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니(Ni), 누안(Nuan) 등으로 불리워졌는데, 이 말은 우리말의 ‘논’과 흡사하다. 그래서 벼는 동남아시아/인도 등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인 모양이다. ​

    1976년 경기도 여주에서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탄화미(炭化米)가 발굴된 적이 있어 한국에서 벼농사는 이 그 이전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오래된 역사가 있다.

    벼1

    2014/8/27/ 경기도, 벼의 꽃

    벼2

    2014/8/27/ 경기도, 벼의 잎

    벼3

    2014/8/27/ 경기도, 벼의 열매

    벼의 생존전략

    벼의 탁월한 생존전략은 엄청난 탄수화물 덩어리를 씨앗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를 얻기 위해 사람이 재배하여 그 생존을 보장하도록 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잎의 표면에 거친 털이 있고, 가장자리에도 꺼칠꺼칠한 톱니모양의 거치라고 나는 생각해 본다.

    이로 인하여 초식동물이 함부로 벼의 잎을 먹지 못하게 하고, 각종 동물들이 함부로 벼가 자라는 곳에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한다. 벼가 일정한 정도 성숙한 후에 잎을 잘못 만지면 마치 칼날에 비는 것처럼 손이나 얼굴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벼에 관한 에피소드

    나는 남부의 아주 외딴 산골에서 자랐다. 잡초 제거용 제초제가 나오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농부들이 농약을 뿌리는 것으로 대체하고, 요즘은 유기농을 하는 농부들도 오리나 달팽이 등을 풀어 잡초를 제거한다.

    그러나 내 유년시절 시절에는 모심기 후에 벼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하면, 잡초를 제거하고 벼의 뿌리 속에 산소가 공급될 수 있도록 사람의 손으로 일일히 풀을 뽑고 벼 사이 흙을 뒤집어 주는 김매기를 직접 해야 했다.

    김매기를 할 때면 온 가족이 한 여름의 햇볕이 내려 쬐는 논에서 허리를 숙이고 이 논을 마치고 나면 저 논으로, 해가 뜨기 전부터 해질 무렵까지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땡볕 아래 하루종일 쉬지 않고 진흙속에 빠지는 발을 옮겨가며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벼가 꽤 자라고 나면 잎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톱니같은 거치는 가슴과 목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그 베인 자리는 벼 잎에서 나온 독이 스며들고 그 엘러지에 피부가 부어 올라, 따가우면서 가려운 그 상처를 긁느라 밤이면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김매기를 하는 때이면 아버지는 늘 날카로우셨고, 가족 전체가 신경이 곤두서곤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아마도 내가 중학교에 입학 무렵 쯤 때로 기억되는 시기에 제초제로 대체하기 전까지, 그런 김매기를 매 해 모든 논에 3번씩은 꼭 준수를 하셨다.

    조선 세종 때에 저술된 농사직설(農事直說)에도 ​“김매기는 1년에 모두 3~4회 한다’고 했다고 하니, 그것이 벼농사를 짓는 우리네의 오랜 전통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내 유년시절의 논에서 벼 뿌리를 더듬었던 그 김매기는 아련한 추억보다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웠던 기억 중에 하나이다.

    김매기에 관한 에피소드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대학가에는 주체사상을 공부하거나 단파 라디오을 구해 북한방송을 듣는 것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사독재 시절에 모든 언론이 ‘보도지침’이라는 통제를 받고 있었기에 사실에 관한 왜곡된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었지만, ‘구국의 소리 방송’이라는 북한 방송에서는 남한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를 알 수 있었던 것이 주요한 원인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평화의 댐을 만들게 했던 금강산 댐이 사실은 규모가 작은 것이어서 대응 댐이 필요없다는 이야기, 서울대 학생이었던 박종철 선배가 경찰에 끌려가 고문으로 죽었다는 이야기 등 이후 사실로 밝혀졌던 것들도 북한방송에서나 그 사실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젊은 대학생들로 하여금 북한에 대한 호감도를 높였고, 광주에서 같은 민족을 학살을 학살한 남한 위정자들에 대한 증오는 반외세 자주와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북한에 더 친근감을 느끼게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어느 해에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가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식사시간에 라디오를 켜고 당시 최고의 히트를 쳤던 조용필의 노래를 듣곤 하셨는데, 그날 식사시간에도 조용필 노래를 찾으려 이리저리 주파수를 돌리시다가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의 뉴스가 흘러 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신기하셨던지 아버지께서도 그 주파수를 그냥 두었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북한 방송을 듣게 되었다.

    수도권에는 남한 정부가 북한 방송이 들리지 못하게 방해 전파를 쏘아 올리고 있어서 단파 라디오 없이는 북한 방송을 듣기 어려웠지만, 상대적으로 방해 전파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남부지방에서는 북한방송이 쉽게 잡혔던 모양이었다.

    ​뉴스를 전하고 있었는데, 기자가 평양 인근의 한 농장을 방문하고 그곳의 농장 지배인과 인터뷰를 하는 내용이었다. 그 인터뷰 중에 농장 지배인 왈, “19XX년도에 위대한 김일성 수령 동지께서 황공하옵게도 저희 농장을 방문하셨고, 그 때 1년에 김매기는 7번을 해야 한다고 교시하셨는데, 우리 농장은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어 매해 7번의 김매기를 준수하고 있으며, 그 결과 수확량이 증대의 효과를 보고 있다”라는 대충 그런 취지의 것이었다.

    1년에 김매기 7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와 나는 서로 얼굴을 보면서 아연실색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식사의 수저를 놓고 일어 나시면서 ‘지옥이 따로 없네’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후에도 주체사상을 읽거나 그것에 심취한 선배나 친구들로부터 여러 권유를 받았지만, 나는 그것에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교시만으로 김매기를 7번이나 시키는 그 체제에 대하여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의 TV나 라디오를 제한 없이 공개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굳이 따로 교육을 하지 않더라도 생활의 곳곳에서 그곳의 실상을 훨씬 더 잘 알 수 있는 더 나은 길이 있을까? 그러나 아직도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남한의 위정자나 지배층들의 자기들을 폭로하는 그 언로를 막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오히려 그 길을 막는 것을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사부재향(思父在鄕)

    아버지께서는 80이 가까운 연세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봄에 볍씨를 뿌리시고 여름에 모심기를 하셨고 그리고 가을에 추수를 하셨다. 곳곳과 FTA가 체결되고 더 이상 돈도 되지 않는 벼농사라며 자식들이 매 해 말리지만 아버지는 아랑곳 없으시다.

    내 먹을 것은 내가 키우겠노라며 그리 살아 왔으니 남은 여생 그리 사시겠다 하신다. 몇해를 더 아버지를 뵐 수 있을까? 그런 의문만큼이나 벌판에 벼들이 자라는 모습을 더 몇해나 더 볼 수 있을까? 아득해지는 세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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